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45) "씻어낼 수 없는 분노가 그곳에..." 광주민주화운동 잔혹한 학살과 확산된 반미주의
청와대-백악관 X파일(45) "씻어낼 수 없는 분노가 그곳에..." 광주민주화운동 잔혹한 학살과 확산된 반미주의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19-01-29 15:4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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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신군부가 만행을 일삼는 동안 미국의 대처 방식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돼왔다.    

미국의 외교 씽크탱크 중 하나인 Association for Diplomatic Studies and Traning(ADST: 미국외교연구훈련협회)는 미국의 외교 역사적 차원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과정과, 당시 미국이 이상적으로 대응했는지 입체적으로 진단했다.
 
다음은 ADST가 미국 외교역사의 순간(Moments in U. S. Diplomatic History) 섹션에서 진단한 ‘광주 학살과 미국의 외교 대처 상황’이다.

박정희의 암살로 그의 18년 간의 독재통치가 끝난 후(1979년), 정치적 불안정이 야기되면서 민주화 운동이 한국에 확산됐다.

1979년 12월 전두환 장군이 쿠데타로 새로이 대통령의 권력을 잡은데 이어 늘어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계엄령을 확대시켰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학생 시위가 폭력적인 군사 대응에 맞서고, 수백명의 사상자와 실종자들이 나오며 진압의 규모는 극에 달했다.

광주 학살 또는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사건의 후폭풍으로 반미 정서가 일어났다.

한국군과 미국의 친밀한 관계와 미국이 연루되었음을 시사하는 한국 정부의 진술 때문에, 많은 한국인들이 폭력적인 시위 진압에 워싱턴이 어느 정도 관여했다고 믿었고, 이는 이후 수년 동안의 미국에 대한 지속적인 불신과 의혹을 이끌었다.

1996년, 전두환은 결국 광주 학살에 대한 책임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후에 김영삼 대통령이 당시 대통령 당선자인 김대중의 조언으로 사면을 시켜줬다. 20년 전, 전두환 행정부는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한 바가 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연합뉴스]
5.18광주민주화운동 [연합뉴스]

미 국무부 한국 담당관이자 훗날 주한 미 대사관에서 정치 고문을 맡은 데이비드 블레이크모어가 더 커진 시위와 잔혹한 탄압, 그리고 미국 연루에 대한 오해를 되짚어 보았다. 1997년, 찰스 스튜어트 케네디가 그를 인터뷰했다.

1980년대 후반 한국 공보관이었던 존 레이드는 2002년 찰스 비첨과의 인터뷰에서 국무부가 1989년에 이 사건에 대한 의견을 서술하는 백서를 내면서 얼마나 미국의 행동에 대한 비판을 전환시키려고 노력했는지를 설명한다.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 대사를 역임한 도널드 그레그는 2004년 찰스 스튜어트 케네디와의 인터뷰에서 광주를 방문해 어떻게 사람들의 우려와 질문에 대해 고심했는지를 설명한다.

1990년대 주한 미 대사로 있던 제임스 레이니는 2004년 데이비드 루터와의 인터뷰에서 국무부의 백서를 비판하고, 광주를 방문하는 동안 한국 언론과의 사이에서 있던 어려움과 완전히 날조된 언론 인터뷰에 대해 논한다.

▣ 광주항쟁과 미국의 공모 책임 (데이비드 블레이크모어, 전 국무부 한국담당관)

<데이비드 블레이크모어는 국무부 한국담당관(1977-1980), 주한 정치 고문(1980-1983)을 지냈다.>

1980년 5월, 전라남도에 위치한 남서부의 대도시 광주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젊은이들의 시위로 시작됐고, 그 지역의 주둔군이 외곽으로 밀려났다. 이들은 물리적으로 밀려난 게 아니라 철수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 것인데, 이후 며칠 동안 교착상태가 뒤따랐다. 얼마나 오래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때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희생 없이 이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뭘 해야 하는지 파악하기 위해 몹시 노력했다. 내 기억으로 글라이스틴(주한 미 대사)은 전투지는 고사하고 광주를 향한 황당한 군사 대응을 미국 대중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 위험성을 전두환에게 이야기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다.

