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13) 미 "야당 탄압 중지하십시오" vs 박 "싫소".. 박대통령 최후의 면담
청와대-백악관 X파일(13) 미 "야당 탄압 중지하십시오" vs 박 "싫소".. 박대통령 최후의 면담
  • 특별취재팀
  • 승인 2018.06.24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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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취재팀] "대통령 각하. 야당 탄압을 중지하십시오. 현재처럼 계속 인권탄압을 하시다가는 미국내 친한파 의원들까지 모두 등을 돌리게 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헤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

"당신들도 잘 알지 않소.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북한과 마주하고 있는 대한민국이요. 우리나라의 특성상 정치적 인권은 어느 정도 제한할 수 밖에 없단 말이요." (박대통령)

1979년 10월 18일. 헤럴드 브라운 미 국방장관이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와 함께 청와대를 찾았다. 브라운 장관은 당초 카터 대통령의 서한을 전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방한했으나, 공교롭게 브라운 국방장관의 방한 시점에 ‘부마항쟁’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정치문제 전반으로 확대됐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이날 브라운 장관과 박대통령을 만나 대화한 내용을 18일 당일 국무부에 보고했다.

브라운 장관은 “한미의 안보 관계에 영향을 주도록 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 정부가 더 자유민주적인 추세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힘든 상황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종의 강압이었다.

글라이스틴 대사도 거들었다.

“한국과 친밀한 이들을 포함해 의회 의원들이 왜, 야당 지도자의 축출에 대해 격한 감정을 느끼는지 아셔야 합니다. 널리 퍼진 탄압에 대해 염려하는 의원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야당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대사는 “오늘 박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 하에 수감된 많은 사람들을 석방하기로 한 결정은 잘 하신 일”이라고 칭찬을 했다. 그것은 부산 계엄령의 부정적인 파장을 막겠다는 의도를 담은 칭찬이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종전의 입장을 되풀이 했다.

“현재 한국 내 문제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개인적이고 격식없는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소. 하지만 미국이 강한 성명과 함께 주한 미대사를 소환하는 것 같은 공적인 조치로 한국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면 그건 수용할 수 없소. 미국의 일련의 조치들은 야당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고 있소. 미국이 응원한다며 기가 살아서 정부에 더욱 극력적으로 반대한다는 말이요. 명백한 한국의 국내 문제를 미국이 간섭하는 것에 대해서는 국민들도 거부감이 크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소.”

박 대통령은 다만 최근 한국 정부의 조치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 미국 정부가 그에게 충분히 여유를 준다면, 극단적인 행동은 피하도록 할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이날 만남은 박 대통령과 미국 핵심 관료들간의 마지막 대화였다.

불과 일주일 뒤 박 대통령은 김재규가 쏜 총에 맞아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브라운 장관, 글라이스틴 대사가 청와대를 찾았던 당시 한국은 ‘부마항쟁’으로 나라가 최악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있었다. 부마항쟁은 대처방향을 둘러싸고 정권핵심부 내의 강-온 갈등을 증폭시켜 유신정권을 무너지게 한 방아쇠였다.

부마항쟁이란 1979년 10월 16일부터 20일까지 경상남도 부산과 마산 지역에서 일어난 반정부 항쟁 사건이다.

박정희 정부의 유신체제는 정치·사회적 갈등을 빚어오다가 1979년에 들어서며 한계 상황에 다다르게 됐다. ‘백두진 파동’과 박정희 대통령 취임 반대운동으로 시작된 1979년은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 체포,
고문, 연금 등 강압책이 잇따른 가운데서도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갔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사건’, ‘오원춘사건’에 이어 ‘YH무역노조 신민당사 농성’이 일어났고, 잇따라 김영삼(金泳三) 신민당 총재에 대한 총재직 정지 가처분과 의원직 박탈로 정국은 갈등으로 치달았다.

여기에 제2차 오일쇼크로 경제는 곤두박질쳤다. 당시 부산지역 부도율은 전국의 2.4배, 서울에 3배에 달했고, 수출증가율 역시 전국증가율인 18.4%에 훨씬 못 미치는 10.2%로 하락했다.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집중됐던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것은 이런 사회경제적인 모순과 연관되어 있었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아침 10시께,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시작됐다. 학생들은 애국가와 함께 ‘민주선언문’을 배포하며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쳤다.

학내 소요가 가두시위로 번지자 학생 수는 약 5,000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비슷한 시간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튿날인 17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격화되었다. 이날부터는 학생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했다. 학생과 시민들은 KBS부산방송국과 도청, 세무서, 파출소 등을 파괴하고, 일부 경찰차량과 보도기관의 취재차량도 파손했다.

셋째날인 18일엔 민주화운동이 마산으로 확산됐다. 학생과 시민들의 데모는 격화되어 파출소, 공화당사, 방송국, 신문사 유리창을 깨고 공화당사의 셔터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 서류와 집기를 밖으로 내던졌는가 하면 파출소로 뛰어 들어간 또 다른 청년들은 벽에 걸려 있던 박정희의 사진을 파손했다.

19일에는 더욱 치열해져 마산시내는 한때 무정부 상태가 되었다. 시내 곳곳에서 몽둥이를 들고 동사무소와 파출소로 몰려가 파괴하였고, 경찰차량에 불을 질렀다.

