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프레디 머큐리가 전 생애를 통틀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성 '메리 오스틴' 스토리
[WIKI 인사이드] 프레디 머큐리가 전 생애를 통틀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성 '메리 오스틴' 스토리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9.03.20 15:03
  • 수정 2019.03.21 06: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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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오스틴과 프레드 머큐리. [브라잇사이드 닷컴]
메리 오스틴과 프레드 머큐리. [브라잇사이드 닷컴]

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자신감이 넘치는 총명한 아티스트였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프레디가 무명 시절일 때부터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던 유일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또 그가 병마와 싸우며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순간에도 그와 함께 했었다. 메리 오스틴은 프레디 머큐리와 사실혼 관계에 있던 아내이자 친구였다.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는 프레드 머큐리와 메리 오스틴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그러나 실제 삶과는 상당부분 다르게 각색돼 있다. 

특이한 옷으로 시작된 두사람의 사랑

메리 오스틴과 프레디 머큐리의 첫 만남은 두 사람의 특이한 옷 사랑 때문에 시작되었다. 메리가 런던에 있는 ‘비바’라는 옷가게에서 일하고 있을 때 프레디는 켄싱턴 마켓에서 그의 친구 로저 테일러(퀸의 드러머)와 함께 구제(舊製) 의류를 팔고 있었다.

그 때는 ‘프레디 머큐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름이었다. 그룹 퀸이 팝 계에 이름이라도 올리기 위해서는 아직도 1년이라는 기간이 남아있던 시기였다.

메리 오스틴은 청각과 말을 못하는 장애를 지닌 부모 밑에서 태어나, 부모와는 수화를 통해 대화를 해야 했다. 그녀의 가족은 여러 면에서 다른 가정과 많이 달랐다. 그녀의 아버지 직업은 미장이였고, 어머니는 하녀 일을 했다.

미래의 락 아이돌은 이 연약하고 자그마한 아가씨를 보자마자 즉시 이끌리게 되었다.

하지만 메리는 볼 때마다 프레디가 눈에 띄는 화려한 의상을 입고 있어서 다소 놀랐고,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눈에 들어온 사람은, 기괴한 복장에 머리가 길고 공격적인 모습의 24살짜리 사내였는데, 당연히 그녀는 그의 모습에 놀라고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메리는 당시 그들은 교회에 사는 쥐들처럼 가난했으며, 그들의 사랑은 다른 수많은 가난한 커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음악을 듣거나, 긴 시간 산책을 하곤 했지만 여유 있는 연애를 할 수는 없었다. 1970년대 런던 음악계에는 고만고만한 아티스트들이 넘쳐났으므로 그들이 성공을 노리기에는 쉽지 않았다.

메리와 프레디 [브라잇사이드닷컴]
메리와 프레디 [브라잇사이드닷컴]

스타가 되는 발판

메리와 프레디 커플은 두어 달의 데이트 후 작은 아파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러고 얼마 후 세상을 정복하게 될 전설적 락 밴드 퀸이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아무도 이런 사실에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이 커플은 비교적 소박한 삶을 살 수 있었다. 프레디는 곡을 썼고, 메리는 내조를 했다.

퀸은 1973년 첫 앨범을 출시했다. 그들의 삶이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런던의 부유층 지역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프레디 머큐리가 메리에게 바치는, 락 발라드 곡인 ‘러브 오브 마이 라이프(Love of My Life)’를 만든 시기도 이 때였다.

또 프레디는 그녀에게 정식으로 청혼을 했다. 프러포즈는 프레디의 자질을 십분 발휘해 유머스럽게 진행되었다.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메리 오스틴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때 저는 23살이었는데, 그가 크리스마스 날에 상자 하나를 선물로 주었어요.

그 상자 안에는 또 다른 상자가, 그리고 그 다른 상자 안에 또 하나의 상자가 …… 그런 식이었어요.

장난을 잘 치는 그의 버릇 그대로였지요. 마침내 저는 마지막 작은 상자 안에서 옥으로 된 반지 하나를 찾을 수 있었어요.

저는 그 반지를 보고는 할 말을 잃었어요. 도대체 이건 뭐지? 그 반지는 제가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그에게 물었지요.

