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46) 글라이스틴 미 대사 "전두환 신군부, 자기들 이익에 맞춰 미국정책 고의적 왜곡" 주장
청와대-백악관 X파일(46) 글라이스틴 미 대사 "전두환 신군부, 자기들 이익에 맞춰 미국정책 고의적 왜곡" 주장
  • 특별취재팀
  • 승인 2019.01.29 17:04
  • 수정 2019.03.03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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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광주항쟁과 관련된 미국의 역할에 관한 논란이 일게 된 까닭은 한미연합사 사령관인 위컴 장군이 직책상 한국군의 광주지역 투입을 알고 있었고, 그들의 진압작전을 승인했으리라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대사의 증언이다.

5월 18일에서 21일까지 시위진압에 투입된 한국군 어느 부대도 위컴 장군의 작전권 관할하에 있지 않았다. 위컴이나 글라이스틴 대사 중 누구도 그들 병력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미국 측은 서울과 광주에서는 특전사 병력이, 부산에서는 해병대가 경찰력 보강이 필요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예비병력으로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무심히 넘길 수 없었다. 위컴 장군은 문제가 심각해지기 훨씬 전부터 여러 사람들, 특히 국방장관과 합참의장, 전두환 장군에게 군병력 동원의 위험성과 사상자가 발생할 경우 그로 인한 사태 확산의 가능성을 경고했다. 나도 강력하게 최광수 청와대 비서실상과 전두환 장군에게 같은 점을 지적했다.

한국의 지도자들은 군병력 동원에 대한 우리의 우려를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병력 동원은 최후의 수단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최실장은 특전사 병력은 경찰의 지원을 위해 선정됐으며, 그들은 시위진압 훈련도 이미 받았다고 역설했다. 그는 군인들이 무기를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약했다. 그러나 나는 특전사 병력의 역할이 못내 미덥지 않았다.

북한의 침투병력에 맞서 무자비하게 대적하도록 훈련받은 그들이 국내의 경찰임무를 수행하면서 지나치게 난폭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우리가 입수한 정보나 정부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위컴이나 나는 이들 예비병력이 비무장 학생과 무고한 시민들을 야만적으로 폭행하도록 명령받았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위컴 장군이 워싱턴에서 귀임한 것은 5월 19일이었다.

광주의 비극에 관한 첫 번째 소식이 우리에게 전해진 날이었다. 특전사 병력에 의한 광주의 만행을 알게 되면서 위컴과 나는 모든 경로를 동원해 우리의 경악과 비탄을 전했다. 전투지휘관을 역임한 위컴의 비난은 한국군 수뇌부에 내 말보다 한층 무게를 더했다. 5월 21일 군병력이 시 외각으로 퇴각하자 안심한 우리는 대화를 통한 사태수습 노력에 인내로 대할 것을 촉구했다. 나는 위컴이 한국군 고위 지휘관을 만난 자리에서 기본적으로 정치적인 문제를 군사력으로 대응할 경우 성공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한 것에 특히 감명받았다. 무엇보다 우리는 군의 재진입이 꼭 필요하다면 최소한의 병력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울에서 계엄임무를 수행하면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20사단 병력이 지원병력으로 광주에 투입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79년 10월 27일 연합사령부는 20사단의 2개 연대 병력을 작전 관할권에서 제외시켜 계엄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80년 5월 16일 한국군은 추가로 1개 연대병력의 작전권을 회수한다고 연합사에 통보했다. 위컴 사령관이 부재중이었기 때문에 백석주(白石柱) 부사령관은 통보사항을 받아들이면서 20사단에서 빠진 병력을 다른 병력으로 충원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그 일은 종결됐다. 최소한 20사단의 일부 병력은 5월 20일 이미 광주 일원에 배치돼 있었다.

