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소송이 세달 만에 뒤집혔다.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재판 관할권으로부터 면제된다는 ‘주권 면제’ 이론을 적용한 결과다. 법원에 이번 결정은 앞선 위안부 승소 판결과 정반대의 결과로 향후 파란이 예고되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는 21일 고 곽예남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가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이 적법하지 못해 본안 판단을 하지 않고 끝낸단 의미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소송에서 사실상 패소한 것이다.
이 사건의 쟁점은 '주권 면제(국가면제)'적용 여부였다. 국가면제란 주권국가간 평등의 원칙에 입각해 한 국가는 다른 나라의 국내법에 적용받지 않는다는 국제법 원칙을 말한다.
허나 우리나라는 외국을 상대로 우리 법원의 민사소송권 행사 범위를 법률로 정한 바가 없다. 또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 국가면제와 관련한 조약 등을 체결한 적도 없다.
위안부 할머니 측은 이 사건에서 세 가지를 이유로 국가면제가 인정돼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위안부와 관련한 일본의 행위는 '주권적 행위로 볼 수 없는 강행규범(국제 공동체 유지를 위해 꼭 지켜야 하는 규범) 위반'으로 국가면제 대상으로 인정될 수 없으며, 만약 국가면제가 인정돼 사건이 각하되면 할머니들의 취후 권리구제수단인 재판청구권이 사라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된다고 봤다. 또 일본은 외국에 대한 민사재판권을 법률로 만들어 국가면제 예외를 인정하고 있는 점에 비춰 상호주의 원칙에 위반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민사 15부는 2015년 이뤄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외교적인 요건을 구비돼 권리구제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봤다.
민사 15부는 "국가 면제로 인해 침해되는 사익과 국제법을 준수하는 공익을 비교할 때 후자가 더 크다"며 "2015년 위안부 합의를 통해 피해자 240명 중 99명에 대한 현금 지원이 이뤄진 점을 고려할 때 대체적 권리 구제 수단이 마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할머니 측 주장에 대해서도 국제 관습법과 관련한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 사례와 우리 대법원 판례를 들며 각하 논리를 설명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끌려간 피해자들의 손해배상권을 두고 다퉜는데, 2012년 ICJ는 독일에 대한 국가면제를 인정한 바 있다. 당시 ICJ는 재판관 15명 중 12대 3의 다수의견으로 이탈리아의 주장을 배척했다.
일본 정부를 상대로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 대해 '국가면제'를 적용해 소송 자체를 부적법하다고 본 것이다. 이는 앞서 중앙지법 34부(재판장 김정곤)가 다른 피해자들에게 제공한 승소 확정 판결과 대비된다. 때문에 현재로서는 같은 사건에 대해 승소와 패소 두 판결이 존재하게 됐다.
지난 1월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피해자와 유족 12명이 낸 소송을 맡았던 중앙지법 34부는 "반인도적 사건에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며 일본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해 원고 1명당 1억원씩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미 승소가 확정된 앞선 판결은 강제집행 단계로 들어섰다. 그러나 중앙지법 민사 34부는 정기인사로 재판부가 바뀐 후인 지난달 29일 '국고에 의한 소송구조 추심 결정'을 내렸다.
판결이 이미 확정돼 승소 결론 자체를 바꿀 수는 없지만 소송비용 집행을 판단하면서 ‘국가면제’ 부분에서 앞 재판부와 정반대의 결론을 낸 것이다. 하지만 피해자측은 이 결정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이다.
[위키리크스한국=장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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