[WIKI 프리즘]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 크리스마스란 어떤 날이었을까?
[WIKI 프리즘] 미국의 흑인 노예들에게 크리스마스란 어떤 날이었을까?
  • 최석진 기자
  • 기사승인 2020-12-22 19:24:23
  • 최종수정 2020.12.23 0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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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때 쓸 칠면조 털을 뽑는 사람들, 1851년(Heritage Images)
크리스마스 때 쓸 칠면조 털을 뽑는 사람들, 1851년(Heritage Images)

미국의 노예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떤 의미였으며, 또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보냈을까?

남북전쟁 후 남부의 백인들이 남긴 초기의 기록들이 노예주들의 자비로운 모습과 이에 감사하는 노예들이 즐겁게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는 이상적인 모습들을 그리고 있는 반면에 현실은 이보다는 훨씬 복잡했다.

1830년대 앨라배마나 루이지애나, 그리고 아칸소처럼 많은 노예들을 거느린 주들은 미국 최초로 크리스마스를 주의 공식 휴일로 지정했다. 선물을 주고받고, 캐럴을 부르며 집 안을 장식하는 등의 많은 크리스마스 풍습들이 미국 문화로 굳건히 자리 잡은 시기는 1812년과 1861년 사이 남북전쟁 전의 남부 주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많은 노예 노동자들에게는 이때가, 비록 며칠에 불과하기는 했지만, 가장 긴 휴식을 취하는 시기였으며, 이 시기에 일부 노예들에게는 멀리 떨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거나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도 했다. 또, 많은 노예들은 이 때 주인들로부터 선물을 받거나 다른 때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많은 노예들이 크리스마스 휴일을 즐기는 데 동참하기는 했어도 일부 노예들에게는 반역을 꾀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퍼듀 대학 교수이자 『남부의 크리스마스 : 노예제도, 크리스마스, 그리고 남부의 기억』이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 로버트 E. 메이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시즌 동안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 것을 염려한 노예주들은 선제적으로 노예들을 가혹하게 다뤘다고 한다. 

이러한 노예주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에도 노예 매매를 중단하지 않았다. 또, 노예주들은 노예 노동자들을 대여하는 연례행사를 멈추지 않아, 일부 노예들은 연말연시에도 가족들과 분리된 채 멀리 실려 가기도 했는데, 노예들은 이날을 ‘가슴 찢어지는 날(heartbreak day)’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하루하루를 억압 상태에서 보내야했던 노예들에게 저항의 기회를 베풀어주기도 했다. 저항은 여러 형태로 이루어졌다. 노예들은 크리스마스 휴가철이라는 이완된 분위기를 이용해 독립 욕망을 종교적·문화적으로 표출하기도 하고 도망을 시도하기도 했다.

“노예들에게 주어지는 크리스마스 선물”

노예주들에게 선물 하사는 힘을 상징했다. 크리스마스는 노예주들이 자신들의 노예에게 자선과 함께 가부장적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노예들은 거의 예외 없이 경제력도 없었고 선물을 살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노예주들은 한 해 동안 지급을 보류하고 있던 물건들, 즉 신발, 의류, 용돈 등을 이 시기에 선물했다. 텍사스의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실버스론에 따르면 텍사스의 한 노예주는 크리스마스 때 각 노예들에게 25달러씩을 지급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사탕이나 동전이 든 양말을 받았다.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 하인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노예들은 무척 기뻐하며 사방에서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해왔다.”

남부의 한 농장주는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역사학자 스티븐 니센바움은 자신의 책 『크리스마스의 투쟁』에 백인 노예 감독관이 왜 크리스마스에 노예들에게 선물을 주는 것이 물리적 폭력보다 효과적인지를 묘사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축하하기 위해 소 28마리를 잡았다.”

노예 감독관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이 소들의 가죽을 벗겨 채찍으로 사용하는 것보다 이 방법으로 훨씬 더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한편, 역사학자 샤우나 비그햄과 로버트 E. 메이는 노예들은 대부분이 주인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주인에게 선물을 줌으로써 노예들이 일시적이나마 주인과 경제적으로 평등하다는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주인에게 어린애처럼 의존해야 하는 노예의 기존 설정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는 노예들은 주인과 크리스마스 게임을 하며 놀 때도 게임에서 졌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말하며 주인에게 선물을 줄 수 없었다.

일부 경우에는 노예들이 게임에서 졌을 때 답례로 주인에게 선물을 하는 경우가 있기는 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의 한 농장에서 일부 하인들이 주인들에게 손수건으로 싼 달걀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예주와 노예 사이의 일방적인 선물 하사 풍습은 백인의 권위와 가부장적 모습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크리스마스 휴가와 자유

노예들에게 크리스마스란 추수철과 다음해의 농사를 준비하는 사이의 농한기 휴식기를 의미했다. 고된 노동과 억압으로 점철된 삶에서 찰나적으로 주어진 소중한 자유 시간이었다.