“어느 손가락에 이걸 끼지?”

그러자 그가 대답했어요.

“왼손 넷째 손가락.”

그러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왜냐하면 …… 나랑 결혼해주겠어?”

저는 당황했어요. 그런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저는 이렇게 속삭였어요.

“그래.”

프레디는 약혼녀를 그의 어머니에게 소개했고, 프레디의 어머니 제르 불사라는 아들의 선택을 너무 좋아했다. 어머니는 그들이 곧 결혼식을 올리고 아이도 낳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결혼식은 치러지지 못했다. 그들은 약혼 상태로 3년을 보내다가 결국 헤어졌다.

퀸의 첫 번째 앨범이 나온 후 1년의 간격을 두고 2개의 앨범이 더 출시되었다. 퀸은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프레디도 새로운 팬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메리는 프레디의 이러한 성공에 묘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시간이 좀 흐른 뒤, 저는 샵에서 너무 마음에 드는 고색창연한 한 웨딩드레스를 찾아냈어요. 그래도 프레디가 결혼식에 대해 아무런 말이 없자,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를 떠보는 수 밖에 없었지요.

‘그 웨딩드레스 살까?’

하지만 그의 대답은 부정적이었어요. 그는 마음이 변했고, 결혼식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실망을 금할 수 없었지요. 상황은 꼬여만 갔고, 우리 둘 사이는 금이 많이 갔어요.”

성적취향 털어놓다... 별거 시작

프레디는 귀가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으며, 그들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프레디는 자신의 평범하지 않은 성적 취향에 대해 메리에게 털어놓았다.

메리는 그들이 언제나 서로에게 솔직하고, 말다툼을 피하려고 노력했다고 기억한다. 그들의 러브스토리는 끝이 났다.

그러나 위대한 락스타와 평범한 여성 사이의 우정과 플라토닉 러브는 영원히 이어졌다.

결별 후 프레디 머큐리는 메리에게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으며, 그녀는 그의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거처를 정했다.

메리는 항상 보조자로서 프레디의 곁을 지켰고, 순회공연 중에는 늘 그를 수행했다.

유튜브에는 다음과 같이 털어놓는 프레디 머큐리의 동영상이 올라와 있다.

“저는 1970년에 메리를 만났으며, 그때부터 우리는 따듯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지금까지 어느 누구와도 그녀 이상으로 가까워본 적이 없어요. 우리는 7년을 함께 살았으며, 저는 지금도 그녀를 사랑합니다. 성취하기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랑이며, 또 사랑은 다른 무엇보다 가장 많은 상처를 가져다주기도 하지요. 메리와 저는 끈끈한 유대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우리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집니다. 그녀는 참 많을 일들을 겪으면서도 언제나 내 곁을 지켜주고 있어요.”

메리도 프레디 머큐리처럼 개인적인 삶이 있었다. 그녀는 두 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들의 아빠와 결혼은 하지 않았다. 프레디는 메리 큰아들의 대부(代父)가 되어주었다. 그 당시 프레디는 절망적으로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는 팬들에 둘러싸여있으면서도 따듯한 사랑과 위로가 필요할 때는 메리를 찾았다.

<미러>의 인터넷 판에는 프레디 머큐리의 회고가 실려 있다.

“내 연인들은 자기들이 어째서 메리의 역할을 할 수 없는지 물어왔지만, 그건 한마디로 불가능합니다. 메리는 저의 유일한 친구이고, 저는 다른 친구가 필요하지 않아요. 그녀는 제게 사실혼 관계의 아내입니다. 제게는 결혼을 한 배우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신뢰합니다. 저는 그걸로 충분해요. 저는 메리와 같은 방식으로 남자를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에이즈와 마지막 이야기

애초에는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에 걸린 사실을 단 두 사람만이 알고 있었다. 메리 오스틴과 프레디의 동성 파트너인 짐 허튼, 이렇게 두 사람만이 그에게 병이 생긴 사실을 알았다. 에이즈가 프레디를 거의 다 무너뜨릴 때까지 이 두 사람은 항상 그의 곁을 지켰다. 메리는 평생 믿음을 준 친구로, 짐 허튼은 위대한 가수의 마지막 연인으로 ……

짐 허튼은 에이즈 발병 후에도 20년을 더 살고, 2010년 폐암으로 사망했다.

