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오늘 6·25전쟁 72돌...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승인한 이유는?
[포커스] 오늘 6·25전쟁 72돌... 스탈린이 한국전쟁을 승인한 이유는?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2.06.25 05:45
  • 수정 2022.06.25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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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당시 유엔군 [사진=연합뉴스]
6.25 전쟁 당시 전투 장면 [사진=연합뉴스]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 '6·25전쟁'이 25일로 72돌을 맞았다. 

‘히스토리 채널’의 웹사이트는 한국전쟁의 발발 배경과 관련해 자유기고가 데이브 루스(Dave Roos)의 글을 게재했다. 필자는 이 글에서 구소련의 지도자 스탈린이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은 뒤 김일성의 남침 야욕을 승인했다고 주장했다.

한국전쟁(1950-1953)은 냉전 시기 최초의 군사적 충돌이었으며, 역사가들은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승인이 없었다면 북한은 남한을 침공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 의견일치를 보고 있다. 스탈린은 1922년부터 1953년까지 구소련을 철권통치하던 독재자였다.

그렇다면 스탈린은 한국전쟁을 통해 무엇을 노린 것일까? 1950년 남침이 이루어진 후 몇 달 뒤 스탈린이 스스로 구술한 서한이 2005년 구소련 문서 보관소에서 발견되었다. 이 편지에 의하면, 스탈린이 북한 공산정권이 남한을 침공하도록 허락한 핵심 이유 중 하나는 미국을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힘겨운 전쟁으로 끌어들여, 스탈린의 진정한 관심사였던 동유럽에서 미국의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함이었다.

“미국을 한반도로 끌어들이면 세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스탈린은 이렇게 썼다.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하지만 스탈린이 적보다 한 발짝 앞서서 판세를 유리하게 이끌려는 의도가 분명했던 반면에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의도에 회의(懷疑)를 표명하고 있다. 소련이 탄생시킨 북한이 남침하는 데 소련의 승인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스탈린이 정말로 핵 강대국인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는 말이다.

나아가 전문가들은, 미국 정부의 모든 공식 문서들과 소련 스파이들의 정보가 당시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전쟁에 개입하지 않을 것을 시사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헤리 트루먼 대통령의 참전 결정이 소련을 놀라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

침공에 앞서 스탈린은 필요할 경우 중국이 지원군을 파견하겠다는 마오쩌둥의 약속을 받아냈다. 그러고서도 스탈린은 소련군이 미군과 공개적으로 교전을 벌이지 않도록 전쟁 기간 내내 애를 썼다.

남침 야욕에 불탔던 북한의 지도자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한 뒤 한반도는 연합군의 통제하에 들어갔고, 연합군은 38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대충 반으로 분할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은 남한에서의 민주적 선거를 감독했고, 소련은 북한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을 탄생시켰다.

1948년, 소련의 스탈린과 공산 지도자들은 당시 36세이던 김일성을 북한의 첫 번째 지도자로 선발했다. 김일성은 과감한 게릴라전으로 명성을 얻은 공산주의 신봉자였다. 흥미로운 점은 김일성이 대부분의 군사 경험을 중국의 만주 지방에서 습득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먼저 일본군과 싸움하는 과정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는 중국 군대를 이끌다가 중국 내전 과정에서는 중국 국민당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김일성은 북한의 정권을 차지한 뒤 처음에는 한국인들보다 소련과 중국인들을 칭찬하는 일이 많았다.”

『최악의 공포 : 한반도가 냉전을 변화시킨 과정(Fearing the Worst : How Korea Transformed the Cold War)』의 저자 사무엘 웰즈는 이렇게 말한다.

김일성이 북한을 경제·군사적으로 도왔던 소련의 도구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는 분명 야심찬 지도자이기도 했다. 그는 한반도를 공산주의로 통일하고자 1949년 내내 스탈린에게 남침 의사를 피력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군사적 충돌을 가장 먼저 우려했던 스탈린은 초기에는 그의 의지에 찬성하지 않았다.

1951년 6월 9일 촬영된 이 사진은 고양시 인근 행주에서 M-26 탱크 옆을 지나는, 아이를 업고 걸어가는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사진 = 연합뉴스]
1951년 6월 9일 촬영된 이 사진은 고양시 인근 행주에서 M-26 탱크 옆을 지나는, 아이를 업고 걸어가는 한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사진 = 연합뉴스]

중국이 테이블에 오르자 남침을 승인한 스탈린

세계 질서의 지정학적 균형은 1949년 10월 1일 다시 한 번 휘청거리게 되었다. 공산 혁명가 마오쩌둥이 중국 국민당의 패퇴(敗退)와 중화인민공화국의 설립을 선언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당시 공산권에서 가장 부유하고 강력했던 구소련과 공식적으로 동맹관계를 맺기를 바랐다.

마오쩌둥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스탈린과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사무엘 웰즈는 양측은 협상 조건을 놓고 스탈린이 한반도를 협상카드로 활용할 때까지 충돌을 빚었다고 말한다.

