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137년 下] “의학 역사를 아는 의사가 진정한 의사”
[제중원 137년 下] “의학 역사를 아는 의사가 진정한 의사”
  • 김 선 기자
  • 승인 2022.04.22 08:51
  • 수정 2022.04.22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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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

여인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는 연세의대 졸업 후 동대학원에서 석·박을 마치고 파리 7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여 교수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의사로서 환자 진료를 보고 치료하는 임상의학이 아닌 인문의학을 연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의과대학 학생들에게도 의학의 역사와 철학에 대해 교육한다. 2000년에 연세의대 교수로 임명된 여 교수의 주요 관심 분야는 한국 근현대의학사와 서양 고대의학사, 의철학 등이다. 줄곧 의학의 역사와 의철학의 길을 걸어온 여 교수는 1962년 연세의료원 출범에 대해 “우리나라는 도움을 받는 나라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가 됐다.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가 연세의료원이다. 해외 선교 활동을 하면서 연세의료원이 성공적 모델로 참고할 수 있는 사례가 되어, 필요한 곳에 많은 도움을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말에 담긴 의미는 연세의료인으로서 마음가짐을 대표한 것이기도 하다. 그는 의사가 되기 위해 역사가 중요하지는 않지만, 역사를 아는 의사와 모르는 의사는 분명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여 교수를 만나 제중원에서부터 시작된 연세의료원의 역사를 종합적으로 살펴봤다.

여인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
여인석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의사학과 교수

- 1885년 4월 10일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병원 제중원이 개원했다. 역사적 의미를 평가해 달라.

“제중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다. 사실 물리적으로만 본다면 제중원 보다 빠르게 1876년 부산에 설립된 제생병원이 있다. 그렇지만 이 병원은 일본 거류민들을 위해 설립됐기 때문에 한국 의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고 하지 않는다. 반면 제중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위해 설립된 병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와 선교부의 합작 병원이다. 조선 정부는 개항 이후 개화를 하는 과정에서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고, 선교부는 당시 조선에서 공개적으로 선교를 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교육이나 의료를 통해 전파하는 방법이 필요했다. 이런 양측의 입장이 서로 맞았기 때문에 합작 형태의 병원이 안전하게 출발할 수 있었다. 제중원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도 서양의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한의학과 다르게 서양의학은 외과적 수술과 처치 방법이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점이 있었고, 제중원 1차 년도 보고서를 보면 가장 많은 환자가 말라리아 환자였고, 키니네라는 특효약을 통해 많은 환자를 치료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초창기 조선인들이 제중원을 통해 도입된 서양의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 우리나라에 서양의학의 도입이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가 개항을 하면서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이미 전 세계적으로 사회의 근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했지만, 서양의학을 받아들여야 하는 필연성이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이 가장 고통받은 질병은 바로 감염질환인데, 이 병에 대한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다. 사실 직접적인 치료도 치료지만 감염질환은 위생을 통해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주면 예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전까지는 이러한 위생 관념이 정립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외상을 입은 환자들도 상처가 악화되기 보다 위생 문제로 인한 감염질환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문제들이 서양의학의 도입과 함께 많이 개선됐다. 한 가지 사례로 1895년에 콜레라가 크게 유행했는데, 그때 정부에서 당시 제중원 원장이었던 에비슨을 방역 책임자로 임명했다. 콜레라 유행에 대한 방역 활동 전체를 맡긴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질병관리청장의 위치다. 서양의학이 도입되기 전 19세기 동안 콜레라가 유행했지만 조선 정부도 이유를 잘 몰랐기 때문에 유행지역에 관리인을 파견해 제사를 지내는 것이 공식적인 방역대책이었다. 그러나 에비슨이 서양의학의 기초를 둔 방역 활동을 전개하면서 큰 효과를 봤다.”

- 1962년 연세의료원이 신촌 시대를 열었다.

