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비밀문서] 한끼에 옥수수 6숟가락, 고기는 '들쥐'... 북한 수용소의 처참한 상황 기록
[WIKI 비밀문서] 한끼에 옥수수 6숟가락, 고기는 '들쥐'... 북한 수용소의 처참한 상황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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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11.26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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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 당하는 북한 수용소 재소자. [연합뉴스]
탈출을 시도했다가 처형 당하는 북한 수용소 재소자. [연합뉴스]

"음식은 한끼에 옥수수 6숟가락에 불과했고, 들쥐를 잡아먹는 것 외에는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

2007년 7월, 주한미국대사관은 북한의 강제수용소를 탈출한 한 젊은이에 주목한다. 탈북자들 가운데 수용소에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고 증언하던 신동혁씨였다.
 
대사관은 그를 면담한 후 국무부에 면담내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이후 신씨는 존 케리 미 국무장관과의 면담, 유엔 인권조사위원회 증언, 책 출간 등 북한의 인권문제를 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추후 북한이 신씨를 대대적으로 비난하고, 신씨가 스스로 '내가 태어난 곳은 14호 수용소가 아닌 18호 수용소였다'고 밝히는 등 증언을 번복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 인권전문가들은 신씨의 증언과 활동이 북한의 인권문제가 국제사회의 관심사로 부각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다.
국제 인권 행사에서 증언하는 신동혁씨. [연합뉴스]
국제 인권 행사에서 증언하는 신동혁씨. [연합뉴스]

다음은 주한미국대사관이 2007년 7월 9일 신씨와 면담해 본국에 전송한 내용이다.

<북한 수용소 체제>

한 탈북자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난 수용자 2세대로써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동생의 공개처형, 기아, 뜨거운 석탄으로 자행하는 고문, 정치와 역사, 교육시스템 대해 묘사했다. 

신동혁은 1982년 11월 19일 북한의 평안남도 개천에 위치한 14호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났다고 말했다. 14호수용소는 6, 7개의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 정치범수용소 중의 하나다. 그 곳에서는 수감자들과 3대에 걸친 그들의 가족들이 수감되어 있고, 그들은 일생을 노예처럼 일하도록 강요받는다. 이런 수용소의 몇몇의 작은 구역들, 특히 15호수용소(요덕)와 18호수용소(북창)는 지정된 기간동안 감금되어 사상개조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분석가들은 20만명 정도의 정치범이 최근 북한의 수용소 시스템에 갇혔을 것이라고 예측한다.

지금까지 거의 모든 북한 수용소체제에 대한 탈북자 증언들은 요덕의 사상개조구역에 수감되었던 전 수감자들로부터 들은 것이다. 반면에 완전통제구역에 대한 기록은 전해듣거나 또는 안명철(전 11호, 13호, 26호, 22호수용소의 경비원)과 김영(전 14호, 18호수용소 수감자)의 증언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신동혁은 수용소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목격자이다.
 
<수용소에서 태어나다>

신동혁의 어린시절의 기억은 비슷하게 생긴 집들이 모여있는 어느 한 마을에서 그의 어머니와 방 두개짜리의 시멘트 집에서 살았던 모습이다. 방 하나는 요리를 위해 사용했고 다른 하나는 잠을 자는 용도였다. 신동혁은 거주자들은 자유롭게 그들의 마을 안에서는 돌아다닐 수 있지만, 다른 마을이나 수용소의 다른지역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경비원들의 특별허가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신동혁은 그가 살던 거리에 얼마나 많은 집들이 있었는지, 그가 살던 마을에 얼마의 사람이 살았었는지, 수용소에 몇개의 집들이 있었는지 설명하지는 못했다.)
 
무장경비들은 특히 밤에 수용소를 순찰했다. 그들은 김정일과 김일성 뱃지를 차고 있었지만 신동혁은 김정일과 김일성이 누구인지 몰랐다. 신동혁의 아버지는 그의 동료들과 함께 분리된 다른 지역에 살았다.

