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137년 中] 연세의료원 60년, 민족 고난·호흡 함께했다
[제중원 137년 中] 연세의료원 60년, 민족 고난·호흡 함께했다
  • 김 선 기자
  • 승인 2022.04.18 09:04
  • 수정 2022.04.1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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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서양의학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서양병원 제중원에서 시작되어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중흥기를 맞았다. 1904년 9월 23일 건립된 도동 세브란스병원은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의 발상지로서 서양문화를 직접적으로 가져오게 한 중요한 시기였다.

세브란스병원은 1894년 제중원의 운영권을 선교부로 이관시킨 미국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에비슨이 계획한 것으로, 그는 1900년 4월 뉴욕 카네기홀에서 개최된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해 교파를 초월한 연합병원을 지으면 한국에서 효율적으로 의료선교사업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는 강연을 진행했다.

이 강연을 들은 세브란스는 큰 감동을 받고 기부를 결정하게 됐고, 그 기부금으로 병원이 건립됐다. 1904년에 완공된 세브란스병원의 규모는 지금의 아담한 중소병원 크기에 불과하지만, 당대에는 세계 어느 병원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의 최신식 종합병원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연세의료원의 신촌 시대를 열기까지 세브란스병원은 우리 의학의 발전적 과정에 있어서 민족의 고난과 호흡을 같이했다.

왼쪽부터 알렌(제중원 1대 원장), 헤론(2대 원장), 빈턴(3대 원장), 에비슨(4대 원장). [제공=연세의료원 동은의학박물관]
왼쪽부터 알렌(제중원 1대 원장), 헤론(2대 원장), 빈턴(3대 원장), 에비슨(4대 원장). [제공=연세의료원 동은의학박물관]

◆ 세브란스 개원..“한국 병원 공간 내면화·체계화 과정”

1904년 세브란스병원의 개원은 병원 공간과 전염병 관리에서 획기적인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다. 1885년 재동 제중원 시기에 감염질환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불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콜레라의 유행에 대응하기 위해 알렌과 헤론 등은 전염병실의 운용 등을 매우 중시했다.

또한 수술실, 진료공간과 입원 병상의 유기적 운용에도 적잖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공간적 운용과 특색은 전통 병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 한국식 전통 가옥은 온돌방을 사용했기 때문에, 환자 관리에는 불편한 요소가 많았다.

이러한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자 제중원은 재동에서 구리개로 이전했고, 1890년대 에비슨의 등장과 함께 질병분류에도 변화가 생겨났다. 이 시기부터 세균학적 검사와 현미경 검사 등이 본격화됐고, 단순히 증상에 따른 질병분류에서 세균학적 검사를 통한 질병분류라는 점에서 이전과 질적인 차이가 있었다.

나아가 구리개 제중원은 재동 제중원에 비해 2~5배 이상 공간확장을 꾀할 수 있었고, 병원 공간에 침대를 도입해 위생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1900년대 세브란스병원의 건립은 세균설과 실험의학의 이상을 공간적으로 실현한 결정판이었다.

병원 건물 전체에 전기와 급수가 안정적으로 공급됐고, 채광, 통풍, 온도 및 온수 조절이 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목욕, 세탁, 화장실, 상하수도 등 시설 인프라를 구축해 병원 위생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아울러 X-선 장비와 실험실을 구축함으로써 최신의학의 시연이 가능해졌다. 그밖에 전염병 병동과 기숙사 및 사택 등을 별도로 건립해 위생관리와 동선의 효율화에도 신경을 썼다. 3층의 건물에 진료, 병실, 실험실을 구축함으로써 진료, 연구, 교육이 효율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공간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재동 제중원에서 구리개 제중원으로, 그리고 다시 세브란스병원으로의 변화는 단순히 병원 공간의 확장이나 서양식 건축양식의 도입이라는 표면적인 변화 이외에도 근대 서양의학의 성과를 한국의 병원 공간에 내면화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었다.