“60년대는 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기다. 세브란스병원은 서울역 앞에 있었는데, 이곳은 중요시설이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중 집중적인 공격을 받아 거의 폐허가 된 벽만 남아있었다. 세브란스병원에 대한 전후 복구 작업을 진행하려고 해도 위치가 이미 협소해졌고, 도시계획으로 중간에 퇴계로가 나면서 잘리기도 했다. 그 위치에서 제한적으로 복구 작업을 진행했지만, 그것으로는 힘들다고 해서 미8군의 지원을 받아 병원을 새롭게 짓게 됐다. 당시 도시가 서쪽으로 점점 확장해가는 과정에서 신촌 넓은 부지에 최신식 시설을 갖춘 병원을 지었던 것은, 새로운 의료 모델을 제시한 사례가 됐다. 사람들도 익숙하지 않은 서양식 건물 구조에 많이 놀랐다. 규모 면에서도 동양 최대였기 때문이다. 일명 '마스터 플랜'이라고 서울역 앞에 있던 세브란스병원만 해도 그때마다 돈이 주어지면 건물을 짓고 또 짓는, 전체적인 계획이 아닌 그때의 상황에 맞춰 필요한 기능을 하는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신촌에 올 때는 처음부터 마스터플랜을 갖고 학교, 병원, 기숙사 등등 의료와 관련된 종합적인 계획하에 필요한 건물을 지었다. 그런 점이 이전과 가장 큰 차이점이었고, 건물을 건설한 사람들도 그 점을 가장 염두해 두었다.”

- 지금의 연세의료원이 있기까지 큰 공을 세운 인물은 누구인가.

“제중원의 개원은 알렌이 조선 정부에 병원을 세워달라는 제안서를 제출하면서 시작됐기 때문에 첫 번째다. 그런데 알렌은 제중원에서 오래 일하지는 않았다. 2~3년 정도 일하다가 외교관이 됐다. 그 다음에는 에비슨이다. 실질적으로 세브란스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병원도 키우고 제자들도 키웠다. 또한 병원만이 아닌 확실한 의료 교육기관으로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나아가 선교사들이 계속 있을 수 없으니까, 한국 사람들이 맡아서 진행해야 한다는 의견에서 한국인 후계자들을 양성해 학교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했다. 해방 이후에는 연세 합동이 중요하고 큰 계기가 됐다. 김명선 학장이 그런 일들을 했고, 그 전이나 후에도 사실 학교를 위해서 많은 일을 했다. 그다음에 신촌 캠퍼스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와이스라는 분이 초장기부터 건축위원장을 맡았는데, 그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기저기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것을 위해 수천통의 편지를 쓰는 등 중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다 극복해서 신촌 의료원이 생길 수 있도록 했다. 그 이후에는 각 분야에서 열심히 역할들을 해서 지금에 이르렀다.”


- 한국의 의학교육 발전은 어떻게 이뤄졌는가.

“1885년에 제중원이 만들어지고 그 이듬해부터 의학교를 만들어서 학생 교육을 시작했지만, 성공은 못 했다.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은 교육

한 사람 중에 의사가 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에비슨이 와서 다시 제중원을 맡으면서 의학교육을 시작했다. 그때는 도제식으로 진행됐는데, 같이 일하는 의사가 2~3명 정도 밖에 없었으니까 체계적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 비슷한 무렵에 정부에서도 의학교를 만들었는데, 병원 실습 없이 교실에서 수업만 하는 형태라 제대로 된 의학교육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는데, 세브란스의 경우 에비슨이 그때도 연합을 하면서 한국에 있던 각 교파의 선교의사들을 받아 규모를 키웠다. 이에 따라 각 분야 마다 전공 교육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즉, 에비슨은 세브란스를 연합기관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후 정부에서는 일본 총독부의학교를 만들었는데, 1915~1916년 전문학교령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우리나라에서 대학 학위를 주지는 않지만 가장 고등학교인 전문학교 제도를 만들었다. 거기서 경성의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두 개가 전문학교로 시작됐다. 그게 제도적으로 갖춰진 첫 번째 형태였다.”

- 역사를 기억하는 연세의료원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달라.

“두 가지가 있다. 선교의료기관으로 시작됐기 때문에 선교라는 것이 단순히 기독교인들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Catchphrase' 처럼 의료를 통해 기독교적인 사랑을 전파하는 사명이고, 또 하나는 그냥 단순히 선교 기관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의료를 이끌고 가는 선도적인 기관으로서의 역할이다. 의사가 되는데 역사가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험과목에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국 사람도 역사를 아는 한국 사람과 모르는 한국 사람이 겉으로는 같아 보여도 그 의미가 다른 것처럼 의사가 되는 과정에서도 의학의 역사를 알고 어떤 과정을 지나 지금에 이르렀는가를 알고 있는 의사와 모르고 있는 의사가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를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또 하나는 과거 의학의 역사를 보면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낡은 이론들인데 그런걸 왜 배웠느냐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것도 먼 미래에서는 다 옛것이 될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최선일 수 있지만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학문에 대한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위키리크스한국=김 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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