신동혁은 왜 그의 가족이 수용소에 있었는지 그의 부모님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에게 한국전쟁 중에 남한으로 간 삼촌이 한명 있었다고 추측한다. 그는 어머니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고, 그의 어머니는 설명해주지 않았다. 사실, 그가 훨씬 나이가 들 때까지 누군가 수용소 밖에서 다르게 살 것이라고 믿을 이유가 없었다.
 
<초등교육.. 6살에 인민학교에 입학>

신동혁은 6살 때 초등학교(인민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학교는 5개 학년이 있었고 그의 학급에는 약 35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다. 학교의 커리큘럼은 읽기, 쓰기, 기초산수와 절도에 대한 금기사항이나 허가되지 않은 이동과 3명 이상의 모임금지 같은 수용소 규칙 암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정치, 역사 또는 최근 사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신
 
동혁은 남한, 중국, 미국 심지어 북한에 대해 배운 적이 없었다. 수업은 전적으로 수용소의 일상생활에 대해 중점을 두었다. 예를들면, 아이들은 그들의 어머니들이 배추를 집으로 가져왔다는 것 등의 정보를 서술해야만 했다.

아이들은 8시부터 12시까지 공부했고, 1시간의 점심시간을 가진 후 15시까지 수업을 했다. 그 다음 아이들은 전형적인 도로공사, 도로정비, 석탄수집 또는 논이나 밭에 물을 길러다 주는 등의 일을 하러 갔다.
 
<11세 때 기숙사로 이동, 배급을 위한 노동>

11세에는 수용소 관계자들이 신동혁을 그의 어머니의 집으로부터 신동혁의 급우들과 함께 지내는 기숙사로 이동시켰다. 그의 정규교육은 끝났고 그의 학급은 정규 노동집단이 되었다.

경비원들은 옷가지, 음식, 필수품등을 주민들에게 배급했다. 그들은 2년에 한번씩 겨울과 여름에 모든 주민들에게 새옷을 배급했고, 1년에 두번 신발을 제공했다. 신동혁의 어머니는 하루에 가족앞으로 900g의 옥수수와 쌀가루죽(소금죽)과 석탄을 받았다. 신동혁은 들에서 쥐를 잡았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기나 흰쌀은 전혀 먹지 못했다.

배급은 직접적으로 일의 양에 대한 한사람의 능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노동 구성원에게 배급되는 음식은 한끼에 보통 대략 옥수수 6숟가락 만큼으로, 음식 배당은 작았다. 신동혁은 사람들이 기아로 죽는 경우는 그들이 해야 할 일의 양을 해내지 못해서 배급을 받지 못했을 때라고 말했다. 음식 없이는 사람들은 너무 약해서 다음날 일을 할 수 없고, 그러면 또 다시 배급을 못 받는다. 결국에 그들은 죽을 수 밖에 없다.

신동혁은 이러한 상황에서 놓쳐버린 일감과 기아의 덫에 걸린 누군가를 위해 연민을 보이거나 도움을 주는 선생님, 생존자, 경비원 또는 심지어 동료수감자들 어떠한 누군가도 상기하지 못했다. 주민들은 과도하게 그들 자신의 생존에 신경썼다. 게다가 기아에 의한 죽음은 자신의 일을 하지못한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럽고 적당한 운명이라고 여겨졌다.
 
<신속한 처벌, 의료관리의 부재, 흔한 사고재해>

일터에는 보통 한 팀에 한 명의 경비원이 있었다. 그러므로 한동안 신동혁이 일했던 가죽공장에는 2000명의 노동자들과 한 명의 경비원이 있었다. 경비원들은 여러가지 규칙위반의 이유로 수감자들을 처벌했다. 실례로 신동혁은 재봉틀을 떨어뜨려 고장냈다. 경비원은 즉각적인 벌을 집행했다. 경비원은 신동혁의 네번째 손가락 끝을 잘라냈다. 신동혁은 그런 가벼운 벌을 받은 것에 대해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주민들은 그들의 건강을 개의치 않고 일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일반적으로 의료시설을 찾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너무 아파 일을 할 수 없다면 음식배급을 받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죽게 된다. 비록 수용소에는 병원이 있지만 그 병원은 대개 산업재해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신동혁은 수용소 주민들은 종종 터널이 자주 무너지는 석탄광산이나, 거대한 나무 수레에 부딪히는 숲속에서 다친다고 말했다.
 