결국 그의 노력은 소용이 없었다. 전두환의 군사학교 동기들 중 특전사 사령관이었던 이가 특전사를 광주로 보냈고, 이들이 광주를 무력으로 탈환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얼마나 ‘많은’ 것인지 공식적인 수치는 한국 정부의 조사에서 200명 남짓으로 집계됐다. 야당은 1,000명이 넘는 것으로 확신했다.

그곳에 있던 외국인 선교단의 목격자 보고들도 많이 있었다. 실로 엉망이었다.

한국 사람이 한국 사람을 죽이는, 군인이 비무장 민간인을 죽이는 추악하고, 끔찍한 상황이었다. 광주 시민들은 무기고에서 총기들을 취했지만, 특전사들을 향해 진군하지는 않았다.

한국이 광주 사태에서 회복되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특히 희생자들이 오랜 차별의 역사를 가진 지역의 사람들이기 때문인데, 세계 어느 곳에나 있어온 것처럼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차별이다. 전라도 사람들을 만나면, 그들을 차별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관점에서 광주 사태로부터 떨어진 최악의 불똥은 한국에 널리 퍼진 (미국에 대한) 오해였다. 북한 공격 시처럼 광주 사태와 같은 내란에도 한국군은 반드시 미군 사령관들의 작전 지휘 하에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미국 사령관은 마음 먹으면 한국군의 광주 진군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한국민의 시각에서) 그를 막지 않는 것은 전두환과 그의 출세, 대통령직을 향한 진군에 미국 정부가 공모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여기에는 우리가 무너뜨리는데 동조한 지역 민주주의의 문제도 있는데, 이는 전라도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거대한 음모론이 여전히 한국에서 널리 인식돼 있다. 물론 한국 정부가 유연해진 이후로 상처가 많이 줄어들었다. 우리는 한국 내 문제에 있어 결코 한국군을 미군 사령부 휘하에 두지 않았다고, 게다가 심지어 한반도 전시 상황인데도 그 모든 만행을 저지른 특전사도 미군 사령부 하에 있지 않았다고 해명하려고 하는 기이한 일에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한국민들은) 그러나 아무도 해명을 듣고 싶어하지 않았다.

우리는 거듭 말했지만, 달라진 게 없었다. 광주 사태는 미국에 대한 한국 대중의 인식에 큰 손상을 줬다. 그 상처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랫동안 현안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 미국이 공식적으로 대응하다(존 M 레이드, 전 한국대사관 공보관)

<존 레이드는 1986~1990년 주한미국대사관 한국 공보관을 지냈다.>

1980년, 전두환은 불법 쿠데타를 강화하는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을 한국 중앙정보부의 국장 대리로 선포했고, 이는 서울과 광주 그 밖의 한국 곳곳에 시위를 촉발시켰다.

전두환은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는 더 많은 시위를 일으켰으며 광주에는 군대가 진입해 사람들이 다치거나 사망했다. 이에 과격한 대응이 있었는데, 수십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광주 거리로 나가 라디오 방송국을 불태우고, 무기와 군수품들을 장악했다.

경찰이 시위대의 편에 선 뒤, 군대는 철수했다. 그리고 다른 부대가 다시 들어왔고, 아주 잔인하게 탄압했다.

유혈이 낭자하는 끔찍한 일이었으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누가 실종됐는지 각종 주장들이 나오는 가운데, 사상자는 최소 수백명에 이르렀다.

우리의 문제는 군대가 다시 광주로 들어가기 전에, 한국 정부가 미 대사 글라이스틴과 사령관 존 위컴에게 특전사를 광주로 이동시킬 수 있도록 허가를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글라이스틴은 동의했거나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한국군이 이용한 특전사는 위컴의 지휘 하에 있지 않았고, 우리의 승인이나 동의와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살인을 포함한 당시 일어난 일들에 대해 우리가 승인한 것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수단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은 우리에게 누명을 씌웠고, 우리는 그걸 떨쳐낼 수가 없었다. 광주 사태는 미국에 대한 급진적인 비판에 있어 중요성을 띠어 왔다.

