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NYT "누가 이 시대의 세리인가"... 세대를 뛰어넘는 갈등과 포용 정신은
[WIKI 인사이드] NYT "누가 이 시대의 세리인가"... 세대를 뛰어넘는 갈등과 포용 정신은
  • 최석진 기자
  • 기사승인 2020-12-28 07:03:52
  • 최종수정 2020.12.28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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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화가 지오바니 치마부에가 1280년쯤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성화 '조롱받는 예수'가 프랑스 파리에 전시돼 있다. 이 성화는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의 한 시골집 부엌에 수십년 동안 방치됐다가 2019년 6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초기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화가 지오바니 치마부에가 1280년쯤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성화 '조롱받는 예수'가 프랑스 파리에 전시돼 있다. 이 성화는 프랑스 북부 콩피에뉴의 한 시골집 부엌에 수십년 동안 방치됐다가 2019년 6월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로이터연합뉴스)

뉴욕타임스는 기독교 칼럼니스트인 피터 웨너의 특별 기고를 게재했다. 피터 웨너는 보수적인 기독교인이지만 철저하고 신실한 신앙 생활로 폭 넓게 존경을 받는 작가이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의 편에 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그는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에 대해서 매우 날카롭게 비판을 해왔다. 그는 레이건 대통령 때 교육부장관을 역임한 윌리엄 베넷의 보좌관으로 일하다가 베넷 장관의 소개로 아버지 부시 대통령 아들 부시 대통령의 연설문을 쓰는 보좌관으로 일하기도 했다. 지금은 기독교 보수주의 싱크 탱크인 ’트리니티 포름(Trinity Forum)‘에서 일하고 있다.

“다름(차이)에 익숙해야 한다.”

이 구절은 예수의 생애를 다룬 놀라운 TV 드라마 ‘선택받은 자(The Chosen)’에 나오는 대사이다. 이 드라마에서 배우 조나단 루미가 역을 맡은 예수는 마태를 불러 자신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한다. 그러자 먼저 예수를 따르고 있던 시몬 베드로가 강한 반대 의사를 표명한다.

마태는 세리로, 로마 당국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매국노 취급을 받고 있었으며, 잔혹하며 불성실한 존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은 세리들을 조국의 반역자나 버려진 인간 취급을 했다.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마태를 제자로 받아들이겠다는 예수의 결정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선택했을 때도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는 이렇게 받아쳤다.

“하지만 이 경우는 다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한다.

“저는 세리가 아닙니다.”

이 지점에서 예수는 모든 일이 제자들이 바라는 바와는 전혀 다르게 전개될 것임을 베드로에게 깨우쳐준다.

1세기의 기독교도들은 예수가 얼마나 급진적 생각을 지니고 있고, 얼마나 포용력이 강한 존재였는지 전혀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이 점에 있어서는 오늘날의 기독교도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예수가 어떤 존재였는지 그 실체를 우리 뜻에 맞게 재단하려하지만 예수의 삶과 사역은 전혀 우리 의도와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모든 장벽을 하나씩 허물어뜨렸던 존재였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조우(遭遇)하는 장면을 한 가지 예로 들 수 있다. 예수와 이 여인은,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과 메시아가 왜 자기 같은 비천한 존재와 말을 섞는지를 놓고 대화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이 여인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서도 대화를 한다. 이 여인은 애초에는 예수에게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자 했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녀는 전 남편들이 다섯 명이었으며, 현재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의 입에서는 단 한마디의 비난도 나오지 않았다. 이 여인은 예수가 자기 말을 들어주었으며, 이해받았고,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고 느꼈다. 한 성경 주석가는, 이 사실이 예수가 ‘사람을 끌어당기는 고결함과 상대방을 존중해주는 태도’로 그녀를 대했음을 나타낸다고 평한다.

신약성서 학자 케네스 베일리에 따르면, 이 여인의 삶은 예수와의 조우를 기화로 탈바꿈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이 여인은 ‘기독교 역사에서 최초의 여성 전도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서 예수가 세상을 구원할 구주임을 선언했다.