<고문과 감금>

그가 14세였던 어느 아침, 경비원들은 신동혁의 눈을 가린 채 그를 심문장으로 데려갔다. 경비원들은 신동혁의 어머니와 형제가 탈출을 시도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신동혁에게 그의 공모와 계획을 자백하라고 요구했다. 신동혁은 탈출시도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부인했다. 신동혁은 경비원들이 그의 발을 묶고 그를 하룻동안 거꾸로 매달아 놓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경비원들은 신동혁을 내려 쇠사슬로 그의 손과 발을 함께 묶었다. 그리고 뜨거운 석탄으로 그의 등을 지졌다. 경비원들은 그의 몸을 금속갈고리로 고정시켰다.

경비원들은 그를 창문 없는 방에 7개월 동안 감금했다. 그는 자신이 10년 동안 갇혀있다고 주장하는 동료와 함께 있었다. 신동혁의 음식배급은 옥수수 6~7숟가락에서 2~3숟가락으로 줄었다.
 
<어머니와 형제자매의 공개 처형>

1996년 11월 29일, 경비원들은 신동혁과 그와 마찬가지로 7개월동안 감금당해있던 그의 아버지를 수용소의 처형장으로 데려왔다. 그 공개처형장은 탈출을 시도한 자들이나 절도, 폭력을 저지를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일년에 두세번정도 사용되었다. 전형적으로 아이들을 포함한 마을주민들은 모여서 지켜보도록 강요되었다. 그가 처음 공개처형을 목격한 것은 그가 5살때였다고 기억한다. 그는 당시 공개처형장으로 호기심을 가득안고 뛰어갔었다고 말했다.
 
경비원들은 수용소 탈출을 시도로 인해 신동혁의 어머니와 동생의 공개처형이 임박했다고 발표했다. 신동혁은 모든 공개처형은 다양한 범죄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은 자들이 수용소 관리자들에 의한 권고에 의해 인도되었다고 말했다. 마을주민들이 모인 가운데 집행자는 신동혁의 어머니를 묶고 재갈을 물려 나무에 매달았다. 그들은 그녀의 발 아래서부터 걷어찼고 그녀는 사망했다. 그리고 군인 3명이 총을 쏴 재갈이 물려 묶여 있는 그의 동생을 죽였다. 그의 어머니에 대해 어떤 감정이었냐고 물었더니 신동혁은 "탈출 시도를 했던 어머니에게 화가 났었다"고 말했다.
 
경비원들은 신동혁이 다시 그의 일터에 참여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그의 동료들은 그를 피했고 그를 범죄자 취급했다. 그는 동료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 연장근무를 자청하고 더 열심히 일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동생의 잘못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고 더했다.
 
<수용소를 탈출하다>

2004년 수용소 밖에서 살았고 심지어 중국에도 다녀온 적이 있는 한 수감자 동료를 만났다. 이 동료와의 상의한 끝에 신동혁은 수용소 탈출의 기회를 찾기로 결심했다. 2005년 1월 2일 신동혁과 그의 동료는 캠프 둘레의 전기 철조망 근처 숲 속에서 나무를 모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서 경비가 아무도 보이지 않자 그들은 울타리를 넘기로 결심했다. 신동혁은 철사에 찔려 그의 다리가 타는 고통을 겪었다. 그의 동료는 울타리에 걸리고 말았다. 신씨는 "울타리에 걸려버린 동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고 했다.

탈출에 성공한 신동혁은 빈집에 들어가 음식을 훔쳤다. 그는 푸른색의 수감복을 버려진 건물에서 찾은 보통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가 중국 국경으로 북쪽을 헤매일 때, 그는 관리자들을 피해 군중들과 섞일 수 있었다. “당신의 이마에 수용소에서 자랐다는 표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동혁은 북한에서의 약 25일간의 여정 후 두만강을 건넜다.

