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르완다 대량학살(상) 세계가 눈감은 현대판 홀로코스트
[WIKI 프리즘] 르완다 대량학살(상) 세계가 눈감은 현대판 홀로코스트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8.11.07 07:28
  • 수정 2019.02.23 0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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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난민들. [ATI 캡쳐]
르완다 난민들. [ATI 캡쳐]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 또는 ‘아무렇지도 않은 악’은 독일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1963년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이러한 평범한 악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악은 때로는 이념의 들뜬 너울을 쓰기도 하고, 종교의 거룩한 옷을 입기도 한다. 민족과 인종이라는 명분을 내세우기도 하며 정치라는 선동자를 앞세우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평범한 악이 집단성을 띠게 되면 대개 집단적 광기를 동반하게 된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 발칸반도의 민족분쟁, 유럽의 신구교간의 대립과 종교전쟁, 미국의 남북전쟁, 소련의 혁명·반혁명파 사이의 전쟁, 한반도의 이념전쟁 등 인류 역사 속에서 악이 명분을 뒤집어쓰고 집단적으로 평범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게 저질러졌던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러한 역사 속의 평범한 악은 광신자나 어마어마한 범죄자들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이 아니라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한나 아렌트는 주장한 바 있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한 '평범한 악'이 최근세에 다시 한 번 위력을 떨쳤다. 바로 르완다의 인종 대량학살 사건이었다. 

르완다 대량학살의 약 100일 간의 기록과 그 이후 치유 과정을 2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주]

1994년 100일 동안, 르완다 투치족을 향한 후트족의 대량학살극은 약 8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때 세계는 이 학살극을 그냥 지켜만 보았다.

중앙아프리카의 국가 르완다에서 벌어진 대량학살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첫 번째는 어마어마한 사상자 숫자이며, 두 번째는 그 학살극의 참혹함이었다.

약 80만명의 남자들, 여자들, 어린아이들이 마셰티로 가격당하거나, 둔탁한 흉기로 머리를 강타당하거나 불태워져 죽었다. 어떤 조사에선 100만명이 넘는다는 주장도 있다. 마셰티는 정글 등지에서 사용되는 날이 넓고 무거운 칼로, 무기로 활용되기도 한다.

르완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사망자들이 마지막 순간의 참혹한 모습을 드러내며 학살 현장에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대로 부패했다.

3개월여의 기간 동안 매 시간마다 거의 300명에 달하는 르완다 사람들이 다른 르완다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서로 죽고 죽인 사람들 중에는 친구도 있었고, 이웃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가족 간에 살인이 저질러지기도 했다.

그리고 르완다 전 국토가 가공할 유혈극으로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는데 나머지 세계는 팔짱만 낀 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어떤 나라는 르완다의 인종 학살극을 그나마 서글픈 심정으로, 그보다 더 나쁜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눈을 감은 채 바라만 보았다. 어떤 측면에서는 이러한 무관심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의 씨앗

르완다 인종학살의 씨앗은 1890년 독일 식민주의자들이 이 나라를 점령했을 때 뿌려졌다.

그리고 1916년 벨기에 식민주의자들이 르완다를 차지했고, 이때 벨기에 사람들은 르완다 사람들에게 출신 인종이 표시된 인식표를 차고 다니도록 강요했다. 대부분의 르완다 사람들은 후트족 아니면 투치족이었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인식표를 지니고 다녀야했다. 이 인식표는 르완다 사람들의 의식에 지속적으로 ‘편 가름’의 역할을 했다.

인종을 구분하는 ‘후트’나 ‘투치’라는 용어는 유럽 사람들이 당도하기 오래 전부터 사용되었지만 정확한 기원은 불분명하다. 많은 사람들은, 수천 년 전에 후트족이 르완다 지역에 먼저 도착해서 농경생활을 시작했고, 이후 투치족이 수백 년 전에 유입되어(에티오피아에서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됨) 주로 목축업을 영위하기 시작했다고 믿는다.