전두환과 글라이스틴 대사 [연합뉴스]
전두환과 글라이스틴 대사 [연합뉴스]

 위컴은 한국측이 20사단 병력의 광주 투입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다고 통보받았을 때 대체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한국군측에 대화 노력의 지속을 요청하면서도 대화 노력이 실패할 경우 광주의 질서 회복을 위해서는 시위진압 훈련을 받지 않은 병력 중에는 20사단 병력이 특전사보다 훨씬 낫다는 데 한국측 고위 정책담당자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위컴이 그 문제에 관해 내 의견을 물었을 때 나는 군병력의 진입을 반대했지만 대화가 실패할 경우 다른 계획이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런 목적에 특전사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20사단 동원에 관한 위컴의 생각에 동의하면서도 워싱턴과 상의할 시간을 요청하고 즉시 전화를 걸었다. 그들은 동의했고, 나는 위컴에게 워싱턴에서도 동의했다는 말을 전했다.

우리 두 사람은 한국측과 얘기할 때는 진입이 아닌 대화를 촉구하기로 의견 일치를 보았다.  

관련 규칙은 “Unite States Government Statement on the Events in Kwangju, Republic of Korea, in May 1980”(Washington, D.C: U.S Department of State, June 1989), par. 1, p. 5and par. 51, p. 61에 요약돼 있음. 참고자료 ‘한국사태에 관한 전문’ 참조. 

당시 나는 우리(위컴과 나, 그리고 국무 · 국방부)가 한국측의 20사단 광주 투입 요청을 ‘승인’ 혹은 ‘동의’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후일 광주항쟁 기간 중 우리가 했던 일과 하지 않았던 일을 말할 때도 그런 표현을 사용했다. 그때 내 말의 의미는 한국에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나 1986년 처음으로 당시의 일을 기록할 때 국방부 변호사들이 내 틀린 점을 지적했다. 한국군은 이들 병력의 배치와 관련해 위컴의 ‘승인’을 요청하도록 돼 있지 않았으며 단지 그에게 통보하고 그가 요청할 경우 보완조치를 취하도록 돼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양국간 지휘체계의 정확한 규정과는 상관없이 양국 간의 작전협조 유지를 위해 한국의 방위에 영향을 미칠 병력의 이동시 한국은 미국의 긍정적인 반응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한국측이나 우리 모두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한국인들이나 내게 질문을 해오는 외국인들에 대해 광주문제에 관해 최대한 솔직하려 했다. 한 예로 5월 21일 외신기자들과의 기자 회견 때 나는 한국 정부의 조치를 강력 비난하고 미국을 광주의 만행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한국 정부로서는 국내에 혼란이 야기되는 것을 용인할 수 없었으리라는 점과 미국은 필요한 경우 질서 유지를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군병력 동원에 반대할 수 없다는 점을 시인했다.

그 후 기회 있을 때마다 나는 20사단의 비상동원을 우리가 승인(기술적으로는 ‘반대하지 않은 것’)한 것은 특전사 병력의 동원을 최소화하기 위한 인도적 기도(企圖)에서였다고 설명했다. 사태가 진정되고 거짓 정보가 나문하자 나는 사실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배가 해 1)시민 봉기를 야기한 특전사 병력의 야만적 행동과, 2)인명 살상을 최소화 하면서 진행된 5월 27일의 군병력 재진입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려 했다.

처음 있었던 일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진행돼 우리를 경악 시켰지만 나중 일은 우리가 사전협의하에 진행됐다. 서울에서는 우리의 행동과 동기에 대해 공평한 이해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광주시민들은 진실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분노의 화살을 미국에 돌렸고, 전두환이 집권하고 있는 동안 그런 오해는 한국의 다른 지역까지 확산됐다.

