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인류역사상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인 독재자는 누구였을까?
[WIKI 프리즘] 인류역사상 사람들을 가장 많이 죽인 독재자는 누구였을까?
  • 최정미 기자
  • 승인 2018.08.18 07:25
  • 수정 2018.07.09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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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에서 수없이 많은 지도자들이 한 시대를 풍미하다 사라지곤 했다.

지도자들 가운데는 성군(聖君)들 보다는 포악한 군주들이 많았다. ‘나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은 경우가 있었는가 하면 아주 끔찍한 결정을 내린 지도자도 있었다. 살육에 굶주렸거나 극단적인 전쟁광도 있었다.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 학살)’라는 말은 1943년 터키의 지도자 이스마일 엔베르에 의해 미국인들이 닥치는대로 살육당한 것을 지칭해 만들어졌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것을 규정짓는 특정 단어가 없었다.

20세기 이후 가장 끔찍한 집단 학살과 조직적인 살인, 봉쇄, 잔인한 전쟁을 벌였던 지도자들은 누구였을까.

한 인류학자는 “현 시대에도 중동과 한반도는 여전히 대량 살상의 위험지대에 놓여 있다”며 “인류의 미래를 위해 더 이상 대량 학살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20세기 이후 인류에게 엄청난 상처를 남긴 참혹한 학살의 현장과 독재자들이다.

10. 야쿠부 고원 (110만여명 사망)

분리 내전으로 인해 봉쇄되어 반대 편에 있던 100만명의 시민들과 10만여명의 군인들이 전사했다.

시작은 값비싼 석유였다. 동부 지역(오주쿠가 통치)과 나머지 지역(야쿠부가 통치) 간의 긴장이 이미 높아져 있던 나이저 삼각주에서 유전이 발견되었다.

둘은 ‘아부리 협정’이라고 하는 모의 협정을 맺었지만, 두 지도자에게 별 의미 없는 것이었다.

야쿠부는 이 지역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고, 이곳에서 오주쿠를 상대로 얼마나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 시험을 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오주쿠는 나이지리아의 나머지 지역으로부터 분리와 함께 ‘비아프라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로 인해 10만명의 군인들이 전사한 전쟁이 시작됐고, 이 지역의 봉쇄로 인해 100만명의 시민들이 기아로 사망했다.

9. 맹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40만~150만명 사망)

에티오피아의 대통령이자 공산주의 데르그(Derg) 군부의 대령이었던 멩기스투는 레드 테러(Red Terror) 운동으로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1974년부터 1991년까지 에티오피아를 이끈 정치인이다. 그는 모든 소문을 부인하고 있지만, 이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를 죽이고 권력을 잡았다. 그의 명성을 가장 떨치게 한 것은 공산주의 데르그 군부의 탄압 운동이었던 에티오피아 레드 테러이다.

멩기스투는 연설에서 ‘반혁명주의자들에게 죽음을! 에티오피아 인민혁명당에게 죽음을!’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는 피로 채워진 병 세 개를 바닥에 던져버렸다.

이는 ‘피의 잔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후 수년 간 수천명이 거리에서 죽었다.

살해의 상당수는 ‘케벌레(Kebeles)’라고 하는 마을 자치 감시 조직 때문이기도 했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도 모자라, 시신을 데려가려는 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이 세금에는 ‘낭비된 총알’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더 섬뜩한 최후는 야생 하이에나들이 시체들을 놓고 싸우는 길거리에 유기되는 것이다. 레드 테러 운동은 아프리카 최악의 대량 학살 중 하나로 기록됐다.

8. 김일성 (160만명 사망)

대중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던 김일성은 미국을 희생양으로 이용하고 사람들이 망상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김일성은 끔찍한 방법으로 북한을 통치했다. 그는 정부가 나라를 위한 모든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계획경제를 위해 분투했다.

여러 면에서 사람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였고, 그의 권력은 미약했다. 대부분의 미치광이들처럼 그는 다른 상대에게 비난을 돌렸고, 그의 경우는 바로 미국이었다. 그는 미국이 질병을 퍼뜨린다고 말을 했다.

스탈린의 지지를 얻은 그는 대규모의 숙청을 벌였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가 말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도록 사람들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김일성의 숙청은 재판이 없었다는 것이 스탈린의 것과는 달랐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점점 늘어가는 반대자들을 넣기 위한 수용소들이 전국에 우후죽순 생겨났다.

민족 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김일성.
민족 상잔의 비극을 일으킨 김일성.

