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잡은 손을 떠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정숭호 칼럼]
칼 잡은 손을 떠실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정숭호 칼럼]
  • 정숭호 칼럼
  • 승인 2023.02.09 08:46
  • 수정 2023.02.09 0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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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연합뉴스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연합뉴스

나이가 들어 새로 배운 한자 중에 ‘偸’자가 있습니다. ‘투’라고 읽으며, 뜻은 ‘훔친다’입니다. 이 글자가 들어간 단어는 대부분 뜻이 나쁩니다. 그중에서도 뜻이 가장 나쁜 것을 순서대로 고르라면 1위는 투생(偸生), 2위는 투안(偸安)입니다.
 
투생은 “구차하게 산다는 뜻으로, 죽어야 마땅할 때 죽지 아니하고 욕되게 살기를 꾀하는 것”이라고 사전에 나옵니다. 달리 말하면, 남의 삶을 훔쳐서 사는 사람들이지요. 투생주의자는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희생시키는 사람입니다. 투안은 “할 일을 미루어 두고 눈앞의 안일을 탐하는 말”이라고 나옵니다. 할 일 안 하고 당장 편하여지려면 다른 이의 안락과 안전을 훔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는 투생과 투안, 이 두 낱말을 김원우 씨의 소설 『이 세상 만세』(까치, 2018)에서 배웠습니다. (‘偸’자도 그렇게 해서 배운 것이지요) 출판사 책 소개를 요약하면 “거짓과 모순 그리고 포퓰리즘과 ‘정의’가 백주에 난무하는 21세기 한국 사회의 이 풍진 세상을 거침없이 강타하는 풍자소설”입니다. 

그는 조선이 망하고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 건 뿌리 깊은 투생주의, 투안주의 때문인데, 해방 이후에도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 탓에 한국이, 한국인이 지금 이 지경이라고 때로는 정색한 채 일갈하고, 때로는 우습고 서글픈 사례들로 풍자합니다. 유교문화, 선비문화, 양반문화 …, 이런 것들이 사실은 왕과 권세가들 그리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았던 벼슬아치들의 투생과 투안을 쉽게 해주고 보호해준 제도였다고 그 특유의 만연체 문장에 풀어놓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이순신 장군을 당시 조선 조정의 투생주의자, 투안주의자 들의 희생자로 그리고 있습니다. 좀 길지만, 그 장면을 옮겨보겠습니다. 

“당연하게도 이순신은 장군으로서가 아니라 한낱 전사(戰士)로서 죽기로 결심한다. 빗발처럼 촘촘히 쏟아지는 조총의 방사(放射) 앞에서 자신의 온몸을 무방비 상태로 노출시킴으로써 (살아서 다시 문안 인사를 올 생각은 거두라는) 모친의 당부를, 아니 오래 전부터 맹세한 자신의 자결 의사를 관철시키는 것이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도 그가 생사를 얼마나 하찮게 보았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아니다, 어차피 거덜 나버린 나라 꼴을 더 이상 보지 않겠다, 이 전투에서 이겼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입신 후부터 숱하게 목격한 조정의 비리에 얼마나 치를 떨었던가, 번번이 당하는 모함 앞에서도 이런 치욕을 감내하기에는 내 육신이 오죽 보잘것없는가, 이제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은 얼마나 쓰디쓰고 또 달콤했던가. 그런 고행을 묵묵히 맞받아냄으로써 그는 자신만의 소박한 기상을 드러낸다. 
투안주의와 투생주의가 만연한 조정과 조국에 무슨 애틋한 정을 쏟겠는가. 우왕좌왕하는 임금을, 탁상공론으로 시끄럽기만 한 권신을, 싸움과 죽음 앞에서 부들부들 떨어대는 병사와 백성들을 그가 어떻게 보았을까.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한낱 버러지들로 보지 않았을까. 그런 자기완성적 심경으로는 눈앞의 안일을 탐하는 나라의 기풍도, 구차하게 목숨이나마 이어가려는 만백성의 몸부림과 그런 근성 자체도 몹쓸 역병처럼 비쳐서 당장이라도 내치고 싶었을 것 아닌가.”

투자 들어간 단어에는 공금이나 나라의 물건을 자기 배에 쓱싹한다는 뜻으로 요즘 같으면 공무원의 횡령, 착복이라고 할 수 있는 투식(偸食)도 있는데 이런 것들은 투생이나 투안의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습니다. 투생, 투안하는 자들이 투식을 하지 않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득세하면, 이런 사람들이 권세를 잡고 재물을 누리는 세상은 참으로 살맛이 나지 않는 세상일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자신이 누려야 할 삶과 안락이 줄어든 사람들에게 세상 살맛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넘쳐나는 투생주의자, 투안주의자들 때문에 지금 한국은 나라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나에게는 당권 다툼에만 온 정신을 쏟고 있는 여권, 당 대표자가 개인으로서 저지른 잘못이 있나 없나를 따지자는 검찰의 수사를 자신들 전체에 대한 탄압이라고 단정하고 괜한 비명을 저지르는 야권 인사들이 오로지 투생주의자, 투안주의자로만 보입니다. 썩은 나뭇잎 아래에 벌레처럼 죽은 듯 숨어 살아야 마땅할 조 아무개 씨 일가도 이름을 언급할 가치 없는 투생, 투안주의자 들입니다. 

지금 이 나라를 혼란과 분열에 빠뜨리고 있는 이 무리를 매일매일 내려다보고 계실 서울 광화문광장 이순신 장군이 칼을 잡은 손을 부르르 떨면서 “내 당장 저것들을!!”이라고 왜 소리치지 않으시나 모르겠습니다. 

/ 메타버스인문경영연구원장, 전 한국일보 경제부국장, 신문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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