 미국 정부의 사태 분석

의심할 여지없이 광주비극의 처음 4일 간은 위기를 맞았던 몇 달의 고통스런 기간을 통틀어 미국의 정책담당자들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운 시간이었다. 한국의 군수뇌부는 사태를 전력으로 국내문제인 것으로 파악해 군사력을 유례없는 경찰임무에 동원했고, 그 과정에서 시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야기하고 그로 인한 혼란을 북한이 이용할 수 있는 위험을 자초했다. 미국은 사전에 아무런 통보도 받지 못했고, 며칠 간 군사적 동맹인 한국 정부로부터 어느 정도나마 객관적인 설명조차 듣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견해를 한국 국민들에게 알리는 것조차 의도적으로 방해받았다. 광주의 비극과 더불어 그런 한국측의 태도는 즉각 워싱턴 고위층의 주의를 끌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미국 정부는 이란사태로 인한 정치적 영향력의 최소화에 진력하고 있었지만 한국에서 혼란이 확산되는 것에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물론 나를 포함해 위컴과 브루스터 등 우리 모두는 우리가 아는 모든 사실을 즉시 워싱턴에 알렸으며 전문과 전화로 그때그때 상황을 공동으로 또는 개별적으로 분석 보고했다. 80년 5월 22일 워싱턴에서는 국가안전보장회의의 정책검토위원회 회의가 급히 소집됐다. 나는 우리가 광주의 실상을 파악하기 전 급히 작성한 상황분석 보고서를 이미 보낸 후였지만 추가보고를 전화로 계속했다. 홀브룩 국무차관보는 자신이 준비한 회의자료를 내게 보내 의견을 구했다. 그리고 회의 전날 밤 전화로 이쪽 상황을 물어왔다.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현장과 멀리 떨어진 워싱턴에서 느끼는 사태의 심각성은 우리가 서울에서 느끼는 것보다 더 높아 보였다. 나는 또 5월 21일 홀브룩에게 “광주의 대규모 민중봉기는 아직 통제 불가능하며 한국 군부로서는 최소한 20년 겪어보지 않은 국내적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라고 말해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홀브룩은 몇 가지 기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 광주의 혼란이 확산돼 국내 전체로 확산될 가능성은?
  - 주한미군의 신변안전에 별 문제는 없는가?
  - 그들을 철수시켜야 하나?
  -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은?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지금도 확실히 기억한다. 광주의 혼란이 한국 전역으로 확산될 가능성은 없다. 한국 국민들은 계엄령을 마지못해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광주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사태가 진정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군은 무사하다. 한국 국민들은 북한을 견제하기 위해 미군의 계속 주둔을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혼란이 전역으로 확산되고 국민들이 우리 군에 등을 돌리는 상황이 오면 우리는 철군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나는 확답할 수는 없었지만 북한이 당장 도발하지는 않을 것을 예측했다. 홀브룩은 내 답변에 만족한 듯했다.

백악관에서 열린 회의(신임 에드먼드 머스키 국무장관이 주재하고 브라운 국방장관, 브레진스키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 존스 합참의장, 터너CIA 국장, 홀브룩 등이 참석)는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현명한 결론에 도달했다. 국가안보회의 회의록에 의하면 “회의 참석자들은 대체적으로 다음 사항에 합의했다.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다.

질서가 회복된 후에는 정치적 자유의 신장을 위한 한국 정부와 특히 군부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브레진스키는 그것을 “단기적으로는 ‘지원’, 장기적으로는 정치발전을 위한 ‘압력’”이라고 요약했다. 1996년 Journal of Commerce기고문을 집필하던 팀 셔록은 당시 국가안보회의 회의록을 입수하고 브레진스키가 사용한 ‘지원’이란 단어는 미국 정부와 내가 해명한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나는 그의 주장에 맞서 브레진스키를 옹호했다.

그가 ‘지원’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적절치 못했지만 회의록에 나와 있듯이 그 말은 최소한의 무력을 동원한 질서회복을 지칭한 것이었다. 셔록은 자신의 기고문에서 비난 주장을 철회했지만 제목이 주는 인상 때문에 내용의 상당부문이 왜곡 전달됐다. Tim Shorrock, “U.S. Knew of South Korea Crackdown,” Journal of Commerce, Feb. 27, 1996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 [연합뉴스]
윌리엄 글라이스틴 대사 [연합뉴스]

미국 정부의 공식성명

미국의 공식 · 비공식 행동은 워싱턴 회의의 결론을 반영했다. 머스키 국무장관은 5월 20일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에 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으며, 다음날 호딩 카터 국무부 대변인은 광주문제에 관한 우리의 우려에 초점을 맞춰 자제와 화해적 대화를 강조했다. 언론의 궁금증과 미국의 역할에 관한 오해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나는 5월 21일 외신기자들을 위한 익명의 기자회견을 가졌다. 당시 내가 강조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미국은 광주의 시위학생들에 대한 군부의 강압조치에 대해 통보받은 바 없다.
  - 당시 시위진압에 투입됐던 군병력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위컴 장국휘하 병력이 아니었다.
  - 우리는 5월 17일 한국 정부가 취한 조치와 광주에서의 야만적 행위가 늘어나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우리는 국내 질서유지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한국 정부의 강압적인 조치에 항의했다.
  - 우리는 모든 통로를 동원해 자제를 촉구하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교섭에 나서도록 양측을 설득하고 있다.