7. 폴 포트 (170만명 사망)

폴 포트는 캄보디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는 국가 ‘청소’를 시도했고, 그 결과 170만에서 250만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그는 1970년대 후반에 ‘농업 집산화’라는 정책을 실행했다.

기본적으로 이는 도시민들을 강제로 농장으로 이주시켜 노동을 하게 하고, 반대로 농민들에게도 똑같이 하게 만든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어느 쪽에도 새 일을 잘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럼에도 폴은 국민들을 노예로 만드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또한 사람들을 잘 먹이지도 않았고, 의료 혜택도 거의 못 받게 했으며,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다. 폴 포트의 철권통치로 캄보디아 인구의 5분의 1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6. 이스마일 엔베르 파샤(250만명 사망)

미국인 120만명(1915년), 그리스 폰투스인 35만명과 아나톨리아인 48만명(1916-1922년), 아시리아인 50만명(1925-1920).

엔베르는 터키군의 장교이자 청년 터키당의 지도자로 이력을 시작했다. 세력을 키운 그는 발칸전쟁과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이끌었다.

엔베르는 전쟁 장관으로서 재능이 있지는 않았고, 계속해서 패배했다. 사리카미쉬 전투에서의 참담한 손실은 희생양을 필요로 했고, 그는 그 실패를 미국인들의 탓으로 돌리기로 결심했다.

이것이 ‘아메리칸 제노사이드(the Armenian Genocide, 미국인 대량학살)라고 알려진 것의 시작이었다.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이 사건을 묘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고대 그리스어로 ‘인종’, ‘종족’을 뜻하는 ‘geno-‘와 라틴어로 ‘살인’을 뜻하는 ‘-cide’에서 파생된 말이다.

5. 히데키 도조 (500만명 사망)

히데키 도조는 일본의 장군이었다. 그는 총리가 됐고, 육군 장관을 겸임했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은 듯 내무부 장관, 외교부 장관, 교육부 장관, 상무 장관 같은 다른 주요 요직도 맡았다. 교육에 있어 그의 큰 공헌은 군국주의와 민족주의의 주입이었다.

그의 관점에서의 국가 안보는 근본적으로 순수 혈통의 일본 가문과 혼혈을 차별하는 우생학적 조치에 찬동하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때 도조는 전투에서 이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대중들은 그를 좋아했다. 그는 나치의 원조를 믿었고, 확고하게 독일의 편에 섰다.

형세는 바뀌었고, 그는 패배하기 시작했으며, 엄청나게 파괴적인 손실을 가져왔다. 결국 그는 은둔에 들어갔다. 그는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고, 침략 전쟁과 국제법을 위반한 전쟁, 많은 국가들을 상대로 정당성 없는 전쟁을 일으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500만명을 희생시킨 히데키 도조.

4. 벨기에의 레오폴트 2세(500만-1500만명 사망)

벨기에의 왕이었던 레오폴트 2세는 식민주의를 신봉했다. 그는 위대한 나라는 해외 식민지를 획득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고, 늘 이에 대한 계책을 꾸몄다. 벨기에는 여기에 관심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고, 그래서 레오폴트가 개인적으로 그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국제아프리카협회’라고 불리는 좋은 일을 할 것 같아 보이는 이름의 회사로 시작했다. 1년 뒤, 그는 콩고로 가기 위해 이 회사를 이용했고, 벨기에의 14배나 되는 땅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여기에 14개 국가들(미국 포함)이 동의했고, 그는 개인 군대를 이용해 마음껏 통치했다. 그리고나서 원주민들을 강제 노동에 내몰아, 고무산업을 활성화시켰고, 노동자들을 지독하게 학대했다.

콩고에서 돌아온 선교사, 존 해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인송고음보요 마을의 여행에서 이제 막 돌아왔다. 비참함과 무지막지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사망자 수는 500만에서 1500만명으로 추정되는데, 14개국이 그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이다.

3. 아돌프 히틀러 (1,700만명 사망)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도자였다. 그는 1934년에서 1945년까지 독일의 독재자였다.

그는 독일 민족주의와 반유대주의 같은 가치관을 고양시킴으로써 지지를 얻었다. 히틀러가 1933년에 수상으로 지명되면서, 제3제국이 시작됐다.

히틀러는 지독히도 권력에 굶주렸고, 유대인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을 아주 싫어했으며, 유럽에서의 패권을 원했다. 이 고상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군국주의화는 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이끌었다.

나치 세력은 1,700만명이나 되는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하는 행태를 벌였다. 이들 중 약 600만명이 유대인들이었고, 150만명이 집시들이었다.