신동혁은 중국에서 약 1년을 보냈다. 약 9개월간 연변의 중국인 집에서 농사를 짓거나 일을 했다. 그후 그는 상하이를 여행했다. 2006년 2월 중국에서 일하는 조선일보 신문기자가 그가 상하이 주재 대한민국 영사관에 들어갈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6개월후 그는 남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남한에서의 재정착>

신동혁의 남한 정착은 쉽지는 않았다. 그는 악몽에 시달려서 하나원 정착센터에 들어간지 한달 후 병원에 입원했다고 정치담당관에게 말했다. 시간이 흐른 뒤 그는 홀로 아파트에서 사는 것을 포기했고, 지역 NGO인 북한인권데이터베이스센터에서 지내고 있다. 북한인권데이터베이스센터 회장 윤영상 박사는 "신씨는 따로 떨어졌을 경우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 신동혁은 종종 그가 묘사하고 있는 사건과 연관되지 않고 동떨어져 있는듯 보였다.

트라우마 극복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신동혁은 아직도 그의 이야기가 알려지기 원한다. 그는 최근 한 NGO단체에서 7월 말에 출판될 책 작업의 보조일을 하고 있다. 또한 그는 운전면허를 취득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다.

신동혁의 증언은 증명하기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서울의 북한 인권 관련 많은 전문가들은 그의 이야기에 의해 확신하는 듯 하다. 그의 진술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완전 통제지역인 북한의 수용소 시스템에 대한 것 사이의 일관성에 의해 우리 또한 그렇다. /버시바우 대사
유엔 인권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는 신동혁씨. [연합뉴스]
유엔 인권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는 신동혁씨. [연합뉴스]

[UNCLAS SEOUL 002109]
E.O. 12958: N/A
TAGS: PGOV PHUM PINR PREF PREL KS KN
SUBJECT: RARE ACCOUNT OF DPRK "TOTALLY CONTROLLED" PRISON
CAMP

SUMMARY
-------
¶1. (SBU) A North Korean defector recounted his experience as
a second-generation prisoner in a DPRK political prison camp.
He described the public execution of his mother and brother;
starvation; torture with hot coals; and an education system
bereft of politics, history, or any reality outside of the
camp boundaries. If his account is true, this defector would
be the only person known to have been born in such a prison
and escaped to describe it. END SUMMARY.

OVERVIEW OF DPRK PRISON SYSTEM
------------------------------

¶2. (SBU) Shin Dong-hyuk said he was born on November 19,
1982, in Political Prison Camp No. 14, located in Kaechon,
South Pyeongan province, North Korea. Camp No. 14 is one of
six or seven sprawling political prison camps in the DPRK
where prisoners -- along with up to three generations of
their families -- are imprisoned and forced to work in
slave-like conditions, usually for life. Some small sections
of these camps, notably Camp No. 15 (Yodok) and Camp No. 18
(Bukchang), are designated as "revolutionizing" zones for
prisoners with fixed terms of incarceration. Analysts
estimate that up to 200,000 political prisoners are currently
interned in the DPRK prison system.

¶3. (SBU) Until now, nearly all defector testimonies on the
North Korean prison camp system have been from former
prisoners who had been detained in the "revolutionizing" zone
at Yodok, while accounts on the "totally controlled" areas
were either hearsay or from the published testimonies of just
two defectors, Ahn Myeong-cheol (a former guard at Camp Nos.
11, 13, 26 and 22) and Kim Yong (a former prisoner at Camp
Nos. 14 and 18). Shin is the only witness claiming to have
been born in a camp. We spoke to him on July 9.


BORN INTO A PRISON VILLAGE
--------------------------

¶4. (SBU) Shin's earliest memories are of living with his
mother in a two-room cement house in a village with similar
residences. The family used one room for cooking and the
other for sleeping. Shin said that residents could circulate
freely within their village, but needed special permission
from security guards to visit other villages or areas of the
camp. (Note: Shin could not describe how many houses were on
his street, how many people lived in his village, nor how
many villages were within the camp. End note.). Armed guards
circulated in the camp, especially at night. The guards wore
Kim Jong-il or Kim Il-sung badges, but at the time, Shin did
not know who those people were. Shin's father lived with his
work unit in a separate village.

