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난투극, 괴한 침입, 총격...미국 의사당 폭력의 역사
[WIKI 프리즘] 난투극, 괴한 침입, 총격...미국 의사당 폭력의 역사
  • 최석진 기자
  • 기사승인 2021-01-13 08:45:12
  • 최종수정 2021.01.12 1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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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폭동으로 이어진 친트럼프 시위대의 대선결과 불복 시위[AP=연합뉴스 자료사진]
의회폭동으로 이어진 친트럼프 시위대의 대선결과 불복 시위[AP=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 국회의사당은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상원과 하원이 법안을 통과시키고, 대통령이 취임선서를 하며 연두교서를 발표하는 장소 역할을 했다. 그러나 설립의 기본 목적이 입법부의 본당인 국회의사당은 방화, 불법침입, 난투극, 총격 같은 극단적 폭력이 벌어지는 현장이기도 했다.

미국 국회의사당의 건립은 1793년 9월 18일 조지 워싱턴이 주춧돌을 놓는 것으로 공식적인 첫 삽을 떴다.

건설은 주로 흑인 노예들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공식 업무는 연방정부가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 D.C로 옮겨온 1800년부터 개시되었다. 워싱턴 D.C.에 최초로 건립된 다른 많은 연방정부 건물들처럼 국회의사당도, 고대 그리스나 로마 건축을 연상시키는, 19세기의 신고전주의 스타일로 설계되었다.

의사당 건립 공사는 1812년 미국이 영국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동원령을 내리면서 중단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미국과 영국이 전쟁에 돌입한지 1년 뒤 미국 군인들이 당시 영국 식민지였던 캐나다의 수도에 불을 지르자, 영국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1814년 워싱턴 D.C.의 연방 건물들에 불을 질렀다. 이때 피해를 본 건물들에는 백악관과 국회의사당이 포함되었다.

이 때의 화재로 국회의사당이 전소되지는 않았지만, 국회의원들 중 일부가 연방정부를 다시 필라델피아로 옮기거나 다른 도시로 이전하자고 주장할 정도로 피해는 컸다. 결국 국회의사당은 이전 대신 그 자리에 재건축하기로 결정되었고, 주(州)들이 늘어나고 의원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확장 공사를 계속하게 되었다. 오늘날 국회의사당의 면적은 150만 평방미터가 넘고, 600개 이상의 방이 자리하고 있다.

이때부터 이어지는 몇 십 년 동안 의사당에서는 국회의원들 간의 갈등의 골이 높아지고 폭력이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국회의사당의 극심한 폭력 사태

미국 역사에서 남북전쟁으로 이어지는 시기는 흑인 노예들과 자유를 획득한 흑인들, 그리고 노예제 폐지론자들 사이의 폭력으로 점철된 때였다. 노예제를 반대하는 신문들이 폭도들의 습격을 받고, 국회의원들끼리 노예제도를 놓고 서로 폭력을 휘두르는 시기였던 것이다.

의원들끼리의 폭력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찰스 섬너 의원에 대한 지팡이 공격이었다. 1856년 노예제를 지지하던 하원의원 프레스톤 브룩은 의사당 홀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던 상원의원 찰스 섬너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지팡이를 휘둘러 폭력을 가했다. 브룩 의원은, 의원들끼리의 결투를 금지한 법률을 지키기 위해 지팡이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이 법안은 메릴랜드에서 결투를 벌이던 국회의원 중 한 명이 사망하자 1839년에 제정되었었다.

섬너 의원에 대한 공격은 아주 드문 사건이 아니었다. 역사가 조안 B. 프리먼은 『피의 벌판 : 의회 폭력과 남북전쟁에 이르는 길』이라는 책을 집필하기 위한 자료 조사 과정에서 70건이 넘는 의원들 사이의 폭력 사태를 확인할 수 있었다.

1858년 어느 날 새벽 2시에 한 남부 출신 의원이 북부 출신 의원의 멱살을 잡자 약 30명의 국회의원들이 하원에서 뒤엉켜 집단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 또, 1860년에는 한 의원이 하원에서 노예제를 반대하는 발언을 하자 노예제를 찬성하는 의원들이 노예제 반대 의원들에게 권총과 지팡이로 위협을 가하는 일도 벌어지기도 했다.