정부는 18일 새벽 0시를 기해 부산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특별수사부를 설치, 소탕작전에 들어가 132명을 검거하고 23명을 구속 처리했다.
계엄령이 선포된 부산 지역에는 공수부대가 동원되어 시위하는 시민과 학생에 대해 강도 높은 진압이 이뤄졌다.

부마항쟁 직후 10·26사건이 발발했고, 유신체제도 종언을 맞게 된다.
[특별취재팀= 최정미, 최석진, 이정우 기자]

 

 

■ MEETING WITH PRESIDENT PARK REGUARDING DOMESTIC POLITICAL CRISIS


SECRETARY BROWN AND I WERE MILDLY ENCOURAGED BY PRESIDENT PARK'S CALM REACTION DURING OUR PRIVATE MEETING ON KOREAN DOMESTIC POLITICAL SITUATION. AFTER HANDING HIM PRESIDENT CARTER'S LETTER AND REVIEWING ITS CONTENTS, SECRETARY BROWN NOTED IT WAS NOT OUR INTENTION TO ALLOW THE CURRENT SITUATION TO AFFECT OUR SECURITY TIES WITH THE ROK, BUT AS A PRACTICAL MATTER IT WOULD BE DIFFICULT FOR US IF THERE WERE NO RETURN TO THE MORE LIBERAL TREND ASSOCIATED WITH PRESIDENT CARTER'S VISIT TO KOREA. I EXPLAINED WHY MEMBERS OF CONGRESS, INCLUDING CLOSE FRIENDS OF THE ROK, FELT SO STRONGLY ABOUT EXPULSION OF THE OPPOSITION LEADER AND URGED THAT PARK TAKE ACTIONS WHICH WOULD REASSURE THOSE WHO FEARED A WIDESPREAD CRACKDOWN AND OPEN UP THE POSSIBILITY FOR COMPROMISE WITH THE OPPOSITION PARTY. WE COMPLIMENTED THE PRESIDENT ON THE DECISION TODAY TO RELEASE A NUMBER OF PEOPLE HELD UNDER EMERGENCY MEASURE 9 BECAUSE IT INDICATED AN INTENT TO LIMIT THE HARMFUL EFFECTS OF MARTIAL LAW IN THE CITY OF PUSAN.

THE BURDEN OF PRESIDENT PARK'S RESPONSE WAS THAT HE WAS PREPARED TO ACCEPT PRIVATE AND INFORMAL ADVICE FROM THE U.S. ON DOMESTIC KOREAN MATTERS, BUT COULD NOT DO SO IF THE U.S. PUBLICLY CRITICIZED HIS GOVERNMENT BY STRONG STATEMENTS AND PUBLIC ACTIONS SUCH AS CALLING ME BACK. HE SAID THAT OUR ACTIONS NOT ONLY EMBOLDENED THE OPPOSITION TO DEFY THE GOVERNMENT BUT ALSO THREATENED TO PROVOKE A POPULAR BACKLASH AGAINST THE U.S. FOR DICTATING TO KOREA ON OBVIOUSLY DOMESTIC MATTERS. AT THE SAME TIME, PARK ACKNOWLEDGED THAT RECENT GOVERNMENT MEASURES MIGHT HAVE BEEN TOO HARSH AND HE IMPLIED THAT IF WE GIVE HIM ENOUGH RUNNING ROOM HE WOULD TRY TO AVOID EXTREME ACTIONS. GLEYSTEEN

■ 한국 내 정치적 위기에 관한 박 대통령과의 면담
(1979년 10월 18일, 면담자: 헤럴드 브라운 국방장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

브라운 장관과 나는 한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비공개 면담이 이뤄지는 동안, 박 대통령의 차분한 반응에 약간 힘을 얻었다. 브라운 장관은 그에게 카터 대통령의 서한을 전달하고 그 내용을 검토한 뒤, 현 상황이 한미의 안보 관계에 영향을 주도록 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카터 대통령의 방한을 계기로 더 자유민주적인 추세로 돌아서지 않는다면, 현실적으로 우리에게 힘든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한국과 친밀한 이들을 포함해 의회 의원들이 왜, 야당 지도자의 축출에 대해 격한 감정을 느끼는지, 널리 퍼진 탄압에 대해 염려하는 의원들을 안심시킬 수 있는 행동을 하고 야당과 타협하는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고 박 대통령에게 강력하게 촉구하는지 설명했다. 우리는 오늘 박 대통령이 긴급조치 9호 하에 수감된 많은 사람들을 석방하기로 한 결정에 칭찬을 했는데, 그것은 부산 계엄령의 부정적인 파장을 막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박 대통령의 대답의 요지는, 현재 한국내 문제에 대해 미국으로부터 개인적이고 격식없는 충고를 받아들일 수 있지만, 미국이 강한 성명과 함께 주한 미대사를 소환하는 것 같은 공적인 조치로 한국 정부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면,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우리의 조치들이 야당이 대담하게 정부에 반대하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명백한 한국의 국내 문제를 미국이 간섭하는 것에 대한 대중의 반발을 유발시킨다고 말했다. 동시에 박 대통령은 최근 한국 정부의 조치가 너무 가혹하다는 것을 인정했고, 우리가 그에게 충분히 여유를 준다면, 극단적인 행동은 피하도록 할 것이라는 뜻을 내비쳤다. - 글라이스틴 (주한 미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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