몇 달 동안 린은 광주 사태에 대해 우리의 관점에서 최종적인 공식 해석을 내기 위해 미 국무부 역사 부서와 일을 했다. 공개된 국무부의 여러 원고들을 검토했는데, 린이 그 작업을 한 것이었다.

그의 문서는 아주 상세하고 관련 증거가 많았다. 미 공보원은 한국어 번역을 준비했고, 번역가들은 비밀유지를 맹세했다. 1989년 6월 19일 우리가 최종적으로 공개했을 때, 이것은 국무부의 폭탄선언이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를 한국 언론에 배포했고, 대학 신문에 게재하도록 하고, 우리의 정기 수신인들 모두에게 보내는등 가능한 모든 사람들에게 전했다. 한국 신문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인용했고, 김대중은 이것을 재발행해 당원들에게 배포했다.

주한 미 대사 릴리는 계속 우리의 일을 승인하고 독려했다.

미국을 향했던 한국인들의 분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는데 이 성명서가 큰 요인이 되면서, 전두환과 그의 측근들은 아주 불쾌했을 것이다. 전두환과 릴리의 사이가 아주 좋지는 않았는데, 이 일로 더 나빠진 건 확실하다.
 
한국에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노년층과 아주 급진적인 젊은층 사이에 큰 세대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모두가 전두환 체제에 환멸과 불만족을 느끼고, 억울함과 분노가 만연해 있었다.

나이가 더 많고 생각이 깊은 한국인들은 우리가 한국 정부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을 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전두환과 그의 측근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정치적 변화를 몰고 온 것 같다.

이후 벌어진 일들은 아주 고무적이었다. 한국에 선거로 선출된 대통령이 나왔고, 몇 번의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 있어왔다. 또 전 대통령이 부패로 수감돼 있는 유일한 아시아 국가로 볼 수 있다.

한때, 나는 릴리가 큰 규모의 한국 기자단과 공식회견을 갖도록 주선하고 있었다. 우리는 질문과 답변을 검토하며 이를 준비하느라 며칠을 보냈다. 약속된 그 날에 나는 미 대사관 앞에서 기자들을 만났고, 꼭대기 층에 있는 대사 집무실 밖의 회견실로 안내했다.

그들은 경외심을 갖고있던 것 같았다. 우리는 탁자에 둘러앉았고, 기자들이 질문했다. 질문은 한국어로 이뤄졌고, 바로 통역이 이어졌다. 질문은 거침없고 직설적이었지만, 릴리는 훌륭하게 대응했다.

우리가 자리를 뜰 때, 한 한국인 기자가 내게 ‘한국 정부 관료는 우리와 이렇게 함께 앉아서 대화를 하는 일이 없다’라고 말했다.

5.18광주민주화운동 [연합뉴스]
[연합뉴스]

▣ 완전히 씻어낼 수 없는 분노가 그곳에 있었다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대사)

<도널드 그레그는 1989~1993년 주한 미국대사를 지냈다. 다음은 ‘한국에서 반미주의가 일어나는 것을 알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변이다>

나는 3년 반 동안 대학 교정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자주 초청을 받았고, 늘 수락했지만, 내가 가면 학생 운동가들이 ‘그레그를 들여보내면, 학교를 불태울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초대는 취소됐다. 나는 서강대학교로부터 명예학위를 받았는데, 이들은 성탄절 휴일 밤에 내게 수여했다. 대사관 앞에서는 여전히 폭동이 자주 일어나고 있었다. 완전히 씻어낼 수 없는 근본적인 분노가 모두 그곳에 있었다.

