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관 탐구① 김재형] 한국판 오코너 "법은 입법자보다 현명하다"
[대법관 탐구① 김재형] 한국판 오코너 "법은 입법자보다 현명하다"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1.12.22 18:25
  • 수정 2021.12.23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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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9~ 5년 3월
-사법연수원 18기 수료
-양승태 前 대법원장 제청
-박근혜 前 대통령 임명

편집자주】 위키리크스한국은 제20대 대통령선거일을 2개월 여 앞둔 지금, 정의와 공정이 화두로 떠오르지만 권력의지만 있고 시대정신은 실종됐다는 양가적인 현실 비판에 접근하고자 정치가 아닌 사법에서 그 길을 찾기로 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적폐청산을 국정목표로 제시하며 정권교체에 성공했고 실제 검찰을 그 수단으로 사용했지만 끝내는 검찰을 기계적 개혁 대상으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조국 사태는 그 비판의 화룡정점입니다. 청와대 민정수석 출신 현직 법무장관을 재판에 넘긴 이번 정부 검찰총장이 야권주자가 됐다는 점은 이같은 비판에 실체를 더합니다. 야권의 정권교체론에 의하면 문 대통령은 또 하나의 적폐청산 대상입니다. 무엇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했는가, 이 물음은 이제 정치가 아닌 사법이 답해야 합니다. 문 대통령이 임명한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사법의 이름으로 무엇이 바뀌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는 게 우리의 진단입니다. 본지는 대법원장 및 대법관들을 상대로 한 인물탐구 [대법관 탐구]를 연재합니다. 인물탐구의 방식에서 고전적인 잣대는 과감하게 버려질 것입니다. 대법관의 혈연, 지연, 학연, 출신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배경이 아닌 판결문 그 자체를 독자들에게 선보입니다.

지난 16일 대법원 3부는 현대조선해양의 자회사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이 합계 7168억원 상당의 법정수당을 이곳 회사 노동자에게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정기(기간·연간)상여와 명절상여를 통상임금으로 봐 차액 통상시급에 따른 추가 법정수당이 발생한다는 이유다.

두 회사를 대리한 대형로펌 태평양·김&장·지평은 2013년 대법원 판례를 들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초래하거나 기업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것은 신의에 현저히 반한다"며 원고의 통상임금 주장을 배척했다. 민법 제2조 1항 "권리의 행사와 의무의 이행은 신의에 좇아 성실히 하여야 한다"는 신의성실원칙(신의칙)에 따른 것이다. 2013년 12월 갑을오토텍 사건에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정기상여금은 정기·일률·고정성을 모두 갖춘 통상임금'이라는 원고 주장을 받아들이면서도 "노사합의에서 정기상여금은 그 자체로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전제"가 있었다면 신의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예외를 뒀다. 노동자가 노사합의에 없는 '가산 통상임금'에 따른 추가 법정수당을 청구해 사용자에게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부담"을 지운다면 신의칙에 반한다는 것이다. 통상임금 소송의 핵심은 '예측 가능성'이다. 

김재형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김재형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한국조선해양이 피고인 두 사건 주심 김재형(57·사진) 대법관은 7년 만에 예측 가능성의 개념을 전복해버렸다. 먼저 추가 법정수당 청구로 부담해야 하는 경영상 어려움이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일시적 어려움"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사용자가 ①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경영 예측을 하였다면" ② "경영상태의 악화를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다면" ③ "향후 경영상의 어려움을 극복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신의칙을 쉬이 적용할 수 없다. 

