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을 이어온 대한정신..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해방 그리고 오늘 [WIKI 기획]
100년을 이어온 대한정신..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해방 그리고 오늘 [WIKI 기획]
  • 황양택, 이경아 기자
  • 승인 2019.03.25 07:25
  • 수정 2019.03.25 1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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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신 100년- 대도약 코리아로! (상)
'대한 정신' 100년... 3-1운동과 정부 수립~한국전쟁~오늘날 대한민국 [연합뉴스 PG]
'대한 정신' 100년... 3-1운동과 정부 수립~한국전쟁~오늘날 대한민국(왼쪽 위부터) [연합뉴스 PG]

대한정신 100년! 대한민국의 100년 근현대사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렇지만 혹독한 민족적 수난 속에서도 끈질긴 자주-자강 정신이 없었더라면 한민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청나라-러시아-일본의 틈에서 절묘하게 균형 외교를 해왔던 대한제국이 비극의 길로 치닫기 시작한 것은 일본이 청일전쟁(1894년), 러일전쟁(1904년)에서 잇따라 승리하면서부터였다.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영·일동맹을 통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반도 지배를 보장받은 일본은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1910년 8월 한일합방 조약을 맺은 후 조선총독부를 설치했다.

하지만 1919년 고종의 장례식을 계기로 3·1운동이 일어났다.

도쿄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 미국 윌슨 대통령이 천명한 ‘민족자결주의’ 원칙 등이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쳤다.

서울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일본경찰과 군대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상인들이 상점을 닫고 학생들이 등교를 거부하는 상태로 3월말까지 계속됐다.

▶조직적 항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세워지다

3·1운동 이후 일본통치에 맞서 조직적으로 항거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민족 대표들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에는 각 도 대의원 30명이 모여 임시헌장 10개조를 채택했다.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을 위해 비밀 연락망인 ‘연통제’를 실시했는데, 이는 곧 임시정부의 비밀 행정체계이기도 했다. 독립운동가들은 연통제를 통해 임시정부와 연락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애국공채 발행으로 군자금을 전달했다.

임시정부는 외교 총장 김규식을 전권 대사로 임명,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게 했다. 또 구미위원부를 통해 이승만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 한국의 독립을 국제적인 문제로 제기했다.

당시 임시정부를 설립해 강력하고 조직적인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겠다는 민족적 의식은 높았으나 식민통치 하에서 교통 및 통신 수단의 한계에 직면해 지역 간 정보교환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에 1919년 9월 중국 상하이에 대통령 중심제가 가미된 의원 내각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됐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동포들의 거주지역과 교통·통신이 원활하지 않았고, 중국, 소련, 미국 등 주변국가들은 방해, 방관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헌정을 기초로 한 민주 공화정부 체제는 운영 미숙으로 내부 갈등이 잦았고 국민적 지지 기반도 취약했다.

급기야 중일전쟁(1937년)이 발발했다. 임시정부가 중국 각처로 돌아다니게 되자 독립운동에 적지 않은 차질이 생겼다. 그러나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 민족의 강인한 독립의지 덕분에 그 맥은 끊이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특히 광복군을 창설하기도 하는 등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자적인 무장 항일운동을 하던 독립군들은 조직을 통합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와 주변국들의 비협조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임시정부는 강한 군사력을 지닌 독립군을 양성해 독립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40년 임시정부 산하에 정규군인 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서 활동하던 애국 청년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광복군은 1938년에 조직되어 독립전쟁을 벌이던 김원봉의 조선 의용대를 흡수해 3개 지대로 전력을 강화했다. 광복군의 총사령관은 지청천, 참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의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와 연계해 한반도 안과 밖에서 독립운동의 맥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의열단과 북로군정서군이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 지린성에서 급진적인 민족주의노선을 표방하며 조직된 비밀 항일독립운동단체다.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의열단이 조직됐다.

북로군정서군의 청산리대첩은 널리 알려진 무장독립운동이었다.

북로군정서군의 청산리대첩. [연합뉴스]
북로군정서군의 청산리대첩. [연합뉴스]

1920년 각각 김좌진과 홍범도가 이끄는 북로군정서군과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간도에 출병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대파했다.

그동안 굵직한 항일운동만 알려져 있지만, 1919년 3월 이후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등장했다.

1920년대에는 천마산대(1919, 최시흥) 보합단(1920, 김동식) 구월산대(1920. 이명서) 신간회(1927)가 결성됐다. 해외에서는 서로군정서(1919. 이상룡 이탁 ) 대한독립단(1919. 박장호 조맹선) 광복군사령부(1920 조병준 안병찬) 광복군총영(1920) 대한통의부(1922) 대한독립군(1919. 홍범도) 육군주만참의부(1923. 백광운) 정의부(1923. 오동진) 신민부(1925.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정서) 조선혁명당(1929) 한국독립당(1930. 이청천 홍진) 한국혁명당(1929. 윤기섭 신익희) 한국독립당(1930, 이동녕 김구 안창호)이 등장했다.