1860년 에이브러햄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주들은 연방에서 탈퇴하고 전쟁을 선언했다. 한때는 국회의사당에서 함께 일했던 남부 출신 의원들은 국회의사당이 상징하는 북부의 연방파에 대항에 전쟁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남부연합파는 남북전쟁을 통해 워싱턴 D.C.를 단 한 번도 점령한 적이 없었다.

(사진=연합뉴스)
(사진=연합뉴스)

국회의사당에서의 총격과 폭발 사건들

의원들끼리의 결투나 물리적 충돌과는 별개로 국회의원이 아닌 사람들도 국회의사당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폭탄을 터뜨렸다.

1915년 7월 2일, 전직 하버드 대학 교수였던 에릭 뮤엔터는 국회의사당 상원 접견실 인근에 3개의 다이너마이트가 든 꾸러미를 설치했다. 폭발은 자정쯤 일어났으며, 당시 의회는 휴회 중이었다. 이 폭발로 근무 중이던 의회경찰 한 명이 나가떨어지는 했지만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일 태생의 폭파범은 이후 워싱턴 D.C.의 언론사에 편지를 보내,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도운 행위에 반대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으며, 이 폭발음이 전쟁 참여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 다음 뮤엔터 교수는 뉴욕 롱아일랜드에 있는 J.P. 모건의 자택을 찾아 이 금융업자에게 권총을 발사했다. 모건은 가벼운 총상을 입고 살 수 있었다. 범인은 곧 체포되었고, 수감된 지 며칠 만에 자결했다.

1954년 3월 1일에는 네 명의 푸에르토리코 출신 미국인들이 총을 발사해서 5명의 의원들이 다치는 사건도 일어났다. 범인들은 푸에르토리코의 독립을 위해 그 같은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은 미국 시민이면서도 대통령 선거의 투표권이 없고, 미국 의회 내에 자신들을 대표할 국회의원이 없다. 총상을 입은 의원들은 살아났으며, 범인들은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이후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7년 범인 중 한 명의 형기를 감형해주었고, 1979년에는 나머지 세 명에 대해서도 사면을 베풀었다.

1971년 3월 1일에도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폭발이 발생했다. 이 폭발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약 30만 달러의 재산 피해를 입었다.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라는 단체가 나서서 이 폭발은 자신들이 소행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라오스 폭격에 항의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또, 13년 뒤인 1983년 11월 7일에도 국회의사당 상원 건물 2층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한밤중에 터진 폭탄으로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25만 달러에 상당하는 재산 피해를 입었다. 이번 폭발을 자행했다고 주장하는 단체는 자신들이 ‘무장 저항단(Armed Resistance Unit)’이라고 밝혔다. 그레나다와 레바논에 대한 무력 개입을 반대하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최종적으로 7명이 검거되면서 막을 내렸다.

한편, 수십 년 동안 정치적인 이유와는 상관없이 일반 개인들도 국회의사당을 상대로 폭력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 중에는 한 기자와 전직 의원 사이의 갈등 때문에 발생한 1890년의 총격 사건과 1998년 벌어진 의회경찰 두 명을 향한 총격 사건이 들어있다. 1998년 사건은 미국이 식인풍습과 가상의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고 주장하는 한 남성이 저지른 사건이었다.

마지막으로 2021년 1월 6일 국회의원들이 의사당에 모여 대통령 선거 결과를 공식적으로 추인하는 자리에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하는 수백 명의 폭도들이 경찰 바리케이드를 부수고 의회에 난입해, 바이든 당선인의 당선을 무위로 만들려고 시도했던 폭력사태를 들 수 있다. 폭도들 중 일부는 의사당에 진입하기 위해 창문을 깨부수기도 했다.

이 사태로 의사당 내의 난투극 과정에서 의회경찰이 쏜 총에 여성 한 명이 치명상을 입었으며, 의회경찰 한 명도 폭도들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입은 상해 결과 하루 뒤 사망했다. 그밖에 폭동 과정에서 응급 처치를 받은 세 명이 더 숨졌다.

dtpchoi@wikileaks-k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