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허명을 보호하라" 5대4 합헌 숨은 쟁점
[WIKI 프리즘] "허명을 보호하라" 5대4 합헌 숨은 쟁점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1.02.26 09:32
  • 수정 2021.02.2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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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헌법재판소, 형법 제307조 1항 "합헌" 결정
해당 조항 "공연히, 사실적시, 명예훼손, 징역 2년"
다수의견, '어차피 공공이익 처벌 못한다' 논리 펴
소수의견, '허위 명예를 왜 국가가 보호하나' 반론
언론법 권위자 신평 '허명 이론' 18년만 헌재 진출
표현의자유 '보장 법리'를 '제한 법리' 전복 지적도

25일 헌법재판소는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진실한 사실' 표현도 형사처벌하는 형법 제307조 1항을 재판관 5대4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해당 조항은 "공연히 사실을 적시하여 사람의 명예를 훼손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정한다. 다수의견 합헌이유 핵심은 형법 제310조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때에 처벌하지 아니한다"를 적용하면 표현의 자유 제한은 최소한에 그친다는 것이다. 형식은 위법이나 '실질은 위법이 아니다'라는 위법성 조각(却事·깨뜨림) 법리 중에서도 '공익이 위법을 물리친다'는 공익성 항변(抗辯·대항하는 변론) 법리다. 소수의견은 '공익성 입증 책임'을 여전히 '말하는 사람'이 부담하는 건 부당하다며 위축효과(chilling effect) 법리로 맞받았다. 미국 연방대법원이 표현의 자유 대원칙으로 채택한 이 법리는 '합법임에도 스스로를 검열한다'는 인간심리에 기댄다. 소수의견은 "수사·재판 절차에서 마주하게 될 공익성 입증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효과는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익성 항변으론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다.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5대 4의견으로 형법 제307조 1항 진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합헌으로 결정한 25일, 헌재 대법정으로 들어서는 이미선(왼쪽) 헌법재판관과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평소 진보 성향으로 분류됐던 이 재판관은 이날 진보 쪽 재판관들과 달리 제307조 1항을 존치해야 한다고 달리 판단했다. 반면 진보 재판관 주축인 유 소장은 해당 조항 '진실인 사실' 부분 중 '사생활인 비밀에 해당하는 사실'을 위헌으로 선고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에 섰다. [사진=연합뉴스]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5대 4의견으로 형법 제307조 1항 진실적시 명예훼손죄를 합헌으로 결정한 25일, 헌재 대법정으로 들어서는 이미선(왼쪽) 헌법재판관과 유남석 헌법재판소장. 평소 진보 성향으로 분류됐던 이 재판관은 이날 진보 쪽 재판관들과 달리 형법 제307조 1항을 존치해야 한다고 달리 판단했다. 반면 진보 재판관 주축인 유 소장은 해당 조항 '진실인 사실' 부분 중 '사생활인 비밀에 해당하는 사실'을 위헌으로 선고해야 한다는 소수의견에 섰다. [사진=연합뉴스]

◇ '공익성 항변' 위헌 근거에서 합헌 근거로
형법 제307조 1항이 헌재 심판대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1999년 헌재는 같은 법 제309조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신문기자가 고소됐지만 검사가 '혐의없음' 불기소처분한 게 고소인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헌법소원을 재판관 9명 전원일치 의견으로 기각한 바 있다. 이때 청구인은 검사가 제307조 1항과 '허위인 사실' 표현을 규제하는 제307조 2항을 적용하지 않은 게 문제라고 주장했다. 때문에 헌재는 진실한 사실과 허위인 사실의 법적 평가를 광범위하게 비교했다. 이번 헌재 결정은 22년 전 헌재 결정 토대 위에 서 있다. 당시 헌재는 공익성 항변 기준으로 "공공의 이익은 쉽게 수긍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대전제를 제시했다. 재판관들은 '허위인 사실도 공익성 항변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도출했고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한 역사적 결정에 이름을 남겼다. 대법원도 2002년 "공공적·사회적인 의미를 가진 사안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그 평가를 달리하여야 하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제한이 완화되어야 한다"며 해당 헌재 결정을 그대로 받았다. 법률의 위헌 여부가 아닌 법률 해석에 있어선 헌재와 날 선 관계를 유지하는 대법원으로선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문제는 표현의 자유 제한 쪽인 이번 헌재 다수의견이 공익성 항변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애초 해당 법리는 과거 헌재가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로 만든 것이라 일종의 전복이 일어난 모양새다. 