2. 이오시프 스탈린 (2300만명 사망)

이오시프 스탈린은 1922년부터 1953년까지 공산당 제1서기였다.

1924년 레닌의 사망 이후 그는 소련의 수장이 되었다. 스탈린은 오래지 않아 새 경제 정책을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국가 전역에 걸쳐 식량 생산이 망해버렸고, 대기근이 발생할 정도로 악화됐다. 1922년과 1923년 사이 모든 것이 대규모로 파멸됐다.

우크라이나에서 이 암흑기는 ‘홀로도모르(Holodomor, 우크라이나 대학살)’로 알려져 있다.

이곳의 기근은 소련의 정책으로 발생한 것이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고안된 것이라고 널리 인식됐다.

우크라이나의 사망자수는 260만명에서 1,0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은 ‘대숙청(Great Purge)’ 또는 ‘대테러(Great Terror)’)이라는 또 다른 계획을 시행했다. 이것은 그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대대적으로 죽이기 위한 피해망상적인 운동으로 그의 목표물들은 처형을 당하곤 했다.

1939년 스탈린은 나치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결국 독일은 이 조약을 위반했고, 소련은 연합군에 합류했다. 그리고 2,400만명의 전사자들을 낳았다. 이는 2차 세계대전 사상 최대의 사망자 수로 기록됐다.

스탈린(왼쪽)과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왼쪽)과 아돌프 히틀러.

1. 마오쩌둥(4,900만~7,800만명 사망)

마오쩌둥은 중국의 혁명가이자 정치이론가,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이끄는 공산당 지도자였다.

마오쩌둥은 논란이 많은 가운데 여전히 중국의 구세주로 널리 인식돼 있다.

중국에서는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이 대부분 좋은 일을 했다고 여긴다.

그가 1949년에서 1953년 집권 첫 5년 동안 사형선고 또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냄으로써 400만에서 600만명의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살해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대규모 탄압을 조직했고, 처형 할당치까지 만들었으며, 초기의 그런 행위들을 중화인민공화국의 힘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변호했다. 의 사회 프로그램인 대약진정책과 문화대혁명은 가장 악명높은 계획으로 손꼽힌다.

대약진정책은 중국을 빠르게 산업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가 집중한 것은 중국을 최고의 강철 수출국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이들에게 이를 이룰 것을 청했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뒷마당에 제련소를 만든 것이었다. 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집 안팎의 물건들, 심지어 조리 기구에서도 철을 뽑아냈다.

음식을 만들 도구가 없을 뿐더러, 철에서 수입이 생기지도 않았고, 생계를 위한 돈이 없어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었다. 이 정책만으로 약 2천만명이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최악의 결정이 있은 후 권력을 잡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정권을 내주었다.

과도 기간 동안 마오쩌둥은 사회주의 교육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장차 구세대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올 청년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1964년 이 운동은 ‘4청운동(四清運動, Four Cleanups Movement)으로 이름이 바뀌고, 소위 반동분자들의 정치와 경제, 사상, 조직을 청소하는 것을 목표로 하게 된다.

이로 인해 지식인들을 처단하고 마오쩌둥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홍위병(紅衛兵)이 조직됐다. 문화대혁명의 그 최우선 사명은 오래된 관습과 문화, 습관, 사상들을 폐기하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이 강력하게 신봉한 것은 파괴와 혼돈이 재탄생을 낳는다는 것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오쩌둥.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마오쩌둥.

그래서 그는 추종자들에게 건물과 신성물들을 파괴하고, 연장자들과 대립하고, 그들을 처벌하고, 고발하며,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은 죽이라고 말했다.

1968년, 사태는 다시 마오쩌둥에게 긍정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그는 10년 기간의 하향운동(下鄉運動)을 실행했는데, 이는 젊은 지식인들을 강제로 농촌으로 보내 농사를 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몰아낸 사람들은 그가 권력을 잡도록 도와준 홍위병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사망자는 4만명에서 700만명까지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백화운동(百花運動)이 있다.

마오쩌둥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중국을 통치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 달라고 했다. 지식인들과 진보주의자들은 너도나도 그에게 생각을 말하려고 했고, 공산당은 이를 장려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는지, 반대자들을 향한 교묘한 술책이었는지, 중국 정부는 위험한 사상을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50만명을 탄압했다.

마오쩌둥은 과격한 조치를 내리면서 은연 중에 사람들의 마음을 이끄는 사람이었다. 1949년부터 1976년까지 그의 정책과 숙청으로 인해 4,900만에서 7,80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위키리크스한국=최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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