대법원 판결문에 따르면 가령 한국조선해양은 ① 소송 1년 전(2013년 소 제기 현대미포조선 기준)인 2012년부터 주요 수출처인 유럽의 경기침체와 수출 경쟁 국가인 중국의 성장세를 예측했고 ② "오랫동안 대규모 사업을 영위해 온 기업"으로서 수출 점유율 하락, 수주 실절 감소, 기존 선박 건조 계약 취소 같은 "국내외 경제상황의 변동에 따른 위험과 불이익"을 "예견할 수 있거나 부담해야 할 범위"로 감수해야 했으며 ③ 2014년 3분기 자체 경영실적 분석 자료에서 "조선, 해양, 플랜트의 향후 장기적인 수요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대법원은 나아가 "사실심 변론종결시라는 특정 시점에 국한한 피고의 경영상태만을 기준으로 볼 것이 아니"라고 했다. 두 사건 항소심 선고는 2016년 1월에 있었다. 한국조선해양은 이때를 기준으로 추가 법정수당 지급이 중대한 경영상 위기를 불러온다 말했다. 이같은 주장은 비객관적이다. 재판 속도에 따라 결론이 달라진다. 반면 시효가 남아 있어 추가 법정수당을 지급해야 했던 2011~2013년(현대미포조선 기준) 총인건비를 가정하면 당기순이익 대비 비율을 계산할 수 있다. 객관적이다. 해당 비율을 볼 때 한국조선해양의 경영상 위기와 노동자들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는 인과관계가 없다. 한국조선해양은 자사의 경영상 위기가 대외적 변수에 있음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었고, 예측했다. 2013년 대법 판례를 기계적으로 적용했다면 나올 수 없는 결론이다. 

◇ 통상임금 판결의 열쇠
이번 대법원 판결에는 숨은 지점이 있다. 김 대법관은 민법 조항을 인용해 신의칙을 설명하면서 지난 6월 대법원 판례를 인용했다. 본인이 역시 주심을 맡은 한국지엠 통상임금 사건이다. 김 대법관은 한국지엠 사건과 한국조선해양 사건 모두에서 교과서에서 볼만한 해설을 적었다. "신의칙은 법률관계의 당사자가 상대방의 이익을 배려하여 형평에 어긋나거나 신의를 저버리는 내용 또는 방법으로 권리를 행사하거나 의무를 이행해서는 안 된다는 추상적 규범으로서 법질서 전체를 관통하는 일반 원칙을 작용하고 있다" 여기서 핵심은 '일반 원칙'이 아닌 '추상적 규범'이다. '일반 원칙'은 '법'의 권위를 가리키나 '추상적 규범'은 스스로 권위를 세울 수 없는 '법률'의 한계를 가리킨다. 한국조선해양 대법원 판결은 사용자가 언제 신의칙을 내세울 수 있는지 정한 '구체적 규범'으로서 '법률'이 아닌 '법'이다. 

김 대법관은 '추상적 규범'에 '구체적 규범'을 덧씌우는 권위가 법관에게 있다 믿는다. 김 대법관은 지난해 9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법외(外)노조' 통보 전원합의체 사건 별개의견에서 "(법관은) 목적론적 축소를 통하여 법률의 적용 범위를 명확히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법을 형성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노동조합법 '근로자가 아닌 자를 조합원으로 두면 법외노조' 법률 문언(文言) 그대로 해석하면 전교조는 수십년 행사한 결사의 자유를 잃는다. 그런데 가입자 조항은 애초 국가의 조합원 자격심사를 예비한 것이라 헌법 제21조 2항은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에 어긋난다. 문제는 헌법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헌법재판소가 법외노조 통보 근거 법률인 노동조합법을 준용하는 교원노조법에 합헌을 선고했다는 점이다. 법률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현실을 법관이 그대로 수용하면 "심히 불합리하거나 부당한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게 김 대법관 판단이다. 때문에 김 대법관은 법률이 아닌 법률해석에서 위헌 부분을 삭제한다. 법외노조 조건 '근로자가 아닌 자의 가입'에서 '원래 조합원이었다가 해직된 자의 가입'을 제거하면 전교조는 '법상노조'가 된다. 

