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109) 한-중 전격 수교 ‘청천벽력’ 북한 김일성 정권을 충격에 빠뜨리다
청와대-백악관 X파일(109) 한-중 전격 수교 ‘청천벽력’ 북한 김일성 정권을 충격에 빠뜨리다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1.12.11 20:21
  • 수정 2021.12.12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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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리크스한국이 위키리크스 비밀문서로 쓰는 한-미 40년 '정치 비사'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위키리크스한국DB]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 정부는 베이징에서 한중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북한의 핵문제가 계속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한국이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양국의 수교 발표는 북한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충격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 때 북한의 지원군으로 참여하는 등 중국은 공산국 가운데서도 북한의 ‘맹방’이었기에 한-중 수교는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의 화룡점정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중국은 1949년 정부를 수립한 후 모든 친미국가를 적성국으로 간주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또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으로 한국과 중국은 거의 30년동안 단절의 벽을 쌓고 지냈다.

그러다 70년대초 미­중화해무드로 한반도 주변 정세에 변화가 일자 한국은 1973년 6·23선언을 통해 비적대적인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선언하고 이념과 체제에 관계없이 모든 공산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진했다. 하지만 그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1992년 8월 24일 악수하는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 (베이징=연합뉴스)
1992년 8월 24일 악수하는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 (베이징=연합뉴스)

1978년 중국이 제11기 제3차 전인대에서 개혁실용주의를 채택하고 대외 개방정책을 추진함으로써 한국과 중국관계의 우호 가능성이 싹트기 시작했다.
70년대에 삼각무역 등 제3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교류를 해오던 중에 1983년 5월 중국민항기가 공중피랍돼 한국의 춘천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양국 정부관계자들이 접촉하게 됐는데 이는 한­중간 최초의 공식대면이 됐다.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연합뉴스)
이상옥 외무장관과 첸치천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협정문에 서명하고 있다.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연합뉴스)

이후 양국은 체육, 관광, 이산가족, 친척방문 등 비정치적인 영역에서 교류를 시작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대회에 중국이 대규모 선수단을 파견, 두나라 관계의 중요한 전환점이 이루어졌으며, 1988년 서울올림픽과 1990년 북경 아시안대회에서도 서로의 선수단 교류가 있었다.

1988년 10월 한국은 중국 관광금지를 해제했다. 1989년 6월 한중 해운 정기직항로가 개통됐다. 같은 해 8월 중국은 한국의 상하이 취항을 허가했다. 1990년 중국행 우편 직송이 개시됐다.

1990년 들어 한국과 중국은 급속히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한국 기업의 베이징 사무소 설치를 허가했고, 1990년 10월 20일 한중 무역대표부 상호설치합의서에 조인했다.

1991년 1월부터 중국은 한국 기자의 비자 발급 개시, 1월 30일 코트라 북경대표부를 개설했다. 10월 최초로 한중 외무장관회담을 가졌으며, 11월 제2차 외무장관회담이 열렸다.

1992년 2월 한중무역협정이 발효되었고, 4월 제3차 외무장관회담이 개최됐다. 중국과 기존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북한이 한국과 중국간의 관계가 획기적으로 발전하는 데 주요방해요인으로 작용했다.

1992년 8월 24일 양국은 베이징에서 한중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두 나라 관계의 새 장을 열었다. 같은 날 한국과 대만(중화민국)은 국교가 단절되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은 핵문제로 끊임없이 한반도와 국제사회를 괴롭혀 온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전략이었다. 정부는 북한의 주요 동맹국인 중국, 소련을 통한 포위망을 좁혀가면 남북이 진실한 대화를 나누고 협력할 확률이 높아질 것으로 판단했다.

냉전시대가 종식되면서 세계의 지각변동을 감지한 한국정부는 1945년 한반도의 분단과 독립 이후 제한되었던 외교의 영역을 넓히고자 시도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은 한국 정부의 자신감을 높여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1992년 9월 한중수교 후 처음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과 환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92년 9월 한중수교 후 처음 중국을 방문한 노태우 대통령이 양상쿤 중국 국가주석과 환담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북방정책을 효과적으로 펼치기 위해서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한국 정부는 걸프전에 한국군을 파병하는 문제를 비롯한 여러 이슈에서 미국의 요구에 긍정적으로 응했다.

하지만 한-미의 우호적 관계는 한국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새로운 양상으로 번지게 됐다.

수출이 늘어나면서 무역 적자문제가 새로운 이슈로 대두됐다. 한국 수출품에 대한 엄격한 통제가 이뤄지는가 하면 지적재산권 문제로 양국의 갈등이 고조됐다. 

수십년간 일방적으로 미국의 혜택을 받아온 나라에서, 미국과 경제적으로 경쟁하는 나라로 바뀌면서 각 분야에서 미묘한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특별취재팀= 최석진, 최정미, 한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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