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대량학살(하) 끔찍한 엔타라마교회에서의 대참사 .. UN의 침묵 지속되는 논란
르완다 대량학살(하) 끔찍한 엔타라마교회에서의 대참사 .. UN의 침묵 지속되는 논란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8.11.08 07:40
  • 수정 2019.02.24 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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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완다 학살 기간 중 식량이 떨어져 쌀 배급 중 참사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 캡쳐]
르완다 학살 기간 중 식량이 떨어져 쌀 배급 중 참사가 종종 발생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 캡쳐]

학살극에서 살아남은 프랜신 니이테게카는 인종 학살이 벌어진 이후 그녀와 가족들이 교회라면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엔타라마에 있는 교회로 피신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들은 그때까지 교회에서 학살극이 자행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와 가족들의 믿음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엔타라마 교회에서의 학살극은 전체 대량학살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학살극의 현장으로 기록되었다.

1994년 4월 15일 후투족 민병대원들이 교회 문을 박차고 들이닥쳐서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을 향해 마셰티를 휘둘렀다. 니이테게카는 그들 민병대원들이 처음 들어선 순간을 너무나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학살극이 너무도 끔찍해서 그녀는 개별적 죽음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민병대원들의 극한적 학살행위에 스러져간 많은 이웃들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또 다른 생존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자기는 임신 중이니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이웃집 여성을 떠올렸다. 민병대원들은 그녀를 살려주는 대신 단칼에 배를 갈라버렸다.

엔타라마 교회의 학살극 끝에 약 2만 명의 투치족과 비교적 온건했던 후트족들이 살해되었다. 시신들은 수습되지 않고 학살 현장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학살이 자행되고 나서 몇 달 후 사진작가인 데이비드 구텐펠더가 촬영을 위해 엔타라마 교회를 찾았을 때 그는 교회의 신도 좌석들 사이에 시신들이 서너 구씩 서로 포개져서 작은 산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좌석 위나 좌석 사이를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방치되어있었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한때 함께 지냈던 동료나 친구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불과 몇 달만에 르완다의 대량학살은 이런 식의 참극을 만들어냈다. 결국 50만 명에서 1백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여기에 말 못하는 수십만에 달하는 강간 피해자들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국제사회의 대응

수십만 명의 르완다 국민들이 자신들의 친구들이나 이웃들에 의해 학살당하고 있었지만 나머지 국제사회는 그들의 아픔에 대부분 침묵했다. 학살자들의 상당수는 인테라함웨나 임퓨자무감브처럼 정부나 군대의 지원을 받는 민병대들로 구성되었다.

르완다 대량학살 기간 동안 UN이 취한 행동은 지금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나 UN이 대량학살이 임박했다는 사전 정보를 UN 직원들을 통해 미리 입수했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UN이 1993년 평화유지 임무를 전개했다고는 하지만 평화유지군들은 무력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다. 1994년 봄 폭력이 본격적으로 고개를 들고, 최초의 공격으로 10명의 벨기에 사람들이 살해당했을 때도 오히려 UN은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결정했었다.

개별적인 국가들도 르완다의 분쟁에 끼어들기를 꺼려했다.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에서의 악몽 때문에 개입을 주저하고 있었다. 미국은 1993년 소말리아에서 UN 평화유지군과 함께 벌인 작전에서 18명의 미군과 수백 명의 시민들의 목숨을 잃은 아픈 기억을 지니고 있었다.

르완다의 이전 식민통치자였던 벨기에는 대량학살 초기에 10명의 자국 군인들이 목숨을 잃자마자 그 즉시 모든 군대를 철수시켜버렸다. 유럽 군대의 철수는 르완다 극단주의자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줄 뿐이었다.

르완다에 주둔했던 벨기에 부대의 지휘관은 나중에 이렇게 시인했다.

“우리는 무슨 일이 발생할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임무는 너무도 비참한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를 책임의 방기(放棄)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의 철수는 비겁한 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UN 평화유지군의 보호 하에 수도인 키갈리의 어느 학교에 피신 중이던 약 2000명의 투치족들은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으로 믿었던 마지막 보루가 그들은 버리고 떠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한 생존자는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UN군이 떠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를 버리지 말라고 울며 매달렸어요. 어떤 사람들은 벨기에 사람들에게 차라리 총으로 쏴달라고 간청하기까지 했어요. 총 맞아 죽는 것이 마셰티로 살해당하는 것보다 편안했거든요.”

