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 미안함'과 '더 미안함'의 차이 [정숭호 칼럼]
'덜 미안함'과 '더 미안함'의 차이 [정숭호 칼럼]
  • 정숭호 칼럼
  • 승인 2022.11.04 06:16
  • 수정 2022.11.04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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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광장에 차려진 이태원 사고 합동분향소에서 추모하는 사람들. (연합)
서울광장에 차려진 이태원 사고 합동분향소에서 추모하는 사람들. (연합)

이 제목으로 칼럼을 쓰려는 마음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 때문에 시작됐습니다.

이태원에서 애처롭고 불쌍하게 죽은 희생자들의 합동분향소 조문록(弔問錄)에 이 말을 적은 사람이 많고, SNS에는 이것을 줄인 ‘지못미’ 세 글자가 자주 눈에 띕니다. 대통령 부인은 아이들의 빈소를 찾아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며 유족을 위로했지요. 

억울하고 서럽게 죽어간 사람에게 미안한 감정을 갖는 것은 인간의 도리입니다. 특히 이번처럼 무지막지한 인파에 짓눌린 채 죽어간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느꼈을 그 공포와 절망을 생각하면 미안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죽음 앞에서 미안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될 겁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우리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을 오랫동안, 많이도 해왔구나”라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언제면 우리가 이 말을 안 하게 될 것인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이것저것 온갖 정보와 지식을 담고 있는 ‘나무위키’는 이 말이 2002 월드컵 때 변을 당한 효순/미선 양 사건 때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맞는 말이네요.

고등학생 300명 이상이 차가운 바다에 빠져 숨져간 세월호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구의역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세상을 떠난 열아홉 살 청년의 작업 가방 속에 들어 있어서 여러 사람의 눈시울을 더 붉게 한 것과 같은 컵라면이 그 2년 뒤 서해안의 한 발전소에서 일하다가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숨진 하청 업체 직원의 가방에서도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강남역 부근 화장실에서 20대 여자가 생면부지의 흉한이 휘두른 칼에 난자당해 숨졌을 때도 우리는 이 말로 그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18개월 된 정인이가 양부모의 학대 끝에 죽게 된 것이 밝혀졌을 때도 “정인아,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수많은 사람이 울먹이며 한 송이 꽃으로 그 죽음을 슬퍼했고, 컴퓨터 게임에 빠진 부모가 돌보지 않아 굶어서 죽은 8개월짜리 아이의 죽음에 먹먹해 한 사람들은 상관에게서 성폭행을 당하고도 신원(伸冤-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리는 것)을 하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군 소식이 전해졌을 때도 이 말로 그의 원한과 분노를 달랬습니다. 

지난 20년간 우리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많이도 말해오면서 “다시는 비슷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염원했지만 비슷한 일은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또 어느 순간에 비슷한 사고가 일어나 또 다른 희생을 불러올지 모른다는 걱정과 염려도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한 방지책도 창고에서 물건 꺼내오듯 되풀이돼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자주 말해온 탓에 ‘지못미’가 희화화된 측면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이처럼 너무 자주 말해온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를 우리가 덜 말하려면 “미안하다”라는 말을 더 자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국과 미국 사람들이 “소리-Sorry”를, 일본 사람들이 “스미마셍-すみません”를 입에 달고 사는 것처럼 우리도 “미안합니다”를 지금보다 훨씬 많이 사용할 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라는 말을 덜 사용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소리”와 “스미마셍”에는 “미안하다” 외에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라는 뜻도 있다지요. 

영미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은 복잡한 길에서 부딪혔을 때, 서로 “소리”, “스미마셍”이라고 한다고 들었습니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도 그렇게 한다고 합니다. 동시에 같은 문으로 들어가려던 사람들은 서로 먼저 들어가라며 양보하면서 “소리”, “스미마셍”을 말한다고 합니다. 영미 사람들은 “소리”만으로는 모자라 “플리즈-Please”까지 붙입니다. 

조금이라도 부딪히면 서로 눈을 부라리고, 문 앞에서는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발걸음을 재촉하고, 현관으로 사람이 들어오고 있는데도 엘리베이터 문닫힘 단추를 급히 눌러버리는 우리 주변의 익숙한 풍경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여러 나라에서 영어를 가르쳐본 어떤 영국인은 “소리와 스미마셍에는 미안합니다 외에 고맙습니다, 부탁합니다라는 뜻도 있다”면서 “한국 학생들이 왜 영국 사람들은 소리라는 말을 그렇게 자주 하느냐고 물어서 참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점잖은 말이 나에게는 “너희는 배려와 감사할 줄 모르느냐?”라는 말로 다가왔습니다. 그들 나라에도 억울하게 죽고 불쌍하게 죽는 사람이 없겠습니까만, 이번처럼 어처구니없이 어린 것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서로 배려하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사소한 것을 부탁할 때도 고마움을 미리 담뿍 담아 말한다면, 즉 “미안하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면 우리는 앞으로는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라는 말은 여태까지보다 훨씬 적게 말하게 될 겁니다. 

/메타버스인문경영연구원장, 전 한국일보 경제부국장, 전 신문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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