“우리들은 이때를 우리 주인들이 베풀어준 우리들만의 시간으로 여겼다. 우리는 이 시간을 우리가 원하는 대로 활용하거나 허투루 낭비하기도 했다.”

유명 작가이자 연설가이며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프레더릭 더글러스는 이렇게 썼다. 그는 20살에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멀리 떨어진 지역에 가족이 있던 노예들은 크리스마스 때부터 새해까지 6일을 쉴 수 있었다.”

일부 노예들은 크리스마스 휴가철의 이완된 분위기를 틈타 자유를 향한 탈출을 감행하기도 했다. 1848년 조지아 주의 결혼한 노예 부부 엘렌 크래프트와 윌리엄 크래프트는 크리스마스 때 주인이 발급해준 통행허가증을 이용해서 도망을 시도해, 기차와 배를 타고 필라델피아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또, 지하철로의 아이콘으로 유명한 해리엇 터브먼은 185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그녀의 형제 3명이 크리스마스 다음날 팔려간다는 소문을 듣고 필라델피아에서 메릴랜드 동부 해안까지 장도(壯途)에 오르기도 했다. 3형제의 주인은 노예들이 크리스마스 날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해리엇은 형제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대신 그들을 데리고 필라델피아로의 탈출을 감행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미국의 어느 집 마당에 ‘흑인 산타’ 장식이 설치되어있다(사진=알렉시스 웨인라이트 페이스북 캡쳐, 연합뉴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미국의 어느 집 마당에 ‘흑인 산타’ 장식이 설치되어있다. (사진=알렉시스 웨인라이트 페이스북 캡쳐, 연합뉴스)

존 쿠너링(John Kunering)

크리스마스 시즌에 노예들이 저항하는 모습은 반드시 폭동이나 탈출의 형태를 띠지만은 않았다. 노예들은 이 기회를 이용해 사회의 억압적 분위기를 자신들만의 어떤 것들로 바꿔가며 자신들의 인간애와 문화적 뿌리를 표출하곤 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윌밍턴에서는 노예들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자신들이 ‘존 쿠너링’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축제를 벌였다. 이때 그들은 요란스러운 복장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동물의 뼈 또는 소의 뿔이나 트라이앵글로 박자를 맞춰가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러면 각 가정에서는 그들에게 선물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크리스마스 아침이면 모든 아이들이 존 쿠너링을 보기 위해 일어났다.”

작가이자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해리어트 제이콥스는 자서전 『어느 노예 여성의 일상』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존 쿠너링이 없었다면 크리스마스는 속빈 강정이었을 것이다.”

노예들이 벌이는 그런 식의 떠들썩한 잔치를 윌밍턴 백인들이 모두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의 그들을 격려해준 것만은 사실이었다.

“연중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노예들에게 잠깐 주어지는 휴식으로서의 흥겨운 행사가 거부된다면 그들은 정말 비탄에 잠길 것이다.”

남북전쟁 이전 시기 백인 판사였던 토마스 러핀은 이렇게 말했다.

『노예 문화』의 저자인 역사학자 스털링 스터키는, 쿠너링 행사는 심원한 아프리카의 뿌리를 반영한다고 말했다.

“춤과 노래가 조상의 영혼과 신과 대화하는 수단이었던 서아프리카 지역 주민들을 떠올리면 크리스마스 문화가 미국 내의 아프리카 인들에 전이되어 성스러운 가치를 존 쿠너링이라는 형태로 이어지도록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노예들 모두가 선물을 받았다.”

노예들은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억을 오래도록 간직했다. 그들은 그때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며 고된 농번기의 시름을 잊었다. 그들은 크리스마스를 떠올리면서 일종의 안락함과 해방감을 맛봤다. 

하지만 그들은 크리스마스 선물을 맞교환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를 떠올리면서 노동을 해도 대가가 따르지 않는 자신들 입장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해리엇 터브먼이나 크래프트 부부와 같은 일부 노예들은 크리스마스 시기를 사회에 저항하는 절호의 기회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어른이 된 노예들은 노예제라는 폭압적 제도에 시달리면서도 어린 시절 받았던 선물들을 잊지 못했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없었다.”

보레가드 테니슨이라는 노예는 ‘공공산업진흥국(WPA)’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상했다.

“그래도 그들은 집 안에 길다란 참나무 테이블을 준비했다. 테이블 위에는 선물들이 가득했고, 흑인 노예들 중 그날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위키리크스한국=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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