5월 22일 미국 정부는 내 요청에 따라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1) 광주항쟁의 모든 당사자들에게 최대한 자제와 교섭에 의한 해결을 모색하기 위한 대화를 촉구하고, 2)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려는 외부의 기도에 경고를 보냈다. 국무부 대변인이 정오 브리핑에서 발표한 성명서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한국의 남쪽 도시 광주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태를 깊이 우려하고 있다.

우리는 모든 당사자들이 최대한의 자제력을 발휘할 것과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불안이 계속되고 폭력이 점증하면 외부세력에 의한 위험한 오판을 불러올 위험이 있다. 평온이 회복되면 최대통령이 밝힌 정치발전 계획의 이행 재개를 위한 수단을 강구할 것을 모든 당사자들에게 촉구할 것이다. 우리가 재차 강조하지만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악용하려는 어떠한 외부세력의 기도도 방위조약의 의무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다.

홀브룩 차관보는 ‘방위조약 의무’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같은 날 중국대사를 불러 평양이 무모한 도발을 삼가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이 공식성명은(대체적인 초안은 내가 만들었으며 ‘미국의 소리’ 방송과 주한미국 방송으로도 방송됐다) 여러 고려사항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한국의 군 수뇌부는 광주의 혼란을 북한이 이용할 것을 우려해 1979~80년 위기의 매 고비마다 평양에 대해 경고해 줄 것을 요청했다. 위컴과 나는 북한에 대해 그들만큼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신중한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위컴 장군은 데프콘 3 경계경보에 준하는 경계태세를 비공식적으로 발령하고 공중경보기의 증파와 항모 기동타격대의 파견을 요청했다.

동시에 우리는 한국 군부에 대해 광주의 시민수습위원회와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면서 우리의 입장을 광주 시민들에게 알릴 방도를 모색했다. 나는 유병현 합참의장 및 최광수 비서실장과 협의를 계속하면서 북한에 대한 미국의 반복 경고를 본국에 제안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그러나 광주의 양측에 대해 자제와 평화적 해결을 모색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도 함께 담는다는 조건이었다.

양측을 동등하게 대하는 우리의 성명서 초안을 한국 정부당국자들은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 더군다나 나는 성명서가 워싱턴에서 발표되면 계엄당국도 성명서 내용을 한국 전역에 방송하고 광주 상공에 전단으로 살포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한국측과 합의한 내용들의 기저에는 한국 군부가 교섭에 의한 해결을 모색하는 동안(최소한2일)은 군사적 해결을 기도하지 않는다는 양해가 있었다.

우리 미국측은 우리 약속을 지켰다. 한국측도 5월 27일 새벽까지 4일간 군사행동을 유보해 시위대와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경주하는 듯했다. 그러나 계엄당국은 5월 22일 우리가 발표한 성명서 내용을 한국민들에게 알리지 않기로 결정했다(일부 한국인들은 성명서를 미국의 소리 방송이나 주한미국 방송을 통해 들었다). 나의 한국 재임기간 동안 겪은 가장 비열한 속임수였다. 물론 광주에 전단살포도 하지 않았다. 대신 광주시민들은 위컴 장군이 광주 투입을 위한 병력 사용을 승인했으며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병력을 동원하도록 ‘권장했다’는 방송을 들었다. 방송을 듣지 않아 그 정확한 표현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광주시민들은 그것을 미국이 특전사 군인들의 만행을 지지한 증거로 받아들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위컴은 국방장관 · 한참의장 · 계엄사령관 및 기타 한국군 수뇌부에게 강력 항의했다. 그들은 그 방송이 ‘적합한 허락도 받지 않은 현지 당국자들의 일과성 행동’이었다고 변명했다. 나는 청와대의 최비서실장에게 광주시민들의 비난을 우리에게 전가하려는 이런 노골적인 노력이 계속된다면 한국 정부를 당혹케 할 강력한 부인 성명이 나올 것이며 머스키 국무장관도 심각히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양국관계에서 전라지방의 모든 다른 문제들도 부족해 반미운동까지 번진다면 그보다 더 나쁜 일은 없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최실장이 즉각적인 해결을 약속했지만 납득할 만한 설명은 듣지 못했다.