이어 의열단, 한국독립당, 신한혁명당, 조선혁명단, 광복단이 통합해 조선민족혁명당이 1935년 출범한 것을 비롯, 한국독립군(1932. 지청천) 조선혁명군(1932, 양세봉) 한국국민당(1935. 한인애국단+임시정부 고수파)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1937. 조소앙 이청천) 조선민족전선연맹(1937. 김원봉) 조선의용대(1938. 김원봉) 전국연합진선협회(1939. 김구 김원봉) 동북인민혁명군(1933) 동북항일연군(1936. 동북인민혁명군) 등이 결성돼 항일투쟁을 펼쳤다.

1940년대 들어서는 한국독립당(1940,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 화북청년연합회(1941, 최창익 허정숙) 조선독립동맹(1942, 김두봉 무정 최창익) 조선의용군(1942, 김두봉 무정 박효삼) 등이 활약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무장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한 것은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이었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에서 창설된 군대였다. 한국광복군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과 연계해 한국을 점령하는 작전까지 추진했다.

전세계가 자유주의-공산주의로 양분되면서 독립 활동단체들도 이념문제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재중 한국 독립운동 단체는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전위동맹, 조선혁명자연맹, 조선노농총동맹, 조선농민총동맹 등 사회주의 계열과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광복군 등 민족주의 계열로 나뉘게 된다.

좌우익의 민족독립운동을 합작하여 단일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났다. 민족유일당 운동이었다.

▶강한 '대한정신'으로 이어온 민족... 촛불혁명으로 새로운 혁명의 역사 쓰다 

일제 36년은 투쟁의 36년이기도 했다.

해방을 우리 손으로 얻어내지는 못했지만, 끊임없는 투쟁이 없었더라면 제2차 세계대전 후 우리 민족은 훨씬 험난한 행로를 겪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한 역사학자는 "수천년의 역사에서 유약한 민족이 타민족에 흡수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며 "일제강점기 동안 우리 민족이 중국을 중심으로 끊임없이 투쟁했기 때문에 열강들도 그 존재감을 인정했고, 일본 패전 후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연합뉴스]
민족의 비극 한국전쟁. [연합뉴스]

1948년 해방과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양분됐다.

자유당을 거쳐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고삐를 죄기 시작, ‘한강의 기적’을 일궜다. 그러나 1960~70년대는 정치적 암흑기였다.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거쳐 1988년 민선대통령 시대가 열리며 대한민국은 민주국가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1997년 사상 최초로 IMF 시대를 맞기도 했던 대한민국은 전국민적 노력으로 국가부도 위기를 극복해냈다.

전세계에서 유례없는 평화혁명인 '촛불혁명'을 거쳐 2017년 5월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국민 중심 정치’시대를 써나가고 있다.

하지만 한 때 꽃을 피우려던 남북경협, 정치적 교류는 북한의 핵개발, 북미 정상회담 결렬 등 악재로 우리 민족의 숙제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촛불혁명 [연합뉴스]
2016년 12월 촛불 시위. [연합뉴스]