¶5. (SBU) Shin did not know why his family was in the camp or
what "sins" his parents had committed. While he now
speculates that he had uncles who went to Sou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he never thought it was necessary to ask his
mother and his mother never explained. In fact, it was not
until he was much older that he had any reason to believe
that anyone outside the camp lived any differently.

ELEMENTARY EDUCATION
--------------------

¶6. (SBU) Shin began to attend elementary school ("people's
school," in North Korean vernacular) at the age of six. He
was in a class of about 35 students in a school of five
grades. The curriculum consisted of reading, writing, basic
arithmetic, and the memorization of camp regulations, such as
prohibitions against stealing, unauthorized movements and
meeting in groups of three or four. There was no discussion
of politics, history or current events. Shin never learned
about South Korea, China, the United States, or even North
Korea. Class discussion centered entirely on everyday life
of the camp. For example, children would have to write
descriptive information about their mothers bringing cabbages
home.

¶7. (SBU) The children studied from 08:00 until 12:00, broke
for a one-hour lunch, and then continued class until 15:00.
They then went to work, with typical tasks including road
construction, fixing potholes, collecting coal dust, or

carrying water to the fields.

WORKING FOR RATIONS AT AGE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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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SBU) At age 11, camp authorities transferred Shin from
his mother's home to a dormitory where he lived with his
classmates. His formal education then ended and his class
became a full-time work team.

¶9. (SBU) The security guards distributed clothing, food and
other necessities to camp inhabitants. They distributed new
sets of clothes, winter and summer, to each resident every
two years, and provided shoes twice a year. For food, Shin's
mother received a daily family ration of 900 grams of corn,
cut to the consistency of rice; salt soup and coal. Shin
never ate white rice or meat, except for the occasional mouse
that he was able to catch in the fields.

¶10. (SBU) Rations were directly linked to one's ability to
meet work quotas. Food allotments were small -- his share as
a work unit member was usually about 6 spoons of corn per
meal -- but sufficient to stay alive. Shin said people only
died of starvation when they could not meet their work quotas
and, accordingly, were not given their rations. Without
food, they would be too weak to meet their quota the next day
and would again be deprived of rations. Eventually, these
people would die.

¶11. (SBU) Shin did not recall any instances of teachers,
supervisors, guards or even fellow inmates showing any
compassion or offering to help anyone trapped in this cycle
of missed quotas and starvation. Inhabitants were too
concerned about their own survival. Moreover, it was assumed
that death by starvation was the natural and proper fate for
someone who could not do their work.

SWIFT PUNISHMENT, NO HEALTH CARE, ACCIDENTS COM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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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SBU) There was usually one security guard per work
team. Thus, in a leather factory where Shin worked for a
time, there was one guard for the roughly 2,000 workers. The
guards casually punished inmates for various infractions. In
one instance, Shin dropped and broke a sewing machine table.
The security guard in charge administered immediate
punishment: he cut off the end of Shin's right forefinger.
Shin considers himself lucky to have received such light
punishment.

¶13. (SBU) Inhabitants did not generally seek health care
because they would try to work regardless of their health.
If they were too sick to work they could not meet their work
quota, be unable to receive their rations, then die.
Although there was a hospital in the camp, it was mainly for
victims of industrial accidents. Camp inhabitants, he said,
were often hurt in the coal mine, where tunnels regularly
collapsed, and in the forests, where huge carts of wood
injured or crushed the workers.

TORTURE AND CONFINE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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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SBU) One morning when he was fourteen, guards
blindfolded Shin and brought him to an interrogation center.
They told him that his mother and brother had been caught
trying to escape and asked Shin to confess his complicity
with their plans. He denied any knowledge of the escape
attempt.

¶15. (SBU) Guards bound Shin's feet and hung him upside down
"for about a day," he said. The guards then took Shin down,
chained his hands and feet together, and burnt his back with
hot coals. The guards held his torso in place with a metal
hook.