이런 약속 위반이 초래한 현실은 후일 뚜렷하게 나타났다. 사태가 진정된 후 광주지역에서 나는 그래도 조금은 덜했지만 위컴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죄과를 뒤접어쓰고 악마처럼 비쳐졌다. 광주사태 기간 중 미국의 군사행동이 타당했다고 전라도 주민들이 깨닫기 시작한 것은 전두환이 불명예스럽게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의 일이었다.

미국 정부의 평화적 해결 모색

광주에서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미국의 노력은 여러 모로 제약이 많았다. 주민들과의 자연스런 의사소통도 불가능했고 우리 견해는 번번히 왜곡됐으며 한국의 정보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차단됐다. 특히 우리는 광주에 미국 정부를 대표할 아무런 공식기구도 없어 정확한 정보 수집이 불가능했고 신빙성 없는 소식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복합적인 상황은 우리를 좌절시키고 때로는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한국이 역사적인 중대고비를 넘고 있다는 점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한켠에 비켜서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인내와 자제를 촉구하고, 대화를 통한 해결 노력을 권장하고, 대화 노력이 실패로 끝나 군병력이 광주에 진입할 경우 유혈사태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했다. 한국군 수뇌부에 대한 강력한 미국의 의사 전달은 주로 위컴 사령관고 보브 브루스터가 맡았다. 나도 유병현 합참의장을 포함한 국 지휘관들과의 대화(주로 전화를 통한)를 통해 그런 미국의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이것은 워싱턴 고위층의 견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 외에도 나는 민간인 고위 관리들에 대한 설득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5월 21일 박동진 외무장관이 북한에 대한 경고요청을 위해 내게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서울과 광주에서 취한 한국 정부의 조치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북한의 남침보다 장군들이 국내 사태를 오판하고 있는 것이 더욱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그도 내 말에 동의했지만 군인들에 맞설 영향력 있는 인물이 없다는 점을 안타까워했다.

5월 17일 정부가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정치인과 학생지도자들을 체포한 일련의 사태 후 찾아온 위기의 며칠 동안 나는 최대통령을 만나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영향력이 한층 감퇴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최광수 비서실장에게는 내 의견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는 정보에 밝고 이지적이었으며 군 지도자들에게 우리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도 능숙한 솜씨를 보였다 같은 생각으로 나는 신임 박충훈 총리와의 조기 면담을 서둘렀다.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던 그의 전임자 신현확 총리처럼 그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였다. 5월 23일 존 몬조 부대사를 대동하고 그를 만났다. 그가 성과 없이 광주에 다녀온 다음날이었다. 우리는 미국이 취할 행동에 대해 솔직한 입장을 개진했다. 그도 우리 견해에 동조하는 것 같았지만 그와 두 번 만난 후 우리가 내린 결론은 그가 군인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그와 만났을 때 나는 광주시민들에 대한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를 강력히 촉구했다.

이렇게 민간인 지도자들이 머뭇거리는 태도는 대화 결과에 대한 내 우려를 증폭시켰다.

정부나 광주시민 쪽을 막론하고 대화는 강경론자들이 주도했다. 시민 수습위원회가 타협책 마련에 실패하자 내 우려는 극도에 달했고, 광주 진입이 비교적 순조로웠다는 소식을 듣기까지 나는 마음을 조여야 했다. 나는 이런 한국의 국내적 소용돌이에서 미국이 더 이상의 좋은 결과를 중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광주에 미국 정부의 공식 기구가 있었고 잡다한 소식통으로부터 수집한 간접정보가 아닌 그곳 지도자들을 잘 아는 누군가가 시시각각 우리에게 새로운 정보를 제공했다면 우리는 좀더 확실한 정보로 무장하고 벽에 부닥치는 아픔을 덜 느꼈을 것이다. 대사관의 정무부서에 근무하던 스펜스 리처드슨은 한국어에 능통하고 사태가 진정된 후 광주를 방문해 훌륭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지금 와서 후회되는 것은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즉시 그나 다른 사람을 광주에 보내지 않은 점이다. 우리는 특정 인물들을 대상으로 원격조종에 의한 영향력 행사에만 주력했던 것이다. 서울의 군과 민간인 지도자들, 광주의 몇몇 선교사, 그리고 신구 교회지도자들이 그들 이었다. 특히 광주의 윤공희(尹恭凞) 대주교와 긴밀히 연락을 주고 받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많이 의뢰했다.

