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 줌인] 우크라이나가 갈등의 현장이 된 역사(하)... 2차대전 중 100만 유대인 희생 '비극'
[우크라 줌인] 우크라이나가 갈등의 현장이 된 역사(하)... 2차대전 중 100만 유대인 희생 '비극'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2.10.10 06:47
  • 수정 2022.10.10 0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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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1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민들이 대형 국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월 13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시민들이 대형 국기를 들고 거리를 행진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의 미국 텍사스주 크기만 한 지역은 종종 ‘유럽의 곡창지대’라고 불리며 주변 지역 강대국들의 패권 다툼의 현장이 되어왔다.

고대에는 스키타이, 사르마티아제국 같은 덜 알려진 외세 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제국, 훈족 등이 한 시기 이 땅의 주인을 자처해왔다.

그리고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더욱 최근에는 바이킹, 몽골족, 리투아니아, 폴란드, 러시아, 오스만제국, 스베아족(게르만계),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가 이곳을 차지하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반(半) 자치권을 행사한 적은 있었지만, 구소련 붕괴 이전까지 한 번도 완전한 독립을 이룬 적이 없던 우크라이나는 흩어졌다가 뭉치기를 반복했다.

그런 역사에 걸맞기라도 하듯이 ‘우크라이나(Ukraine)’라는 국가명에는 ‘첨단’이나 ‘국경 지대’라는 의미가 숨어있으며, 이 나라의 애국가에는 ‘우크라이나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Ukraine has not yet perished)’는 구절이 등장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정체성은 수많은 논란거리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데, 2022년의 러시아 침공을 두고는 그 정도가 더욱 심화하고 있다.

예를 들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국민과 러시아 국민은 ‘같은 동포’이며 우크라이나는 ‘실체적 국가’가 아니라고도 선언했는데, 이는 우크라이나를 ‘리틀 러시아’로 간주했던 지난 세기 러시아 사람들의 정서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이 같은 성격 규정에 강력히 반발하며 우크라이나는 자신들만의 언어와 문화, 전통 및 공통의 시민 정신을 지닌 분명한 국가임을 주장한다.

“푸틴과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우크라이나는 자신들 조상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정말 수많은 일들이 발생했습니다.”

미시시피 주립대학에서 러시아 역사를 가르치는 스티븐 브레인 교수는 이렇게 분석한다. 그는 나아가 “아주 긴 기간 동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같은 국가에 속해있었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브레인 교수는 “키이우(Kiev)는 모스크바가 생성되기 이전부터 자신들 나라의 수도였다.”고 말한다.

현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통제 밖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으며, 브레인 교수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자신들이 별개의 국가에 속한다고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 = 연합뉴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사진 = 연합뉴스]

러시아 제국의 탄생

1708년, 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한 러시아 : 스웨덴의 칼12세는 ‘대 북방 전쟁(Great Northern War)’에서 러시아를 침공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우회로를 확보하고 코사크족 지도자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하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칼12세의 군대는 다음 해 ‘폴타바 전투(Battle of Poltava)’에서 참패했고, 그 결과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동부를 차지하게 된다. 역사학자 브레인 교수는 이때부터 러시아 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1783년, 예카테리나 대제의 크림반도 합병 : 러시아의 여제(女帝) 예카트리나 대제는 오스만 제국과 몇 차례 전쟁을 치른 후 크림반도를 병합하고 전략 요충지인 흑해의 접근권을 확보했다. 비슷한 시기에 예카트리나 대제는 코사크 수장국(Hetmanate)의 해체를 완료함으로써 이후 긴 세월 동안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의 러시아화를 추진하게 된다.

1795년, 우크라이나 영토의 대부분을 차지한 러시아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세 번째이자 마지막 분할을 거치면서 그 영토가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으로 분리되어 역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이름을 지우게 된다. 오스트리아가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지만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러시아의 손아귀로 넘어가게 되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침공 :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러시아 침공의 일환으로 우크라이나로 진격해 들어가면서 재앙의 막을 올렸다.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

1800년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태동 : 유럽 전역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우크라이나도 그 대열에 합류한다.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주창하는 선구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강조하고 우크라이나어를 반포, 발전시키면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우크라이나인이라고 칭하고 마침내 자치를 요구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어 서적과 신문의 출판을 금지하는 등 일련의 억압적인 조치로 대응했다. “소수의 러시아어는 존재한 적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대중이 사용하는 소수 언어는 러시아어와 동일해야 한다.” 1860년대에 작성된 러시아 지침서에는 이렇게 명기되어 있다.

1917년, ‘자기 결정권’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평의회 :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발발하자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선출된 대표들로 구성된, 의회 성격의 ‘중앙 라다(Central Rada)’를 결성한 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 내의 한 국가임을 선언하고 “우크라이나 인민은 ‘자기 결정권’을 지니고 있다”고 주 주장했다.

1918년, 단명한 독립 : 러시아의 볼셰비키 군대가 접근해 들어오자 ‘중앙 라다’는 우크라이나 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한다.

“독립의 요정 지니가 이제 제국의 램프에서 빠져나오게 되었다.”

당시 상황을 역사가 플로키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런 다음 우크라이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군사 개입을 요청하는 ‘동맹국(Central Powers)’ 열강과의 평화조약을 조인했다. 이후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우크라이나 정부의 바람대로 볼셰비키를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독일과 오스트리아 또한 ‘중앙 라다’ 의회를 전복하고 친독일 괴뢰 지도자를 내세워 우크라이나 문제에 개입한다. 같은 해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일어났던 두 번째 독립 시도도 얼마 안 가 새로 개편된 폴란드에 의해 무산되었다.