<대한민국 근현대사 주요 연표>

 1905년-을사조약 강제 체결
 1905년-장지연,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 발표
 1905년-손병희,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
 1906년-통감부 설치, 이토 히로부미 부임
 1907년-국채보상운동 시작
 1907년-헤이그밀사사건
 1907년-한일신협약 체결
 1908년-전명운ㆍ장인환, 스티븐스 저격
 1908년-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1909년-나철, 대종교 창시
 1909년-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암살
 1910년-한일병합조약 조인 공포
 1911년-신민회, 105인사건
 1913년-안창호, 흥사단 조직
 1915년-대한광복회 결성
 1916년-박중빈, 원불교 창설
 1918년-토지조사사업 완료
 1918년-대한독립선언서 발표
 1919년-2ㆍ8독립선언
 1919년-3ㆍ1운동 시작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년-제암리학살사건
 1920년-김좌진, 청산리전투
 1920년-유관순 옥사
 1923년-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 개최
 1923년-조선물산장려회 창립
 1923년-일본에서 관동대지진 발생하여 동포 대학살
 1926년-6ㆍ10만세운동 시작
 1927년-신간회 창립
 1928년-한글날 제정
 1929년-국민부 조직
 1929년-광주학생운동
 1932년-이봉창ㆍ윤봉길 의거
 1933년-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통일안 발표
 1934년-조선농지령 공포
 1935년-민족혁명당 결성
 1936년-손기정,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
 1940년-창씨개명 실시
 1940년-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창설
 1942년-조선어학회사건
 1943년-카이로회담, 한국의 독립 약속
 1944년-얄타회담, 한반도문제 언급
 1945년-8ㆍ15광복
 1945년-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수립 공포
 1946년-조선정판사위폐사건
 1946년-미소공동위원회 개최
 1946년-대구폭동사건
 1947년-유엔한국위원단 구성
 1948년-제주도4ㆍ3사건
 1948년-5ㆍ10선거, 대한민국정부 수립
 1949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발족
 1949년-김구 피살
 1950년-6ㆍ25전쟁 발발
 1951년-거창양민학살사건
 1952년-제1차 한일회담 개최
 1952년-거제도포로소요사건
 1952년-국제구락부사건
 1952년-발췌개헌
 1953년-휴전협정 조인
 1957년-어린이헌장 선포
 1960년-3ㆍ15부정선거
 1960년-4ㆍ19혁명
 1960년-제2공화국 수립
 1961년-5ㆍ16군사정변
 1962년-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63년-제3공화국 발족
 1963년-박정희 대통령 취임
 1964년-6ㆍ3사태
 1964년-베트남 파병
 1965년-한일 국교정상화
 1965년-이승만 사망
 1966년-불국사 석가탑에서 다라니경 발견
 1967년-제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68년-1ㆍ21사태
 1968년-향토예비군 창설
 1970년-새마을운동 시작
 1971년-무령왕릉 발굴
 1972년-7ㆍ4남북공동성명
 1972년-남북적십자회담
 1972년-10월유신
 1972년-제4공화국 수립
 1972년-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72년-《직지심경》 발견
 1973년-6ㆍ23평화통일선언
 1973년-김대중피랍사건
 1973년-경주고분에서 신라 금관과 천마도 발굴
 1974년-육영수 피살
 1974년-북한 땅굴 발견
 1977년-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1978년-KAL기, 소련 무르만스크 강제 착륙
 1979년-10ㆍ26사건
 1979년-12ㆍ12사태
 1980년-5ㆍ18광주민주화운동
 1980년-한국방송공사(KBS), 컬러텔레비전 첫 방영
 1981년-제5공화국 출범
 1981년-전두환 대통령 취임
 1982년-서울국제무역박람회 개최
 1983년-KAL기 피격사건
 1983년-아웅산묘소폭파암살사건
 1985년-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단 상호 교류
 1986년-서울아시안게임 개최
 1987년-독립기념관 개관
 1987년-남극 세종과학기지 건설
 1987년-대통령직선제 헌법개정
 1988년-노태우 대통령 취임
 1988년-제6공화국 출범
 1988년-서울올림픽 개최
 1989년-폴란드와 수교
 1989년-헝가리와 수교
 1990년-소련과 국교 수립
 1991년-걸프전쟁 파병
 1991년-남북한 유엔 가입
 1992년-중국과 국교 수립
 1992년-베트남과 국교 수립
 1992년-황영조, 바로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우승
 1992년-우리별 1호 발사
 1993년-김영삼 대통령 취임
 1993년-소말리아에 유엔평화유지군(PKO) 파견
 1993년-대전엑스포 개회
 1993년-우리별 2호 발사
 1994년-북한, 김일성 사망
 1994년-성수대교 붕괴
 1995년-무궁화위성 발사
 1995년-광주비엔날레 개최
 1995년-불국사ㆍ8만대장경ㆍ종묘,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1995년-삼풍백화점붕괴사고
 1995년-북한, 대홍수 발생
 1995년-노태우ㆍ전두환,전직대통령비자금사건구속
 1995년-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비상임이사국 선출
 1996년-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 결정
 1996년-북한 잠수함무장간첩 침투
 1996년-OECD 가입
 1997년-북한의 황장엽 노동당서기관 망명
 1997년-북한에 구호식량 원조
 1997년-대한항공 여객기 괌섬 추락
 1997년-IMF 외환위기 돌입
 1997년-노태우ㆍ전두환 전직 대통령 사면
 1998년-김대중 대통령 취임
 1998년-박세리, 세계골프대회 연승 기록
 1998년-한일어업협정 회담
 1998년-금강산 관광선 현대금강호 첫 출항
2000년- 고창, 화순, 강화 고인돌 유적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2017년- 촛불혁명으로 문재인 정부 출범

[위키리크스한국=황양택, 이경아 기자]

한반도의 심장 대한민국 서울. [연합뉴스]
한반도의 심장 대한민국 서울.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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