김 대법관은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에서 정통 법관이라면 감당할 수 없는 파격을 보인다. 그는 "불합리와 부당함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법원은 법의 문언을 넘어서는 해석, 때로는 법의 문언에 반하는 정당한 해석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 이유로 "법은 그 일반적·추상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본질적으로 흠결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흠결은 곧 입법자의 한계다. "법률 제정 당시에 입법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법률로 규정되지 않았거나 불충분하게 규정된 경우"는 흔하다. 2018년 11월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주심으로 여호와의 증인 신도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파기한 김 대법관은 보충의견에 "법은 입법자보다 현명하다"고 쓴 것과 통한다. 병역법 제88조 1항 집총을 거부할 수 있는 '정당한 사유'에 입법자가 '양심적 병역거부'를 상정하지 않았다고 해도 상관없다. "법을 해석할 때에 입법자의 의도를 고려해야 하지만 그에 구속될 것은 아니"고 "오히려 구속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김 대법관은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별개의견 말미에 "법원은 법률이 아닌 법을 선언해야 한다"고 적었다. 이때 법을 선언하는 법원은 바로 추상적 규범을 구체적 규범으로 바꾸는 법관이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한국조선해양 통상임금 사건은 적어도 김 대법관에게 있어 하나의 흐름이다. 

김재형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김재형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 위헌 (법률해석)을 제거하라
법률해석의 위헌을 제거하는 목적론적 해석은 지난해 10월 민주화보상법 사건으로 이어진다. 앞선 2015년 1월 대법원 전합은 '민주화보상법'으로 정부보상금을 수령했다면 '민주화운동 피해'를 이유로 국가에 추가 위자료를 청구할 수 없다 판결했다. 법원 판결을 심판대상으로 삼는 재판소원은 심리하지 못하는 헌재는 2018년 8월 '민주화운동 피해'에서 '불법행위에 따른 정신적 손해'를 제거했다. 법률이 아닌 법률해석에 위헌을 선고하는 '질(質)적 한정위헌'이다. 그간 대법원은 법률의 일부 문언을 삭제하는 '양(量)적 한정위헌'과 달리 질적 한정위헌은 인정하지 않았다. 법원의 역할이 곧 법률해석인 까닭에 질적 한정위헌을 인정하면 재판소원을 허용해야 한다. 김 대법관은 이같은 대법원의 전통을 깨고 헌재의 질적 한정위헌을 근거로 한 재심청구를 받아들였다.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때 이미 법률해석에서 위헌을 삭제하는 해석론을 채택했기 때문에 김 대법관으로선 오히려 일관적 행보다. 그에게 대법관의 권위는 헌재와 대립각을 세우는 데 있지 않고 불합리와 부당함을 교정하는 데 있다. 

◇ 법이 약자 편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김 대법관은 사법적극주의자일까. 김 대법관은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이후 법조계에서 자신을 사법적극주의자라고 부르자 그 답을 분명히 하고자 사건을 골랐다. 답이 나오는 데는 딱 1년이 걸렸다. 지난 9월 업무상재해 입증책임 사건에서 대법원 전합은 업무와 재해의 '상당인과관계' 증명은 근로복지공단이 아닌 노동자가 해야 한다는 선례를 유지했다. 기존 판례를 파기하지도 않는데 김명수 대법원장이 이 사건을 전합에 회부한 건 온전히 김 대법관을 위해서다. 

김 대법관은 이 사건 주심 대법관으로 반대의견을 대표 집필했다. 상당인과관계 입증책임 주체는 2007년 법률 개정으로 노동자에서 공단으로 전환됐다는 게 요지다. 개정 산재보험법 제37조 1항은 "근로자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사유로 부상·질병 또는 장해가 발생하거나 사망하면 업무상의 재해로 본다"고 정하면서도 단서 조항은 "다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는 예외를 둔다. 

김 대법관은 단서 조항에 주목했다. 권리발생의 입증책임에 관한 일반론 대법 판례에 따르면 법률 본문의 경우는 '주장하는 자'에게, 단서의 경우 '저지하는 자'에게 있다. 업무상재해 입증책임 사건에 적용하면 '상당인과관계가 없는 경우'는 공단이 입증해야 한다. 14년 전 이미 입증책임이 전환됐는데도 법원이 이점을 간과했다는 게 김 대법관 지적이다.  