1999년 헌재는 공익성 항변 세부기준을 정하면서 말하는 사람에게 입증책임을 지우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당시 헌재는 "명예훼손적 표현이 진실한 사실이라는 입증이 없어도 행위자가 진실한 것으로 오인하고 행위를 한 경우, 그 오인에 정당한 이유가 있는 때에는 명예훼손죄는 성립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고 설시했다. 진실이 비록 아닐지라도 말하는 사람이 진실이라 믿을 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었다면 공익성이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국내 표현의 자유 논쟁 폭을 '진실인데 처벌해야 하나'가 아닌 '진실이 아닌데도 처벌하지 말아야 하나'로 옮긴 역사적인 결정이다.  

이번 헌재 다수의견은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공익성 항변이 가능하기 때문에 처벌조항은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다수의견은 형법 제307조 1항 합헌 근거로 "헌법재판소와 대법원은 이러한 형법 제310조의 적용범위를 넓게 해석함으로써 심판대상조항으로 인한 표현의 자유 제한을 최소화함과 동시에 사실 적시 명예훼손죄가 공적인물과 국가기관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남용되지 않도록 하고 있는 점"을 꼽았다. 법률해석으로 제307조 1항이 사실상 사문화됐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다수의견은 형벌조항이 사문화됐다면 아예 없애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지 굳이 말하지 않는다. 소수의견은 다수의견과 달리 말하는 사람에 감정이입을 시도했다. 위축효과 자체가 '말하지 못하는 감정'에 터잡고 있기 때문이다. 재판에 넘겨지더라도 판사는 쉬이 공익성을 인정해준다는 다수의견 논리는 현실이 아닌 편의라는 취지다. 소수의견은 "향후 재판 절차에서 형법 제310조의 위법성조각사유에 해당된다는 판단을 받을 가능성이 있더라도 일단 심판대상조항의 구성요건에 해당되는 것이 확실한 이상, 자신의 표현행위로 수사·재판에 회부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축효과는 발생할 수 있으며, 이후 수사·재판절차에서 마주하게 될 공익성 입증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축효과는 더 커지게 될 것"이라고 했다. 굳이 필요하지 않은 형사절차를 남겨두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이다. 

신평 변호사.
신평 변호사.

◇ '허명' 학자들만 쓰는 말→재판관들도 쓰는 말
이번 헌재 소수의견은 표현의 자유를 두텁게 보장해야 한다는 학계 의견에 귀를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307조 1항이 보호하는 법률이익은 '명예'다. 다수의견은 이때 명예를 "사람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평가"로 보고 "일단 훼손되면 완전히 회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다수의견이 말하는 명예는 진실성과 상관없다. 거짓을 숨겨 쌓은 평판이라도 명예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소수의견은 명예에서 허명(虛名)을 골라냈다. 소수의견은 "진실한 사실의 적시로 손상되는 것은 잘못되거나 과장된 사실에 기초한 허명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구분 짓기에 다수의견은 "개인의 약점과 허물을 공연히 적시하는 것"으로 평가절하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허명'을 찾으면 "실속 없는 헛된 명성"이라 나온다. 어떤 국내 법원 판결문이나 헌재 결정문에서도 없던 단어다. 언론법 권위자에다 한국헌법학회 회장 출신으로 대법원 후보에 올랐던 판사 출신 신평(65·위 사진) 변호사가 2003년 '명예훼손법'(청림출판) 출간 때 처음 쓴 말이다. 인터넷 공간의 자유 확대 운동을 벌이는 사단법인 오픈넷 소속 박경신(50·아래 사진) 고려대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2013년 표현의 자유 국내 법리를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저서 '표현·통신의 자유'(논형)에서 신 변호사가 쓴 '허명'을 가리켜 "필자는 이를 '위선'이라고 생각하며, 위선을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는 허영일 뿐이다"라고 적었다. 위선은 "겉으로만 착한 체함"을 허영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를 각각 뜻한다. 국내 표현의 자유 권위자들은 허명, 위선, 허영을 법으로 보호할 이유가 없다고 오랜 기간 목소리를 높여왔는데 소수의견이 18년 만에 반응한 것이다. 신 변호사는 기자와 전화통화에서 "비록 소수의견이지만 '허명' 법리가 헌재 결정문에 적힌 건 의미가 있다"는 소회를 전했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진=연합뉴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진=연합뉴스]