우리가 잔혹한 진압을 지지했다는 광주 사람들의 생각 때문에 나는 반미 감정이 극도로 컸던 광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엄청난 일이었고, 논란이 많았다. 김대중은 가려면 대학이 문을 닫는 겨울방학에 가라고 했고, 나는 1990년 1월에 가는 것으로 계획했다. 출발 전날, 김대중은 나를 불러 ‘가지 마시오. 너무 위험하오. 납치 위협이 있소’라고 말했다. 경찰이 이를 미리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외교업무 지원팀과의 회의를 소집해, 내가 정말 광주에 가야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팀의 의견은 정확히 반반으로 갈렸다. 그래서 나는 가기로 결심했다.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다’라는 메모를 금고에 남겼다. 그리고 떠났고, 광주에 도착했다. 그리고 대규모 경찰 호위대와 함께 기자들이 왔다.

기자들은 ‘광주에 사과하러 왔습니까?’하고 물었다.

나는 ‘아니요. 우리는 사과할 게 없다. 우리 문화원이 화염병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에 왜 그렇게 우리에게 분노하는지 알아내기 위해 왔다’라고 말했다. 나는 이틀 동안 모두에게 말하고 다녔지만, 광주 사람들은 일종의 배신감을 갖고 있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 기자들은 또 와서 광주 사태에 대해 사과하러 왔냐고 물었다.

나는 ‘네, 나는 우리가 무엇을 사과해야 될 지 알게 됐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오랫동안 침묵을 지켰다는 것이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큰 파장을 일으켰고, 미국 문화원에 화염병 공격을 하고, 야당을 규합하던 사람들은 나를 만나는 것에 합의했다.

나는 그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취소하고, 이곳에서 6명의 사람들과 3시간 반 동안을 함께 있었다. 굉장한 시간이었다. 처음에 이들은 나를 은밀하게 만나고 싶어했지만, 곧 TV에 방송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방송과 신문 기자들 앞에서 만났다.

첫번째 질문은 광주 거리에서 사격을 하도록 누가 명령을 내렸는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모르겠다. 한국의 결정이고 한국의 명령이었다. 오직 한국인들만이 아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거짓말이다. 당신들은 신문까지 읽을 정도로 내려다볼 수 있는 위성이 있어서, 우리를 지켜봤다는 걸 안다. 당신들은 누가 명령을 내렸는지 안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에게 그런 위성이 있지만, 그걸로 사람의 머릿 속까지 들여다볼 수는 없다. 우리는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신네 위컴 사령관이 한국은 집단으로 벼랑으로 가는 기질이 있다고 했으니, 당신들은 우리를 눈치나 보고 허둥대는 나라로 여긴 것이다’라고 말했다.
잘 풀리지 않았다.

나는 ‘절대 그렇지 않다. 나는 한국 국민들에게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우리는 당신들이 전두환을 지지한 것을 안다. 그가 최초로 레이건 대통령을 방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그와 아주 가깝기 때문에 이곳에서 한 짓을 지지했다는 걸 안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방문의 댓가가 김대중의 목숨이었던 것을 아는가?’라고 말했다. (레이건을 방문하는 대신 김대중을 감형시켜주는 것으로 전두환은 합의했고, 미국은 이후 김대중을 미국으로 망명하도록 했다.)

이것은 워싱턴과 서울에서 언급된 일이지만, 광주에서는 이야기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는 반향을 일으켰다.

3시간이 흐른 뒤, 그들은 ‘더 이상의 질문은 없다. 와줘서 고맙다. 일부 답변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일부는 도움이 됐다. 와줘서 고맙다’라고 말했다.