1991년 프레디 머큐리는 시력을 잃었고, 병석을 벗어날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는 약을 끊고, 더 이상 삶과의 투쟁을 중단했다. 그때도 메리와 짐이 그의 곁에 있었다. 그들은 함께 퀸 공연 실황 영상을 보면서, 울고 웃으며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우리의 사랑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순수한 사랑입니다. 본능적인 사랑입니다. 저는 여전히 그녀를 사랑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함께 늙어갈 겁니다.”

<미러> 지에 실린 프레디 머큐리 회상의 일부분이다.

유산과 장례식

프레디 머큐리는 1991년 11월 24일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유언을 통해 자신의 현재와 미래 수입의 막대한 부분과 런던의 대저택을 메리 오스틴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그대는 내 아내가 되기로 했던 사람이므로 이 모든 것을 소유할 자격이 있어요.”(프레디 머큐리/<미러> 지)

메리 오스틴은, 프레디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가 막대한 재산을 그녀에게 남긴 사실을 알고는 그녀에게 등을 돌렸다고, 말을 했다. 그녀는 친구를 잃고 완전히 외톨이가 되었다. 또, 그녀는 프레디가 남긴 대저택을 빼앗아가려는 세무 당국과 기나긴 싸움을 벌여야했다.

프레디 머큐리가 남긴 유언장에서 주목할 또 하나는 그의 장례식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는 메리가 자신을 화장한 재를 뿌려주고, 그 장소를 비밀에 붙여주기를 바랐다. 그는 낯선 사람들이 묘지에 몰려들 것을 염려했으며, 그의 영원한 안식 장소가 사람들에 의해 훼손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메리는 프레디의 유골함을 2년이나 보관하다가 재를 뿌렸다. 그녀는 프레디의 유언을 충실히 따랐다. 세상 어느 누구도 위대한 가수 프레디 머큐리의 재가 어디에 뿌려졌는지 모른다.

퀸의 팬들은 이와 관련하여 몇 가지 추측을 한다. 한 가지 설은 메리가 프레디의 재를 그의 고국인 탄자니아 잔지바르로 가져갔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 설은 프레디의 안식 장소는 생전에 그가 좋아하던 장소인 그의 대저택 ‘가든 로지(Garden Lodge)’ 정원 내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세 번째 설은 그의 팬들이 최근에 프레디 머큐리의 본명인 ‘파로크 불사라(Farrokh Bulsara)’가 적혀있는 추모 동판을 발견했을 때 생겨났다. 하지만 메리 오스틴은 어떤 설에도 확인을 해주지 않고 있다.

메리와 프레디. [브라잇사이드닷컴]
메리와 프레디. [브라잇사이드닷컴]

현재의 상황

2019년 메리 오스틴은 68세가 되었다. 그녀는 프레디가 남긴 대저택의 높은 담장 뒤에 살며, 언론과의 접촉을 꺼리고 있다.

그녀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의 촬영에도 참여를 거절했지만, 대본을 읽고 영화화에 동의해주기는 했다.

메리는 다른 남자와 결혼해 두명의 아이를 두고 1993년 이혼, 98년 니콜라그 홀포드와 결혼했지만 4년 후 다시 결별했다.

프레디 머큐리는 그녀에게 1,000만 달러 이상의 유산을 남겼다는 얘기가 있다. 메리는 현재 약 8,000만달러(900억원)의 자산을 가진 것으로 알려진다.

퀸의 팬들은 메리 오스틴을 매우 싫어한다.

전 세계 프레디 머큐리 팬들은 런던을 찾아, 그의 대저택 ‘가든 로지’를 방문해서 위대한 음악가를 기리는 꽃과 그림, 시들을 바친다.

그러나 메리는 ‘가든 로지’의 울타리와 현관에 걸린 이 모든 헌사품들을 치우도록 했다.

그 이후 ‘가든 로지’의 담벼락은 특수 아크릴 수지로 가공되어 헌사품들을 남길 수 없도록 되었다.

하지만 프레디 머큐리의 어머니와 여동생 카스미라는 메리를 따듯하게 대해주며, 그녀를 불사라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해 주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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