하지만 UN의 군인들은 철수를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군인들이 떠나고 나서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보호를 간청하던 2000명 르완다 인들 대부분이 죽었다.

마침내 프랑스가 1994년 6월 르완다에 군대를 파병하겠다는 요청을 UN에 하고 승인을 받았다. 프랑스 군인들이 설정한 안전지대 덕택으로 수천 명의 투치족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군들은 후투족 범죄자들이 국경을 벗어나 탈출하도록 묵인했다.

▶학살 뒤에 찾아온 용서와 화해

르완다의 폭력은 1994년 7월 투치족 ‘르완다 애국전선(RPF)’이 후트족으로부터 통치권을 간신히 탈환하고 나서 종식되었다. 불과 3개월에 걸친 분쟁 기간 동안 거의 1백만 명의 르완다 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들 대부분은 후트족 극단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잃은 투치족들과 후트족 온건주의자들이었다.

대량학살 극의 말미에 다시 한 번 권력을 쥐게 된 투치족의 복수가 두려웠던 후트족들은 2백만 명이 넘게 르완다를 탈출해 탄자니아나 자이레(지금의 콩고)에 있는 난민캠프에 몸을 의탁했다. 학살극의 주범들 중 상당수는 르완다를 무사히 빠져나간 상태로,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책임자들 중 일부는 영원히 법의 심판대에 서지 않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에 피를 묻혔다. 학살극에 동참한 모든 후트족들을 감옥으로 보낼 수는 없다. 대신에 르완다 사람들은 학살의 아픔을 지닌 채 가족을 살해한 사람들과 함께 사는 길을 모색해야한다.

많은 르완다 사람들은 ‘가차차(Gacaca) 재판’ 이라고 불리는 르완다만의 독특한 관습을 따른다. ‘가차차’는 지역사회에 근거한 재판 관습이다. 대량학살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가차차’를 통해 희생자 가족들을 마주 대하고 용서를 구해야한다.

일부 사람들은 ‘가차차’를 르완다가 과거의 상처에만 머물지 않고 앞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하는 성공적인 제도라고 칭송한다.

“사법 제도는 만족스러운 답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용서를 기꺼이 베풀 수 있다면 영원한 만족도 가능합니다. 분노로 가득 차있을 때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지만, 용서를 베풀면 마음의 평화도 함께 찾아옵니다.”

이어지는 몇 년 동안 르완다 정부는 약 3000명의 가해자들을 기소했고, 국제사법재판소도 경증의 가해자들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이런 류의 범죄는 그 정도가 너무나 광범위해서 가해자 모두를 처벌할 수 없음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르완다의 국가적 힐링

대량학살 이후 들어선 정부는 학살극의 원인을 제거하는 데 재빠르게 착수했다. 후트족과 투치족 사이의 긴장은 여전하지만 정부는 르완다에서 인종 차이를 공식적으로 근절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정부에서 발급하는 신분증에는 이제 인종 표시가 사라졌으며, 인종 문제를 공격적으로 거론하면 징역을 살 수도 있다.

그리고 르완다 정부는 과거 식민지 시절의 유산을 끊기 위해 학교에서 사용하는 공용어를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바꾸고 2009년 영연방에 가입했다. 외국 원조 덕택으로 르완다의 경제는 대량학살 사태 이후 10년 동안 세 배에 달하는 성장을 이룩했다. 오늘날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정치·경제적으로 가장 안정적인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대량학살 기간 동안 너무 많은 남자들이 죽어서 현재 인구의 70%가 여성이다. 이러한 인구 구조 때문에 폴 카가메 현임 대통령은 르완다 여성들을 위한 정책을 폭넓게 실시해서, 오늘날 르완다는 세계에서 가장 성차별이 적은 국가로 칭송받는 예기치 못한 결과까지 낳고 있다.

24년 전에는 가공할 학살 현장이었던 국가가 오늘날에는 미국무부의 여행 권유국 1순위 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안전도에서 덴마크나 독일보다 높은 순위를 받는 여행국이 된 것이다.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이룩한 이러한 괄목할 진보에도 불구하고 대량학살의 잔혹한 유산은 (2004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 ‘호텔 르완다’에서 볼 수 있듯이) 완전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시신들의 대량 매장지가 보통 집들 아래에서 아직도 드러나고 있으며, 엔타라마 교회의 학살극 같은 참혹한 기억들은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폭력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손쉽게 재발될 수 있는지를 아프게 상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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