이 이야기는 예수가 기존의 종교적·문화적 사고(思考)를 배격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예화이다. 여자들이 천대받는 경우가 많은 사회에서 한 남자로서의 예수가 한 여자를 상대로 진지한 대화를 이끌었음이 이를 입증하고, 유대인이었던 예수가 과거 역사적 사건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배척당하던 사마리아 사람과 기꺼이 대화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베일리 교수는,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 그녀의 공동체를 찾았고, 그들을 살갑게 대했다. 그 과정에서 과거의 인종적이고 신학적이며 역사적인 장벽이 무너진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와 공동체는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아메르스포르트/네덜란드, EPA=연합뉴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을 맞아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신자들이 대형 십자가를 메고 있다.
(아메르스포르트/네덜란드, EPA=연합뉴스)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을 맞아 네덜란드 아메르스포르트에서 신자들이 대형 십자가를 메고 있다.

예수에게서 이런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는 문등병자들을 만지고 생리혈이 멈추지 않는 여인을 낫게 했다. 당시 이런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불결한 대상들이었다. 예수는 또 죄스러운 삶을 살던 여인을 용서한 후 ‘평안히 가거라’라고 말했으며,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여겨지던 중풍환자와 장님을 고쳤다. 그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힐 때 그의 옆에서 함께 못 박히며 참회하는 강도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천국에 있게 될 것이다”고 말하기도 했다.

예수는 그릇된 무리와 함께 돌아다니며, 비천한 계층의 제자들과 어울린다고 끊임없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여리고로 향하는 길 위에서 강도당한 여행자를 도와준, ‘착한 사마리아인’ 예화는 이 영웅담의 주인공이 영향력 있는 제사장이나 신분이 높거나 특권층이 아니라 증오의 대상이던 외국인임을 보여준다.

기독교도들에게 성육신은, 예수라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 드라마에 참여하는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그 드라마에서 비치는 대부분 예수의 모습은 버려지고, 천대받고, 내몰린 사람들에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이다. 넘어지고 쓰러진 사람들 편에 서는 모습인 것이다.

예수는, 그를 자신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정치적·종교적 지배계층의 목표물이 되고 종내는 처형당하기는 했어도, 이들 사회의 소외계층들로부터는 사랑받았다.

필자는 신앙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사실에 의문을 가져왔다. 즉, 어째서 예수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있는 소외된 사람들과의 유대감이 주목받기보다는 무시되었으며, 왜 배척받고 버려진, 사회의 그늘에 사는 남녀들을 품으려는 그의 노력이 존중받기보다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는지 궁금했다.

이 대답의 일부는 분명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대한 믿음과 관련이 있다. 예수는 이 ‘하나님의 형상’을 한 모든 사람들에게서 지울 수 없는 고결함과 무한한 가치를 보았다. 그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the least of these)’조차도 존중했다. 아무도 그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을 때 예수는 그렇게 했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예수의 이러한 가르침을 가장 잘 표출한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1858년 일리노이즈 루이스턴에서 행한 연설에서 ‘독립선언’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면서 “신의 형상과 모습을 닮은 사람은 누구도 같은 사람으로부터 짓밟히고, 천대받으며, 짐승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예수가 소외된 자들과 유대감을 형성한 또 다른 이유는 의심할 나위 없이 그의 자비심과 연민, 그리고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측은지심에 있었으며, 사회에서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는, 영혼을 말살하는 굴욕감으로부터 해방시켜주려는 욕망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들만이 이유가 다는 아니다. 예수는 ‘더럽고’ 내몰린 사람들에 대한 포용과 연대감을 그들뿐만 아니라 권력자들과 특권층, 나아가서는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실현하고자했다.

예수는 우리 인간들이 소외와 독선, 그리고 오만에 시달리며, 타인을 심판함에 있어서는 전혀 망설임이 없는 존재라고 간파했음이 틀림없다. 또, 예수는 우리가 타인들을 얼마나 간단히 적으로 규정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인종, 다른 민족, 다른 계급, 다른 성별, 다른 국가를 손쉽게 적으로 돌릴 수 있다. 나아가 우리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충성을 타인에 대한 자비나 인간관계보다 앞세운다. 우리는 다름(차이)을 위협으로 간주한다. 그러한 결과 우리는 서로 고립되고, 사고(思考)가 경직되며, 용서를 모르는 냉혹한 존재가 되기 쉽다.