1919년, 4개의 영토로 분할된 우크라이나 : 1차 세계 대전의 여파로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네 부분으로 분할된다. 러시아가 단연코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 반면, 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는 작은 부분을 나눠가지게 된다.

1921년, 내전 종식 : 적군, 백군, 폴란드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군대, 농민 민병대가 참혹한  내전을 거친 뒤 볼셰비키가 승리를 쟁취했다. 이 과정에서 키예프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는 과정에서 각 정파들에 의해 무수한 학살이 자행되었다.

구소련, 대기근, 체르노빌

1922년, 소비에트연방에 편입 : 우크라이나가 새로 설립된 소비에트연방에 통합되었다.

1932~1933년의 대기근 : 소련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기 위해 ‘홀로도모르(Holodomor)’로 알려진 대기근을 일으켰고, 그 결과 약 390만 명의 우크라이나인이 사망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계획된 대량 학살 행위로 간주한다. 이와 관련 역사학자 헤레라는 “역사적 기록은 매우 분명하다. 모스크바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충분한 자료가 남아있다.”고 말한다.

1936~1938년의 대숙청 : 스탈린은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소비에트 전역에서 대대적인 정적 숙청 작업에 착수해, 해당자들을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수감했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침공 : 나치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위반하고 소련을 침공하면서 그해 연말까지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이때 일부 우크라이나인들은 처음에는 독일을 해방자로 환영했고, 심지어 나치의 악명 높은 무장 친위대(Waffen-SS)에 자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치가 우크라이나 민간인을 노예 노동자로 부려먹기 위해 독일로 대량 추방하자 우크라이나 일부에서 독일에 대한 반감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 최악의 학살 중 하나는 그해 9월 우크라이나 경찰의 지원을 받은 나치 학살 부대가 키이우 외곽의 계곡에서 약34만4,000명의 유대인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1944년, 스탈린에 의해 크림반도에서 쫓겨난 타타르족 : 스탈린은 크림반도에 거주하던 타타르인 전체 인구 중 약 20만 명을 추방했으며, 그중 거의 절반이 망명 중에 기아나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우크라이나를 재탈환한 소련군은 독일을 향해 서쪽으로 진군하는 과정에서 수십만 명의 폴란드계 주민을 강제로 추방하기도 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실종된 100만의 우크라이나 유대인들 : 2차 세계 대전이 마침내 종결되었지만, 우크라이나는 100만 명의 유대인을 포함해 약 500만~7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는 전쟁 전 인구의 약 16%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1954년,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준 흐루쇼프 : 니키타 흐루쇼프 치하의 소련 정부가 ‘영원한 우정’의 표시로 크림반도의 소유권을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이전하였다.  

1986년의 체르노빌 원자력 재앙 : 우크라이나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안전 테스트가 실패한 뒤 원자로 용융(meltdown)이라는 대재앙이 발생하였다. 소련 당국은 처음에는 이를 은폐하려고 시도했다. 역사상 최악의 원자력 사고로 여겨지는 이 재앙은 종종 소련의 붕괴를 앞당긴 것으로 지목받는다.

지난 2013년 1월, 유럽연합(EU)과의 협력협정 체결 무산에 분노한 10만여명의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1일(현지시간) 수도 키예프 중심가에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3년 1월, 유럽연합(EU)과의 협력협정 체결 무산에 분노한 10만여명의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1일(현지시간) 수도 키예프 중심가에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우크라이나의 독립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 선언 - 구소련이 단말마의 시련을 치르는 와중에 우크라이나 의회가 독립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유권자들은 이 결정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로써 우크라이나는 사상 최초로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1994년, 핵무기를 포기한 우크라이나 :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간의 협상으로 ‘기존 국경을 최우선으로 존중’하겠다는 러시아의 서약을 받고 우크라이나는 물려받은 핵무기를 포기하는 협정에 서명하였다. 그 후 우크라이나는 미국 대외원조의 주요 수혜국이 되었다.

2004년의 오렌지 혁명 : 부정선거였다고 알려진 선거 결과에 분노한 우크라이나 시위대가 키이우 독립광장에서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으로 알려진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그 결과 이뤄진 재선 투표에서 선거 기간 동안 치명적인 독살 시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친서방 후보 빅토르 유시첸코가 친러시아 후보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물리치고 정권을 쟁취했다. 하지만 2010년 유시첸코가 내분으로 어려움을 겪자 야누코비치가 복귀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014년, 친러시아 대통령을 축출한 저항 운동 : 우크라이나 정부군이 이번에는 유럽 연합과의 긴밀한 유대를 원하는 키이우 독립광장의 시위대에게 발포를 하였다. 그 결과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지만 부패로 악명 높은 야누코비치를 러시아로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병합 :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크림반도를 즉각 점령, 합병하는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내부의 움직임에 대응하였다. 그는 나아가 우크라이나 동부의 돈바스 지역에서 분리주의자들의 반란을 조장하였는데, 이 분쟁은 이후 몇 년 동안 약 14,000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내전으로 번지게 된다. 헤레라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대신 유럽을 선택했다는 것인데 푸틴에게 그것은 절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고 말한다.

2019년, 젤렌스키 대통령 선출 : 한때 텔레비전에서 우크라이나 대통령 역을 맡기도 했던 전 코미디언 볼로디미르 젤렌스키가 압도적인 표차로 대선에서 승리하여 우크라이나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취임한 지 두 달 만에 트럼프의 첫 번째 탄핵의 단초가 되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전화를 받는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하지만 예상보다 막강한 저항에 부딪힌다. 역사학자 헤레라는 이번 침공을 “우크라이나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러시아의 정서가 되살아난 것”이라고 말한다.

[위키리크스한국 = 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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