다수의견은 단서조항은 본문을 부가적으로 설명해 "전체로서 업무상의 재해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상당인과관계를 필요로 함을 명시하고 있을 뿐"이라고 일축했다. 2007년 법 개정 이전에 입증책임을 근로자 몫으로 정한 판례를 바꿀 객관적인 사정변경이 없다는 얘기다. 이같은 해석은 김 대법관에게 법 문언이 기본적으로 사회적 약자의 손을 들고 있는데도 법관이 애써 외면하는 것으로 비췄다. 

김 대법관은 "법원이 상당인과관계의 증명책임을 전환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약자인 근로자 측을 배려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상반된 시각이 있을 수 있다"면서도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것은 법률의 문언보다 사회적 약자를 불리하게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법부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 역할을 해야 한다거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입장에 서야 이 사건 쟁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취지도 아니다"라고 분명히 했다. 본인은 근본적인 사법적극주의가 아니라는 선언이다. 

김재형 대법관. [출처=대법원]
김재형 대법관. [출처=대법원]

김 대법관은 법 개정으로 사회적 약자에게 도움이 되는 법률적 근거가 생겼음에도 법원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점을 자성한다. 그는 "2007년 개정으로 이 사건 조항이 신설되어 업무상의 재해에 관한 법률이 바뀐 다음에도 학계와 실무 모두 그 존재와 의미를 제대로 의식하고 주목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법원의 실무 관행과 이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라고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이어 "10여 년이 지난 다음에 상당인과관계에 관한 증명책임을 전환하는 것이 문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먼 훗날 돌이켜 보면 지금 바꾸는 것이 늦지 않았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고 훗날 자신의 반대의견이 다수의견이 될 것을 예고했다. 

이 사건에서 법관이 법 문언에 반하는 사법적극주의를 따를 때 사회적 약자에게 불리한 판결이 나온다. 애초 법 문언이 사회적 약자 편인 경우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김 대법관이 법 문언이 사회와 호흡하고 있을 때는 사법문언주의자, 그렇지 않을 때는 사법적극주의자를 채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김 대법관은 지난 9월 농업용 트랙터 무면허 운전 사건에서도 농업기계는 도로교통법이 처벌하는 대상 '자동차'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했다. 

김 대법관의 사법적극주의 취사는 다층적이다. 법률 문언과 입법자의 의도가 일치하지 않을 때 법률 문언이 사회적 약자 편에 있다면 법률 문언이 입법자 의도보다 우선이다. "법률에 표현된 내용이 입법자의 주관적 의사나 원래의 의도와 다를 경우에는 법률 문언에 나타난 객관적인 의사에 우위를 두고 해석하여야 한다"

법률 문언과 입법자 의도는 같다는 전통적인 사법문언주의자 입장으로선 설명할 수 없다. 사법문언주의로 사법적극주의를 해체하고 동시에 사법적극주의로 사법문언주의를 해체하는 게 김 대법관의 해석론이다. 김 대법관은 스스로 해명한다.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 당시 본인의 별개의견에 기술했던 "법은 입법자보다 현명하다"는 이렇게 한 번 더 등장한다. 사법적극주의는 '법'보다 아래에 있다. 

사법적극주의는 반대노선 사법문언주의 뜻을 알면 이해가 쉽다. 사법문언주의는 헌법 제정자와 법률 입법자 의도에 따라 법관은 헌법과 법률 문언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사법 사조다. 반면 입법자의 한계와 입법의 시대적 환경의 한계를 인정해 법률해석은 법관의 정의관념에 부합해야 한다는 관점을 따르는 게 사법적극주의다. 두 사조가 대립하는 핵심 쟁점은 과거의 헌법 제정자가 인정하지 않은 헌법상 권리를 현재의 법관이 인정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입법자가 분명하게 정하지 않은 영역이 사법심사 대상인지도 중요한 쟁점이다. 