1961년 9월 20일 연세의과대학 봉헌식 모습. [제공=연세의료원 동은의학박물관]
1961년 9월 20일 연세의과대학 봉헌식 모습. [제공=연세의료원 동은의학박물관]

◆ 1962년 6월 5일, 세브란스 신촌 시대 열다

1904년 설립된 세브란스병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과 거제로 피난을 떠났다가 1952년 2월 29일 환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서울역 앞 세브란스병원은 폐허가 됐고 그 피해 규모는 87만3,000달러로 추산됐다.

병원의 복구와 재건이 시급했지만 파괴된 건물의 재건비도 막대했고, 도시계획으로 퇴계로가 건설되면서 세브란스 부지가 양단되는 상황이었다. 파손된 건물은 미군의 지원으로 일부 복구 됐고, 1953년 7월 27일 한국전쟁이 휴전될 무렵 세브란스병원에 캐나다 연합장로교 의료선교사인 스트러더스가 내한해 세브란스병원에 흉부진료소를 설치했다.

감리교 소속 선교사인 와이스는 스트러더스 보다 늦은 1954년 4월에 1년간 머무를 예정으로 세브란스에 도착했는데, 그가 부임한 시기에는 세브란스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 사이의 합동이 한창 논의되고 있었다.

이때 미8군 노무자병원으로 상징되는 우호 관계의 연장 선상에서 미군 측으로부터 새로운 제안이 세브란스병원에 들어왔다. 미8군이 미군 희생자들을 기념하는 병원을 세브란스병원 구내에 건축해주겠다면서, 세브란스에서 인건비와 장비를 조달하는 조건으로 미군 측에서는 40~50만 달러 가치의 건축재료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소식을 들은 와이스는 김명선 세브란스의과대학 학장과 함께 세브란스병원을 신촌으로 이전하고, 결핵을 치료하기 위한 60병상의 흉곽병원을 짓는 것을 추진했다. 시작은 소박했지만, 흉곽병원의 규모를 100병상으로 확대하고 그 성격은 점차 외과병원으로 변화했다.

이에 따라 와이스는 미8군의 제안이었던 기념병원의 병상 규모를 늘리고, 기념병원 공사를 세브란스병원 전체의 이전으로 연결시켰다. 이후 1962년 신촌으로 이전해 1962년 6월 5일 봉헌식이 거행되면서 연세의료원이 새롭게 출발했다. 이로써 재동, 구리개, 도동을 거쳐 세브란스의 신촌 시대가 열렸다.

1962년 6월 5일 연세의료원 봉헌식 사진. [제공=연세의료원 동은의학박물관]
1962년 6월 5일 연세의료원 봉헌식 사진. [제공=연세의료원 동은의학박물관]

◆ 동양 최대 종합병원,,부속병원·외래진료소 확장

신촌에 연세의료원이 자리 잡은 배경에는 합동 외에도 두 학교를 후원하는 협동재단(CB)-연합재단(UB)이 서로 묶여 있었기 때문이기도 한데, 이들이 경제적인 후원과 함께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신촌으로의 이전에도 직접 관여한 것이다.

1955년 4월 23일이 흉곽병원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건축위원장은 와이스, 부위원장은 김명선이 맡았다. 공사가 한창 진행되던 중 1956년 4월 미국 뉴욕에 있는 아시아 기독교 고등교육 연합재단에서 이곳을 동양 최대의 종합병원으로 확장 발전시키자는 결정을 했고, 연건평 3,700평의 세브란스의과대학 부속병원, 외래진료소 등을 추가로 건축하기로 했다.

흉곽병원 공사가 진행되던 과정에서 신촌으로 세브란스병원을 옮기자는 구상이 새롭게 제기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10월 16일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의 합동 이사회가 개최되어 '연세' 합동 관련 논란의 종지부를 찍고, 1957년 1월 5일 문교부의 승인에 따라서 세브란스의과대학은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재편됐고, 1962년 8월 1일 자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부속 세브란스병원은 연세의료원으로 개칭하면서 현재의 연세의료원이 공식 출범했다.

[위키리크스한국=김 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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