동반한 통역사는 능력이 뛰어난 젊은 여성이었는데, 정말 훌륭한 일을 해냈고, 언어 장벽을 없애주었다. 그녀가 내게 조용히 말해주길, 그들이 뒤따른 경찰들 때문에 체포될까 크게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밖으로 나갔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경찰들이 주변에 깔려 있었는데, 사람들을 몰아내기 위해 최루탄을 갖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나의 경호를 담당한 거친 경찰 지휘관에게 다가가 ‘이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라. 그냥 가게 하라’고 말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나는 ‘이 사람들을 건드리지 말라는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큰 소리로 명령했고, 봉쇄선이 열렸다. 사람들은 발로 채이고 떠밀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중 한 사람은 뒤돌아서 손을 흔들며 갔다…

나는 광주를 네 번 방문했다. 광주 방문은 내 생에 가장 인상 깊은 방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사실 북한을 방문했을 때 친숙한 느낌이었는데, 광주에서 느꼈던 똑같은 분함을 북한에서도 느꼈기 때문이다. 내가 자신들을 진지하게 대하고 질문에 성실히 대답하려고 한 걸 북한 사람들이 알게 되면서 그 분함은 사라졌다.

▣ “대서특필된 이 인터뷰는 완전 날조된 것이다!” (제임스 레이니, 전 주한미대사)

<제임스 레이니는 1993~1996년 주한 미국 대사를 지냈다. 다음은 ‘광주항쟁과 관련한 미국에 대한 오해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그들은 국무부가 제공한 백서를 가지고 있었는데, 내용을 검토하고, 전두환의 혐의를 벗겨주었다. 내가 주한 미 대사로 있었을 때 그 백서를 봤는데 공명정대하지 않았다는 게 명백했다. 다시 말해, 한국인들에게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자신은 만족시켜도 분개한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그건 성공한 것이 아니다.

나는 광주 방문에 대해 언급했었다. 광주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들은 ‘안 돼, 광주에 가면 안 된다’고 했다. 나는 ‘아니, 가겠다! 나는 인권을 신봉한다. 나는 회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어쨌든 나는 광주로 갈 계획이었다. 나는 불에 탔다는 말을 듣고 망월동묘지는 안 갈 생각이었다.

나는 늘 나의 고문들로 인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는데, 내 직감으로 볼 때 그들은 항상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그럼에도 그들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우리는 광주에서 언론인들 없이 분노에 찬 사람들과 비공개 저녁식사 자리에서 만났다. 나는 그저 그들의 입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했다. 그들을 달래려 하지 않고 들으려고만 했다. 나는 더러 자세를 낮추고 ‘나는 당신들의 말을 듣고 싶어 이곳에 왔소’라고 말했고, 그들은 이에 감사했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그 방에서 나가고 나니, 방송과 신문 기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다. 나는 ‘죄송하지만 이것은 비공개 면담입니다. 나는 이곳에 관심이 있어서 왔습니다. 미 대사로서 나는 이곳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 우려를 표현하기 위해 왔습니다. 사과하거나 해명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걱정 때문에 온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 우리는 산에 있는 한 사찰에 가기 위해 중부 지방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잠깐 쉬기 위해 멈췄는데, 내 수행원 중 한 명이 청와대에서 만나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나는 그들이 내가 있는 곳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어봤고, 그는 ‘그들은 전부 압니다!’라고 말했다. 알고 보니 서울에서 신문들이 광주에 관한 나와의 인터뷰를 대화체 그대로 보도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전면에 대서 특필된 이 인터뷰는 완전히 날조된 것이고, 꾸며낸 것이었다.

청와대는 몹시 화가 난 상태였다. 나는 ‘인터뷰한 적이 없소!’라고 말했다. 그들은 ‘아니, 당신은 인터뷰를 했어! 여기 신문에 나와 있잖아’라고 했다.

나는 ‘보시오! 나는 인터뷰를 한 적이 없소. 이건 전부 잘못된 거요’라고 말했다. 우리는 돌아갔고, 나는 인터뷰를 조작한 언론의 무책임함에 공격을 퍼부었다.

그리고 나서 다음에 일어난 소동은 인터뷰 주제나 인터뷰 자체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미 대사가 무단으로 지역 신문을 비판했다는 것이었다.(웃음)

나는 ‘빌어먹을 당신들이 맞아. 나는 비판할 거야’라고 말했죠. (웃음) 나중에 나는 한 신문사와 공개 인터뷰를 해야 했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정말 긴 인터뷰였는데, 매체는 이를 기사로 보도했다. 그리고는 끝이었다.

6677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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