이때는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가 아시아의 전투에 미군을 보내지 않겠다고 분명히 선을 그은 1950년 초반이었다. 트루먼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은 1950년 1월 12일 연설을 통해 일본과 필리핀만이 미국의 분명한 군사적 보호 아래 놓인 영토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기까지 했다. 이를 통해 미국이 또 다른 논란의 대상이던 남한과 대만에 관심이 없다는 의사가 드러났던 것이다.

애치슨 장관의 연설과 소련의 광폭 스파이 활동을 통해 입수한 정보들은 소련 입장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즉각적인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김일성의 남침 의사를 지원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보험을 원했다고, 사무엘 웰즈는 말한다. 바로 중국이라는 보험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사무엘 웰즈에 따르면, 마오쩌둥을 만난 스탈린은 하나의 조건만 충족된다면 중국에게 대규모 경제 지원을 해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바로 김일성의 남침 야욕을 중국이 지원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만일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길어져 미군이 개입한다면 군대를 보내는 측은 소련이 아니라 중국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 조건을 내세웠다. 결국 마오쩌둥이 이 조건을 승낙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미그 앨리’에서 미군 폭격기들을 격추시킨 소련 조종사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선을 폭풍처럼 밀고 내려가 남한의 수도인 서울을 점령했다. 그러자 소련이 불참한 UN 안전보장이사회는 한국을 수호하기 위해 미군을 포함해 평화유지군(peacekeeping forces)을 보내기로 결의했다.

1950년 9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UN군은 과감하게 인천 해안으로 상륙작전을 개시해 서울을 탈환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초기의 승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자신감(일부 전략가들은 바보 같은 판단이었다고도 평함)이 넘쳤던 맥아더는 중국과 북한의 국경 지대인 압록강까지 진격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중국은 이를 직접적인 도발로 간주했던 것이다.

마오쩌둥은 중국군 수십만을 만주에서 국경 지대로 파병해 미군과 UN군을 몰아붙여 남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도록 했다. 압록강에서 끔찍한 전투를 치른 뒤 미국은 중국군의 전략 보강을 저지하기 위해 북한 상공에 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B-29 폭격기 함대를 투입했다.

한편 스탈린은 미국과 직접 전투를 치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중국과의 동맹 약속의 일환으로 소련의 공군력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사무엘 웰즈는 스탈린이 꾸물거리기는 했지만 결국 중국-북한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수십 대의 소련 MiG-15 전투기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후퇴익(swept-wing) 기능으로 설계된 소련의 MiG-15기는 덩치만 큰 미국의 B-29 ‘수퍼포트리스(Superfortress)’와 비교해 엄청나게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났다. 미국 최고의 전투기인 F-84 센더젯(Thunderjet)조차도 미그기의 상승 속도와 화력에 견줄 수 없었다. 그 결과 스탈린의 미그기는 ‘미그 앨리(MiG Alley)’로 알려지게 된 중국-북한 국경 지역에서 미국 폭격기와 전투기에 큰 손실을 입혔다.

MiG-15는 분명히 소련의 전투기였으나, 스탈린은 전쟁에 소련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미그기에는 북한 휘장이 그려져 있었고, 소련 조종사들은 임무를 수행할 때 북한군 제복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로 된 기본적인 무선 명령을 배웠다. 여기에다 유엔이 장악한 지역에서 격추된 소련 조종사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자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MiG-15는 이전까지 해당 분야의 변방으로 취급되던 소련이 냉전 시기에 미국과 맞서는 슈퍼파워가 되었음을 알린 전투기다. 사진은 1953년 북한 공군의 노금석 대위가 자유를 찾아 탈출할 때 몰고 온 MiG-15기 모습. [사진=ATI]
MiG-15는 이전까지 해당 분야의 변방으로 취급되던 소련이 냉전 시기에 미국과 맞서는 슈퍼파워가 되었음을 알린 전투기다. 사진은 1953년 북한 공군의 노금석 대위가 자유를 찾아 탈출할 때 몰고 온 MiG-15기 모습. [사진=ATI]

나토(NATO) 강화라는 역효과를 불러일으킨 스탈린의 도박

3년간 이어진 한국전쟁은 38선을 따라 남북한을 가르는 비무장지대를 신설하기로 합의하면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상태로 끝이 났다. 스탈린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기 몇 달 전 사망했다.

스탈린은 1950년 작성된 서한에서 남침을 지원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미국이 아시아에서 “과도한 확장”을 자초하여 유럽에 소련을 위한 권력 공백이 생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사무엘 웰즈는 정반대의 결과가 발생했다고 주장한다.

한국전쟁 전에는 나토가 명목상의 협의체뿐인 동맹이었지만, 소련의 남침 지원으로 군사조직을 구축하고, 1951년 첫 나토 연합군 최고사령관에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임명되었던 것이다.

“스탈린의 도박은 일부 역효과를 가져왔다. 나토가 실제적 군사 동맹의 길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위키리크스한국=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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