◇ 또 하나의 전복, 위축효과
다수의견이 표현의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들에게서 빼앗아 온 건 공익성 항변만이 아니다. 다수의견은 영미식 표현의 자유를 국내로 이식하는 과정에서 절대선으로 여겨진 위축효과 이론을 자신만의 무기로 가다듬었다. 다수의견은 '진실인 사실'에서 분리된 '사생활 비밀에 해당하는 사실'에만 위헌을 선고하는 결정 방식인 일부위헌을 검토했다면서도 "그러한 경우에도 '사생활의 비밀에 해당하는 사실'과 '그렇지 않은 사실' 사이의 불명확성으로 인한 위축효과가 발생할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하는 점"을 들어 형법 제307조 1항 위헌성을 부정했다.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 비밀을 공개하려 마음먹었지만 공사(公私)를 구분할 줄 몰라 폭로하지 못한다는 가정이다. 다수의견 재판관들이 진행한 가상의 실험엔 오류가 있다고 박 교수는 지적한다. 위축효과 이론은 기본적으로 '합법인 표현'을 전제로 '충분히 말할 수 있는데 말하지 못함'에 주목한 법리다. 누군가 사생활의 비밀을 폭로했다면 다수의견이 표현의 자유 대척점에 둔 '사생활 비닉권'(사생활의 비밀을 숨길 권리)을 침해한 것이 된다. 처음부터 합법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다수의견 재판관들이 건축한 '가상의 세계'는 애초 위축효과를 적용할 수 없는 영역에서 위축효과를 검토한 '모순의 세계'인 셈이다. 25일(한국시간) 해외 체류 중인 박 교수는 기자와 카카오톡 채팅을 통해 "사생활의 비밀로 축소해도 위축효과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다수의견은 문제가 있다. 현재는 '사생활의 비밀'이라는 제한마저도 없기 때문에 전혀 사생활의 비밀로 보호될 수 없는 사실을 적시해도 명예훼손으로 처벌될 수 있는 상황"으로 진단하며 "그러므로 '사생활의 비밀'이라는 제한이 (형법 제307조 1항 구성요건에) 더해지면 위축효과의 범위는 더욱 줄어든다고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위축효과 전복은 대법원에서 먼저 일어났다. 지난해 7월 16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대법관 7대5 의견으로 이재명 경기도지사에게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공표 혐의를 유죄로 인정한 원심을 파기했다. 당시 다수의견은 공직후보자 토론회에선 '숨 쉴 공간'이 없다면 "공적·정치적 관심사에 대한 치열한 공방과 후보자 검증 등을 심각하게 위축시킴으로써 공개되고 공정한 토론의 장에서 후보자 사이의 상호 공방을 통하여 후보자의 자질 등을 검증하고자 하는 토론회의 의미가 몰각될 위험이 있다"고 했다. 결국 이 지사는 "형님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고 하셨죠" 상대 후보 물음에 "그런 일 없습니다"라는 허위사실을 말했다는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으나 파기환송심에서 최종 무죄를 선고받았다. 당시 전합 판결은 약자가 가지는 '진실을 말해도 국가가 처벌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후보자 등은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후적으로 법적 책임을 부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승격해 법리를 의도적으로 오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표현의 자유는 본질적으로 강자가 아닌 약자의 권리인 까닭이다. 

지난 9일 징벌적 손해배상 적용 대상에 언론과 포털을 포함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더불어민주당 미디어언론상생태스크포스(TF) 단장 노웅래 의원.
지난 9일 국회 본관 214호 앞에서 징벌적 손해배상 적용 대상에 언론과 포털사이트를 포함하겠다는 계획을 밝히는 더불어민주당 미디어언론상생태스크포스(TF) 단장 노웅래(가운데) 의원.

◇ 여권 추진 '징벌적 손해배상' 영향 
이번 헌재 결정은 언론과 각을 세우는 여권이 추진 중인 '징벌적 손해배상제' 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이 3월 임시국회를 시한으로 입법을 시도 중인 이른바 '언론개혁법'은 실제 손해액 몇 배를 부과하는 대상에 언론·포털사이트·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1인미디어를 포함하는 것이 골자다. 그런데 다수의견은 형법 제307조 1항 존치 필요성 근거로 "징벌적 손해배상이 인정되는 입법례와 달리 우리나라의 민사적 구제 방법만으로는 형벌과 같은 예방이나 위하효과를 확보하기 어려워, 입법목적을 동일하게 달성하면서도 덜 침익적인 수단이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을 지목했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하면 그때 법을 없애도 좋다는 말로 언론을 입막음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던 여권엔 더없이 좋은 명분이다. 신 변호사는 이 대목을 꼬집어 "기본권을 우선하는 헌법재판관으로선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말을 한 것"이라고 날을 세웠다. 신 변호사는 지난 17일 <신동아>에 연재한 '신평의 풀피리'에서 "자기들에게 가해지는 정치적 비판을 어렵게 만들려고 누가 봐도 언론 자유를 제한하고 침해하는 쪽으로 법을 개정하려 하면서 갑자기 '언론개혁'을 부르짖고 있다"며 징벌적 손해배상 범위에 언론을 넣은 여당 안을 비판한 바 있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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