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아파트 승강기에 붙은 안내문 한 장, 판결 갈랐다
[WIKI 프리즘] 아파트 승강기에 붙은 안내문 한 장, 판결 갈랐다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1.08.10 18:22
  • 수정 2021.08.10 1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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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구정 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 휴게시간이 근로시간으로 인정된 사연

지난 2017년 12월, 현대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경비 노동자 94명을 정리해고했다. 140여 명을 직접고용했던 대표회의가 관리비 경감을 이유로 용역업체와 새로 경비계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대표회의는 최저임금이 시간급 기준 2017년 6470원에서 2018년 7530원으로 16.4%인 1060원 오른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동 입구마다 경비 초소가 있는 '옛날 아파트' 건축물 특성상 경비 노동자를 줄일 수 없는 만큼 최저임금을 지키려면 '직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자리를 하루아침에 잃은 경비 노동자들이 선택한 방법은 법정 싸움이었다. 이들은 입주민들이 퇴근하면서 차량 열쇠를 경비노동자에게 맡기는 이른바 '발렛 파킹'을 시킨 점을 문제 삼았다. 

현대아파트는 지하주차장이 없는 데다 동과 동 사이 지상주차장 공간도 모자라 이중주차가 늘 있는 곳이었다. 이중주차도 하지 못한 차량은 단지 밖에 불법주차를 해야만 했다. 때문에 저녁 늦게 퇴근한 이곳 입주민들은 차량을 우선 단지 밖에 주차해놓고 단지 내 지상주차장에 빈 주차 공간이 생기면 차량을 옮겨달라고 경비 노동자에게 요청하는 게 다반사였다. 문제는 지상주차장에 공간이 나는 시간이 일정치 않아 경비 노동자가 휴게시간에도 주차 대행을 해야 했다는 점이다. 이같은 사실을 근거로 퇴직 경비 노동자 46명은 2018년 3월 10일 대표회의를 상대로 법원에 휴게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하고 그 시간 받지 못한 임금을 지급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공동주택관리법상 경비 노동자는 경비 업무만 해야 하고, 근로기준법상 휴식시간을 보장받아야 하는데, 근로시간이 아닌 휴게시간에 경비 업무가 아닌 일을 했으니 사실상 사용자인 대표회의의 지휘와 감독이 있었다는 논리였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출처=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출처=연합뉴스]

◇ "쉬지 말라" 한 적 없는데...?
소송은 쉽지 않았다. 법원 1심은 휴게시간을 근로시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8부(재판장 최형표 부장판사)는 "피고 대표회의가 휴게시간에 원고(경비 노동자)들에게 구속력 있는 지휘·명령을 했다고 볼만한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며 "피고 대표회의가 휴게시간에 구체적인 업무지시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린 바 없으며 원고들이 야간 휴게시간에 수면을 취한다고 해서 이를 지적하거나 징계대상으로 삼은 바 없다"고 했다. 입주민들이 '쉬지 말라'고 한 적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경비 노동자들은 이들의 상급자인 경비팀장이 교육 때 "24시간 동안 무전기 및 인터폰에 응할 것"이라고 지시했다는 점을 내세웠으나 재판부는 뒷받침 증거가 없다며 인정하지 않았다. 다만 최저임금 미달액 일부 등을 인정해 대표자회의가 2000만여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서울고법 민사합의1부(재판장 전지원 부장판사)는 '쉬지 말라'는 쟁점이 아니라고 달리 판단했다. 경비일지에는 휴게시간과 근무시간의 구분이 없었다. 휴게시간인 식사시간대에 계단, 복도, 옥상을 순찰한 업무기록이 있었다. 재판부는 "근무시간대와 휴게시간대의 구분 자체가 어려운 상황에서 대표회의와 입주민들은 경비원이 경비초소 내에 자리하고 있는 24시간 전부를 근무시간인 것처럼 간주했다"며 "그 시간 내 지시사항이 준수될 것을 기대해 지휘·감독을 하거나 업무처리를 요구했을 것"이라고 판결문에 적었다. "쉬지 말라" 이 말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았어도 '일을 하라'고 기대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2심은 휴게시간을 근로시간으로 본 뒤 계약 근로시간을 넘어서는 점심·저녁 휴게시간을 연장근로시간으로, 야간 휴게시간을 야간근로시간으로 추가 인정하고 대표자회의에 7억 3700만여원을 지급하라고 주문했다. 대표자회의는 상고했다.

◇ 승강기에 붙은 한 장의 안내문
"휴게시간에는 근무자가 초소나 기타공간에서 자유로운 휴게시간을 보장하기로 하고, 임금은 지급하지 않기로 합의하였습니다"

2017년 9월 26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각 동 승강기 안 게시판에 붙은 안내문이다. 대법원2부는 1심이 아닌 2심 판단이 맞는다며 그 핵심 근거로 휴게시간을 명시한 대표자회의 직인이 붙은 안내문을 제시했다. 안내문은 경비 노동자의 휴게시간을 점심과 저녁 각각 1시간, 야간 4시간을 합친 6시간으로 정했다. 여기엔 "휴게시간이 이행될 수 있도록 주민여러분의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있었다. 그간 경비 노동자들의 휴게시간이 지켜지지 않았음을 입주민들은 우회적으로 인정한 대목이다. 안내문이 내달린 지 한 달 만인 그해 10월 26일 대표자회의와 경비 노동자들로 구성된 노동조합은 휴게시간을 보장하는 첫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 사건 상고심 주심 이동원 대법관은 2017년 9월이 지나서야 휴게시간이 보장된 것이라고 봤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사건은 현재진행형이다. 해고된 경비 노동자 중 한 명인 경비반장은 부당해고를 주장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해고는 적법" 중앙노동위원회는 "해고는 위법"이라고 각기 다른 결론을 내놨다. 대표자회의는 중노위를 상대로 법원에 재심판정 취소소송을 구하는 행정소송을 냈고 1심은 "해고에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없었다" 2심은 "해고에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었다"고 또다시 엇갈린 판결을 했다. 사건은 다시 대법원의 판단만 남았다. 

4년간 서울의 부촌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일은 아파트 건축 형태의 변경, 경비 노동자의 업무 구획의 어려움, 최저임금의 갑작스러운 상승, 만연한 파견 근무 형태가 만들어낸 총체적 사건이다. 대법원은 과연 여러개의 사회적 원인을 이어붙인 하나의 사회적 결론을 낼 수 있을까.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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