광주에서의 대화가 아직 진행되는 동안 시민수습위원회나 대결하고 있던 쌍방의 어느 누구도 미국의 직접개입이 대화 진척에 도움이 된다고 제의한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 해도 우리 생각에 직접개입이 어느 모로든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우리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멀리 서울에 떨어져 있던 우리는 수숩위원회를 간접적으로라도 지원하는 것이 최상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또한 양측의 주장 하나 하나보다는 특전사 군인들에 의한 과잉진압에 대한 정부의 사과와 같은 일반적인 문제에 주력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군병력의 광주진입 직전인 5월 26일 광주에 있던 익명의 학생 지도자로부터 절박한 요청이 있었다. 그날 오후 『뉴욕타임즈』의 헨리 스콧-스톡스 특파원을 만나 그는 내가 휴전을 중재하도록 미국 정부가 ‘지시’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스콧-스톡스 기자는 내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뉴욕 본사에 요청 사실을 기사로 송고했다. 같은 날 저녁 10시 주한 미군방송 뉴스로 내용이 보도됐고, 내가 그 소식을 처음 들은 것은 밤 11시 한국군이 2~3시간 후면 광주에 진입할 것이라는 공식 통보를 받은 뒤였다. 나는 그 요청의 자세한 내용이나 어떤 상황에서 그런 요청이 나왔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나는 한국군이 이미 진입명령을 받고 준비에 들어간 상황에서 내가 나서더라도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관 공보관을 통해 그 특파원이 중재요청을 전달해 왔을 때 나는 거절했다. 평화를 위한 진지한 노력을 소홀히 하고 싶지 않았기에 당시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중에 그 요청을 한 학생이 도청을 사수하려던 과격투사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고 안심했다. 그의 이름은 윤상원(尹祥源) 스콧-스톡스는 그를 ‘제퍼슨 식(式) 순수 민주주의자’라고 묘사했으며, 『볼티모어 선』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도 그에 대해 동정적으로 썼지만 한층 극단적인 표현을 동원했다. Amalie M. Weber, ed., Kwangju in the Eyes of the World(Seoul : Kwangju Citizens Solidarity, 1997) 참조.
으로 철저한 반정부 운동가에다 이론가로 박정희 정권의 핍박으로 강경해질대로 강경해진 그에게 타협이란 불가능했다.

 미국 정책의 악의적 왜곡

광주시민들의 생명과 한국의 안보가 더욱 중요한 문제였음에는 틀림없지만 나는 전두환 장군 및 휘하 군지도자들에 의한 미국 정책의 고의적 왜곡에 특히 분개했다. 5월 22일 발표된 미국 공식성명의 ‘왜곡 전달’로 빚어진 긴장은 그 후 수개월 간 지속된 비열한 적대행동의 시작에 불과했다.

5월 23일 내가 박충훈 총리를 만난 직후 이동원(李東元) 국회 외무위원장이 대사관의 우리 몇몇과 여야 의원들을 오찬에 초청했다. 나는 그 자리를 빌려 의원들에게 5월 18일 우리가 강경성명을 발표한 이유와 광주의 비극을 종결시키기 위한 우리 생각 등을 성명했다. 5월 17일 정부가 취한 조치는 학생들에게도 책임이 있지만(여당 의원 들으라고) 군부는 그들의 행동이 가져올 정치적 결과를 좀더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여야 의원 모두 들으라고).

나는 정치지도자들의 체포와 국회의 문을 닫은 일은 무슨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으며 내가 보기에는 ‘정치적 바보짓’이라는 점도 이야기했다. 나는 의원들이 그날 내 발언의 정확한 내용을 흘려 그것이 영자지에 기사로 게재된 것을 읽고 흡족하게 생각했다. 기사는 광주에서의 대화와 타협의 필요성 및 사태가 진정된 후 정치발전을 향한 움직임이 절실하다는 내 발언까지 싣고 있었다.