2018년, 부활절을 앞두고 몰타에서 열린 거리극에서 예수로 분장한 배우가 십자가 고난을 재현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2018년, 부활절을 앞두고 몰타에서 열린 거리극에서 예수로 분장한 배우가 십자가 고난을 재현하고 있다(로이터 연합뉴스)

예수는 소외된 자들은 특권층을 깨우칠 수 있는 자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확실히 믿었다. 지배 계층에게 겸양의 미덕을 깨우치고 독단의 악덕을 경계할 수 있도록 하는 장점들이 있다는 점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는, 힘없고 가난한 자들은 하나님을 다르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들은 독야청청 존재하는 윤리 교사로서의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는 은총을 내려주시는, 위안과 구원의 원천으로 하나님을 갈구했다. 그들은 권세 높은 사람들과는 다른 프리즘을 통해 하나님과 세상을 바라보았다. 다시 말해, 세상의 비천한 존재들은 우리들 사이에 퍼져있는 영적 근시안을 교정해줄 수 있는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20세기를 돌아보면 간단히 알 수 있다. 당시 종교 단체들이 시대의 변방에 내몰린 사람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가. 기독교도인인 우리들이 자문해야하는 올바른 질문은 왜 우리는 그들보다 훨씬 인간적이고 깨어있는 존재인가가 아니라 현대의 소외된 자들은 누구이며 우리가 그들에게 잘 못하고 있지는 않은지 이어야한다. 

우리 시대의 세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우리는 업신여기지만 예수는 껴안은 그 존재들 주변에 ‘혐오의 장벽’을 치고 있지는 않은가?

“80년대 나를 포함한 기독교도들이 에이즈 위기에 어떻게 반응했는지 그 생각이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최근 필자의 오랜 친구이자 워싱턴 주 벨뷰의 벨뷰 장로교회 원로목사인 스콧 더들리는 이런 소회를 들려주었다.

“우리가 1세기의 예수님처럼 현대 역병의 희생자들을 먼저 보살피고 가장 귀하게 여겼더라면 우리는 성소수자 공동체(L.G.B.T.Q)와 완전히 다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해요. 우리는 이 문제와 관련해 현재도 커다란 견해차를 보이고 있지요. 하지만 나는 대화를 한다면 상호존중 정신이 발휘될 수 있을 것으로 믿어요. 그렇게 되면 성소수자 공동체는 기독교도들로부터 받게 될 상처를 덜 두려워해도 될 겁니다.”

그러나 대화로 접근할 수는 없었을지 몰라도, 스콧이 인식했던 대로, 80년대 기독교는 에이즈 희생자들을 먼저 돌보고 귀하게 여겼어야했다.

한편, 어떤 사회나 종교적 신념도 도덕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수는 ‘도덕 폐지론자(antinomian)’는 아니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 폐지론자’란 기독교도는 은사를 입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종교적 율법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사람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인간관계이지 율법 책이 아니며, 윤리 규범보다는 자비심이 먼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매우 힘들고 현실의 일반적 인간관계와 행위에 비춰 너무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가르침을 끊임없이 되새겨야한다. 기독교의 매 세대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예수의 모범이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놓고 고민해야한다. 우리는 그의 가르침에 더 다가가기 위해 감성을 발휘해야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독선과 율법주의에 빠질 수 있다. 그런 위험성은 예수를 믿고 타인들을 사랑하기 위해 세워진 바로 그 기구인 교회를 타락시킬 수도 있다.

예수의 삶과 사역이 주는 교훈은, 타인들의 이야기와 고뇌를 이해하는 데에는 그들을 비난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 보답은 무궁무진함을 깨닫는 데에 있다. 그리고 성탄과 성육신의 교훈은, 적어도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들에게는, 우리 모두도 한 때 소외된 존재였으며, 상처받았지만 예수의 사랑을 받았으며, 구원의 손길을 받기에 충분한 존재라는 사실에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리 하셨는데 우리는 어째서 서로 사랑의 손길을 내미는 일이 이리도 힘든가?

 

dtpchoi@wikileaks-k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