사법적극주의와 사법소극주의 연원은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찾는 게 일반적이다. 미 연방대법원이 개인의 결정권이 헌법상 권리에 포함된다는 법리로 낙태권을 인정한 1973년 '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 이후 두 진영은 강하게 충돌했다. 사법문언주의는 '미국의 아버지들'로 일컬어지는 초대 헌법 제정자들이 미국의 연방주의를 합의한 '연방교서(The Federalist Papers)'에 개인의 결정권은 전혀 나오는 바가 없기에 낙태권은 개념적으로 성립할 수 없다고 했다. 이후 낙태 규제를 찬성하는 미 정통 기독교 지도자들은 로 대 웨이드 판결 파기를 보수주의 운동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 힘은 신보수주의로 보수 재건에 나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재임기 때 극대화됐다. 

레이건 대통령은 1986년 미 최초 여성 연방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를 임명하면서 얼 워런과 워런 버거 대법원장으로 이어지는 진보의 시기는 끝이 난 것으로 보였다. 대법원이 보수 5명, 진보 4명으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기대는 6년 만에 깨졌다. 오코너는 1992년 '가족계획 대 케이시(Planned Parenthood v. Casey)' 판결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지켰다. 5대4 진보의 판정승이었다. 당시 오코너는 낙태규제가 여성들에게 "과도한 부담(undue burden)"을 만들지 않는 한 규제는 지지돼야 한다는 하나의 '입법'을 했다. 이후 각 주 의회는 낙태규제법을 만들 때 '과도한 부담 없음'이란 장치를 달아야 했다. 

가족계획 대 케이시 판결 이후 보수에 있어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이 있다면 오코너가 신보수주의 산파 레이건 대통령에게서 임명됐다는 점이다. 재임 초반 스스로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비판적이 모습을 보인 오코너였기에 보수에게 가족계획 대 케이시 판결은 충격이었다. 오코너는 "우리는 보통법 법원이다. 따라서 법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라며 본인을 변호했다. 오코너는 이후 사형제 사건, 유색인종에 대한 '적극적 평등 조치(Affortive Action)' 사건, 테러와의 전쟁에 따른 적법절차 생략 사건 등에서 진보의 결론을 따르되 "과도한 부담" 같은 본인만의 사법적극주의 해석을 내왔다. 2002년 개정기 5대4 14개 사건에서 보수는 5개를 가져왔다. 2003년 개정기에는 19개 중 9개, 2004년 개정기에는 22개 중 단 4개였다. 진보 대법관들이 표를 얻기 위해 오코너를 대표집필자로 고른 결과다. 오코너가 작성한 판결문에는 미국 헌법이 아닌 해외 판례가 적히기 시작했다. 오코너는 타임지(The Times)가 뽑은 2000년도 최고 영향력 있는 여성이었다. 

[출처=타임즈]
[출처=타임즈]

빌 클린턴 대통령 재임기가 끝난 2001년 이후 정통 기독교 지도자들은 단순 보수주의자가 아닌 '로 대 웨이드 판결 파기를 약속하는 보수주의자'를 대법관을 골라야 한다고 백악관에 요구했다. 그 시점은 오코너가 사임하는 2005년이었다.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은 오코너가 2000년 대선 결론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플로리다 표 재검표를 중지하는 5대4 판결 다수의견에 서 본인을 도왔다는 점을 잊었다. 부시 대통령은 "법을 해석할 뿐, 법정에서 입법을 하지 않는 판사"를 대법관에 지명하겠다며 보수주의자들의 요구에 화답했다. 오코너 후임으로 지명됐다가 갑작스러운 윌리엄 렌퀴스트 대법원장 사망으로 후임 대법원장에 지명된 존 로버츠는 인사청문회 모두발언에서 "법관은 마치 심판과 같다. 심판은 규칙을 만들지 않는다"며 마찬가지로 보수주의자들에게 응답했다. 놀라운 점은 보수 대법관들이 사법문언주의자 자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오히려 소수였다. 보수 대법관은 선례구속주의자였다. 이들은 진보 대법관이 만든 판례라도 한 번 만들어지면 쉽게 파기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2021년 현재까지도 로 대 웨이드 판결이 지속하는 이유다. 미 연방대법원사(史) 관련해선 제프리 투빈, 「더 나인 THE NINE」, 강건우, 라이프맵(2010) 참조.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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