¶16. (SBU) The guards then put him in a windowless room,
perhaps underground, for seven months. He had a roommate who
claimed to have been there for ten years. Shin's food
rations were cut from the normal six spoons of shaved corn
per meal to only two or three.

PUBLIC EXECUTION OF MOTHER AND SIB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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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SBU) On November 29, 1996, guards brought Shin and his
father, who had also been imprisoned for seven months, to the
camp's execution yard. The yard was used two or three times
a year to execute people for attempting to escape, stealing,
or violating other camp regulations. Typically, the village
residents, including children, would be forced to gather to
watch. Song remembers being about five-years-old when he
witnessed his first execution. He said he ran to the
execution yard filled with curiosity.

¶18. (SBU) Shin thought that he and his father were about to
die. Instead, the guards announced the imminent execution of
Shin's mother and brother for attempting to escape the camp.
Shin said that all public executions were preceded by long
exhortations by prison authorities about the various sins
committed by the condemned. With the villagers gathered,
executioners hung Shin's mother, bound and gagged, from a
tree. They kicked a stool out from under her feet and she
died, Shin said coolly. Three soldiers then shot and killed
Shin's brother, who was also bound and gagged. Asked how he
felt about his mother, Shin said that he was angry that his
mother had tried to escape. He would never forgive her for
causing so much trouble for him and his father.

¶19. (SBU) Security guards then allowed Shin to rejoin his
work unit. However, his team avoided him and treated him
like a criminal. He said that he volunteered to work longer
and harder in order to win back their trust. He felt guilty
for the crimes of his mother and brother, he added.

ESCAPING THE GU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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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SBU) In 2004, Kim met a fellow inmate who had lived
outside the camp and had even been to China. Based on his
discussions with this inmate, Shin resolved to look for an
opportunity to escape. On January 2, 2005, Shin and his
coworker were working in the woods gathering wood near the
electrified barbed-wire perimeter of the camp. Not seeing
any guards in the area, they decided to run through the
fence. Shin wedged himself through the wires, suffering
burns on his legs. He said that he did not know what
happened to his coworker, who appeared to have been caught in
the fence.

¶21. (SBU) Shin broke into vacant houses to steal food. He
exchanged his light-blue prison clothes with regular clothing
he found in abandoned buildings. As he traveled north to the
Chinese border, Shin was able to blend in with crowds and
avoid authorities along the way. "It's not like you have a
sign on your forehead that says you grew up in a prison
camp." Shin crossed the Tumen River after traveling about 25
days in North Korea.

¶22. (SBU) Shin spent about a year in China, farming and
working at the house of a Chinese man in Yanbian for about
nine months. He later traveled to Shanghai. In February
2006, a "Chosun Ilbo" newspaper reporter then working in
China helped him enter the ROK Consulate in Shanghai. He
arrived in South Korea six months later.

RESETTLEMENT IN THE 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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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SBU) Shin's resettlement has not been easy. Shin told
poloff that he was hospitalized after one month at the
Hanawon Resettlement Center because he was having nightmares.
For the time being, Shin has given up living alone in his
ROKG-funded apartment and is staying at the Database Center
for North Korean Human Rights (NKDB), a local NGO. Dr. Yoon
Yeo-sang, President of NKDB, told poloff on a separate
occasion that Shin still showed symptoms of mental
instability and had difficulty in talking with other people.
Indeed, during this interview Shin often seemed distant and
disassociated from the events he was describing.

¶24. (SBU) Despite the difficulties of overcoming the trauma,
Shin still wants his story to be known. He is currently
working, with the assistance of an NGO, on a book for
publication at the end of July. He is also trying to get a
driver's license.

COMMENT -------
¶25. (SBU) Shin's testimony is almost impossible to verify.
However, many experts within Seoul's DPRK human rights
community seem convinced by his story, and we, too, note the
general consistency between his account and what little we
already know about the totally controlled areas of North
Korea's prison system. END COMMENT.
VERSHBOW

북한 수용소를 탈출하다 사망한 주민. [온라인 캡쳐]
북한 수용소를 탈출하다 사망한 주민. [온라인 캡쳐]

 

 

 

kbs134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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