그러나 흡족했던 것도 잠시뿐이었다. 몇몇 한국어 신문들이 내 발언을 완전히 뒤집어, 내가 5월 17일 조치에 대해 이해 내지는 승인을 표명했다는 기사를 게재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광주의 정부당국자에 의한 ‘역(逆 )정보’ 사실을 알게 됐다. 전두환 장군이 신문발행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은 12·12 사태와 자시의 중앙정보부장 임명 및 5월 17일의 정부 조치에 대해 사전에 통보받았다고 주장한 것에는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즉시 우리가 12 · 12 사태와 전두환의 중정부장 임명, 5 · 17 조치를 알게 된 경위 및 내가 5월 23일 오찬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발표문을 만들어 전두환과 만났던 신문발행인 개개인에게 구두로 전달하도록 했다. 워싱턴에는 공개적으로 전두환과 마찰을 빚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고 보고했지만, 그는 내가 취한 조치를 알았을 것이고, 내 ‘정면’ 대응이 기분 좋았을 리 없다.

광주가 평온을 되찾은 이틀 후 나는 워싱턴에 ‘사적인 견해를 담은 전문’을 보냈다. ‘5 · 17 조치와 광주 민중봉기에 비춰본 기본적 제안’이라 명명한 그 문서의 많은 부분을 여기 인용한다. 그것은 거의 6개월 간 전두환 그룹과의 대치 및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한 결과 나온 기본적 견해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면에서는 군사점령을 방불케 하는 군사력으로 한국의 대부분 지역을 장악한 상태에서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현상황에 비추어 장기적인 정치안정을 위해서는 정치적 통제의 완화와 12 · 12 사태 후 우리가 목격한 것 이상의 세련된 정치체제로의 복귀가 필요한 것으로 사료된다. 반드시 완전한 민주주의 형태가 아니더라도 그런 것이 가까운 시일 내에 이뤄지지 않을 경우 국민들의 불만은 우리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위험수준까지 육박할 것으로 염려된다.

우리는 이들 독단적인 지도자들(전두환과 그들 일행)의 권력을 향한 행진을 저지하거나, 지연시키기 위한 기도에서 명백히 실패했다. ··· 전두환 일파는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생각에서 우리의 대응을 과소평가하거나 도외시하고 있어 우리를 당황케 할 정도로 오만해질 수도 있다. ··· 불행히도 우리는 한국의 안전보장과 결부된 우리의 이해관계로 인해 거짓 펀치조차 마음대로 날리지 못해 이런 위험한 오만의 도가 심화되도록 방치했다. 우리가 양국 간의 안보관계나 대북한 기본정책, 혹은 우리의 경제적 지원 자세를 변경하겠다는 위협을 가하지 않은 것은 그런 위협이 역효과를 가져오고 일반국민을 놀라게 할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본적 예측은 앞으로도 옳은 것으로 사료된다.

전두환 일파가 새로운 역할을 맡으면서 그들은 함께 일할 한층 성숙한 사람들을 통해, 그리고 시행착오를 통해 국내정치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때도 있지만 소극적으로 대처할 필요도 있다는 점과 경제 및 안보관련 대외관계는 상호주의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어느 정도는 알게 될 것이다.

불변하는 우리의 안보상 이해관계를 감안해 우리에게 핵심 변수는 한국 국민들의 진정한 반응에 달려 있다. 만약 정당한 시험을 통해 대부분의 국민들이 새로 등장하는 정치구조에 적응해 살겠다면 우리도 못할 것이 없을 것으로 사료된다. 만약 국민들이 명백하게 새로운 지도부를 용인할 수 없다면 우리는 원하든 원치 않든 변화의 실현을 모색하거나 우리가 철수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일 것이다. 우리가 서둘러 어떤 결론을 내리지 말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우리의 상대는 모순되게도 법과 질서의 유지를 원하면서도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면서 나는 전두환 장군에게 더 많은 두통거리를 안겨줄 정책안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 장(章)은 내가 그런 제안들을 전두환 장군 및 워싱턴 상급자들과의 폭넓은 대화를 통해 어떻게 개진했는지 밝힐 것이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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