곧 이어서 경제적인 차이가 발생했다. 인구수에서 소수를 차지하는 투치족이 부와 권력을 누리게 되었고, 다수를 차지하는 후트족은 농경생활을 유지하며 근근이 살아가야했다. 그리고 벨기에 식민통치주의자들은 투치족 엘리트들을 편애했다. 권력과 영향력이 큰 자리에 투치족을 기용했다.

식민통치가 시작되기 전에는 후트족도 열심히 노력하면 엘리트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벨기에 사람들의 지배를 받으면서는 후트족과 투치족은 완전히 별개의 인종이 되어버렸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살갗에 새긴 인종의 표식과도 같았다.

인식표가 도입되고 26년의 세월이 흐른 1959년, 후트족은 무장 봉기를 일으켜서 수십만 명의 투치족을 나라에서 몰아냈다.

얼마 되지 않아 1962년 벨기에 사람들이 물러가고 르완다에는 독립이 찾아왔다. 그러나 상처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골이 깊어졌다. 후트족이 권력을 잡게 된 르완다는 인종간의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양측은 서로 노려보며 상대방이 공격해오기만을 기다렸다.

강제로 쫓겨나야했던 투치족은 여러 차례 복귀를 시도했다. 그중 가장 큰 사건은 1990년 일어난 ‘르완다 애국전선(RPF)’에 의한 탈환작전이었다. 폴 카가메가 이끄는 투치족 민병대는 투치족 망명자들로 구성된 반정부세력이었다. 이들이 정부에 원한을 품고 우간다로부터 르완다로 쳐들어왔다. 이어지는 내전은, 후트족 출신의 르완다 대통령 쥬비널 하비야리마나가 대표성을 지닌 투치족 반대파와 권력 분권에 합의한 1993년까지 지속되었다. 하지만 평화는 그리 길지 않았다.

1994년 4월 6일, 하비야리마나 대통령을 태운 비행기가 지대공 미사일을 맞고 공중에서 폭파되었다.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르완다 애국전선(RPF)’을 범인으로 지목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누가 대통령의 비행기를 향해 미사일을 날렸는지는 지금까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후트족은 복수를 맹세했다. 폴 카가메나 그의 동료들이 무고함을 주장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분노에 찬 목소리들이 라디오에 들끓으며, 모든 후트족은 아무 무기나 잡고 투치족에게 피의 대가를 받아야한다고 선동했다.

“이제 우리들의 임무에 착수해야 한다.”

후트족 중위 한 명은 분노한 후트족 폭도들을 향해 이렇게 외쳤다.

“한 명도 살려두지 마라. 어린 아이일지라도 모두 죽여라!”

▶르완다 대량살육의 시작

대통령의 비행기가 피격되고 한 시간이 되지 않아서 르완다의 인종살육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학살극은 이후 100일이 지나서도 멈추지 않았다.

후트족 극단주의자들이 수도 키갈리를 재빠르게 손에 넣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사악한 선전선동을 시작했다. 전국에 걸쳐 후트족 과격파들이 들고일어나 이웃의 투치족, 친구인 투치족, 가족 내의 투지족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도록 부추겼다.

투치족들은 정부가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없음을 금세 간파했다. 한 지역의 시장은 시민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애원했다.
“여러분들은 집으로 돌아가면 살해당할 것입니다. 숲속으로 도망가면 역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기 머물러도 죽기는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저는 시청 건물이 피로 얼굴지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때까지도 르완다 국민들은 인종을 구분하는 인식표를 지니고 다녔다. 이 식민지 시대의 잔재(殘滓)로 인해 학살은 더 쉽게 일어났다. 후트족 민병대는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통과하는 모든 사람의 인식표를 검문한 후 ‘투치’라고 표시된 사람이면 누구나 마셰티로 내리쳐 잔인하게 살해했다.

투치족은 자신들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던 교회 같은 성스러운 장소에서도 학살당했다. 비교적 온건했던 후트족까지 잔인함에 동참하지 않았다고 살해당했다.

“대량살육에 동참하거나, 스스로 대량살육의 희생자가 되거나, 둘 중의 하나 밖에 길이 없었습니다.”
생존자 한 사람은 이렇게 증언했다.

(하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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