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71돌] 한국 전쟁 참여 꺼리던 미국이 참전한 가장 큰 이유... '공산권 맹주' 노린 중국 견제
[6.25전쟁 71돌] 한국 전쟁 참여 꺼리던 미국이 참전한 가장 큰 이유... '공산권 맹주' 노린 중국 견제
  • 최석진 기자
  • 기사승인 2021-06-25 06:21:16
  • 최종수정 2021.06.25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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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에 나선 UN연합군. [AP=연합뉴스]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에 나선 UN연합군. [AP=연합뉴스]

또 한 번의 6.25가 찾아왔다. 올해로 71번째다. 위키리크스한국은 6.25를 맞아 미국 작가 제시카 피어스 로톤디가 ‘히스토리 채널’이 운영하는 웹사이트(history.com)에 올린 칼럼을 소개한다. 다음은 이 칼럼의 전문이다.

한국전쟁(1950-1953)은 냉전 이후 벌어진 첫 번째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인민해방군 7만5000명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반도에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오늘날의 북한)과 미국의 지지를 받는 대한민국을 구분하기 위해 1945년 38선이 그어져있었다. 북한군은 이 선을 넘어 공격을 감행했다. 

한국 전쟁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갈등을 겪던 강대국들의 대리전으로 비화한 내란의 성격이 강했다. 이 전쟁으로 200~400만 명이 죽었는데, 그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다. 이 전쟁 이후 지금까지 어떤 평화협정도 맺어지지 않고 있다.

종군기자들의 눈에 비친 6.25전쟁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종군기자들의 눈에 비친 6.25전쟁의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국전쟁은 왜 일어났는가?

“한국전쟁은 내전(內戰)이었다.”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 역사학과의 한국국제교류재단(Korea Foundation) 부교수 찰스 김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 당하기 전까지는 수세기 동안 통일 왕국을 유지하고 있었다. 일본은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국을 철권통치 방식으로 지배했다. 일본은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거나 한국이라는 식민지를 허약하게 만들기 위해 한국 역사를 일본의 문화에 동화시키는 일체화 전술을 구사했다.

2차 세계대전 동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의 위력으로 일본이 연합군에 무릎을 꿇자 한반도의 지배권은 일본으로부터 미국과 소련으로 넘어갔다. 두 강대국들은 한반도에 38선을 대충 그어놓고 한국을 자기들 편의대로 양분하기로 결정했다.

“38선은 한국의 정치적, 문화적, 지형적 경계에 부응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소련은 북한에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고, 미국은 남한에 군사정부가 들어서도록 만들었다.

“당시 한국 정치는 극좌 성향의 공산주의부터 우익 민족주의까지 이념의 전 분야를 망라하면서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소련 점령군들 사이에서도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한국의 리더십도 양극화로 분열되어 상황은 일촉즉발로 치닫고 있었다. 각 세력들은 서로 상대방이 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면서 한국을 통일하기 위해 서로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

1948년부터 1950년까지 산발적으로 발생했던 국지전들로 인해 긴장은 높아만 갔다. 1948년에는 미국이 한국인들 스스로 미래 정부를 결정짓는 선거를 지원하자는 취지로 UN을 소집했다. 이 제안에 북한이 반발하자 남한은 반공산주의자 이승만의 지휘 아래 서울에서 자신들만의 정부를 구성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공산 게릴라 출신의 김일성은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DPRK)의 수상 자리에 올랐다.

김일성은 1949년과 1950년 두 차례 소련을 방문해서 남한 침공에 대한 소련의 지지를 요청했다.

“김일성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설득해 남한 침공에 대한 전폭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는 나아가 중국으로부터도 구두(口頭)로 지원을 약속받았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면서 “북한은 미국이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북한군은 강했다. 그들은 중국 내전의 백전노장들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중국은 1949년 8월, 내전을 끝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였다. 북한군이 남쪽으로 신속히 밀고 내려가자 세계는 이 전쟁의 추이에 주목했다.

지난 2018년 12월,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인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6·25전쟁 전사자 유해 5구가 추가로 발견된 가운데, 화살머리고지에서 유해발굴감식단 감식관들이 현장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제공 : 국방부]
지난 2018년 12월, 남북 공동유해발굴을 위한 지뢰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인 강원도 철원 비무장지대(DMZ) 내 화살머리고지에서 6·25전쟁 전사자 유해 5구가 추가로 발견된 가운데, 화살머리고지에서 유해발굴감식단 감식관들이 현장감식을 진행하고 있다. [제공 : 국방부]

미국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나?

“미국은 처음에는 어떤 형태의 침공에도 개입하기를 꺼려했다. 그들은 중국이나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과도 엮이기를 원치 않았다.”

김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하지만 국제무대에서 발생한 주요 사건들로 말미암아 미국은 태도를 바꾸게 된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최초로 원자폭탄 실험을 실시했다. 미국의 원자폭탄 프로그램을 도왔던 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가 일본에 투하되었던 두 번째 원자폭탄인 ‘팻맨(Fat Man)’의 청사진을 소련으로 빼돌렸던 것이다. 이 사실이 드러나자 냉전 상황은 편집증적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1949년 10월 1일, 공산혁명가 마오쩌둥이 미국의 지원을 받던 중국의 민족주의자 장제스를 물리친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자 “트루먼의 민주당 행정부를 비판하던 미국 공화당은 ‘중국의 상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한편, 수천 명의 중국 군대가 북한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됐다.

“마오쩌둥은 북한이라는 동맹국을 지원하는 데 추호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는 미국의 제국주의 압제에서 남한을 구출함으로써 공산권의 맹주가 되기를 바랐다.”

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트루먼 대통령 참전을 결정하다

1950년 4월 14일, 트루먼 대통령은 ‘국가안보위원회 보고서 문서번호 68(NSC-68)’이라는 문건 하나를 받았다. 국방부, 국무부, CIA, 그리고 관련 기관들이 작성한 이 문건은 대통령이 국제 공산주의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방위산업을 증강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었다. 이들의 추천으로 트루먼의 다음 행동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1950년 6월 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북한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미군의 참전을 명령했다.

“미국 민주당은 공산주의에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김 교수는 이렇게 평가한다.

“트루먼은 미국이 공산주의를 격퇴하고 동맹을 돕겠다는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한국을 활용했다.”

미국은 북한과의 전쟁을 선포하지 않았다. 대신에 트루먼은 미군 지상군 증파를 “경찰 행위”로 표현했다. 

1950년 9월 8일에 감행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었고, 남한군이 38선을 넘어 북한으로 밀고 올라가도록 해주었다.

1950년 12월 16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공산 제국주의’가 민주주의의 위협이라고 선언했다.

한국전쟁의 여파

1953년 7월 27일 조약된 한국전쟁의 휴전협정은 남한과 북한 사이에 새로운 경계를 그었다. 휴전선으로 인해 남한은 이전의 38선보다 영토가 조금 넓어졌으며, 두 개의 한국 사이에는 비무장지대가 만들어졌다. 그 이후 지금까지 공식적인 평화협정이 맺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전쟁으로 25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그리고 ‘리틀 스위치 작전(Operation Little Switch)’과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 이렇게 두 번의 포로교환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7800명의 미군들이 여전히 행방불명이며, 한국은 지금도 124,000명 참전 군인들의 유해를 발굴 중이다.

“결말을 짓지 못한 전쟁은 아시아 문제에 지속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국 오벌린 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이자 『형제간의 전쟁 : 한반도의 끝나지 않은 전쟁』의 저자이기도 한 셰일라 미요시 야거는 이렇게 분석한다.

그녀는 한국전쟁이 린든 B. 존슨 대통령의 베트남 정책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냉전으로 갈라지고, 중국과 소련의 후원을 받던 이웃 공산주의 정권으로부터 위협을 받았지만 성공적으로 주권을 지켜낸 모범적인 국가가 한국이었다. 한국은 현재 아시아에서 중국 공산당의 패권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전쟁 사례로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전쟁 사이에 끼인 한국전쟁은 ‘잊혀진 전쟁(The Forgotten War)’이라는 별칭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야거 교수에게 한국전쟁은 미완의 전쟁이다.

“한국전쟁은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미국과 북한과의 갈등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

dtpchoi@wikileaks-kr.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