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정신 100년] 살얼음판 같은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 북ㆍ미 '샌드위치' 처한 문재인 정부의 해법은
[대한정신 100년] 살얼음판 같은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 북ㆍ미 '샌드위치' 처한 문재인 정부의 해법은
  • 조문정 기자
  • 기사승인 2019.03.28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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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정신 100년- 대도약 코리아로! (중)
북핵문제 어디로 갈 것인가. 제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한반도 정세가 요동치고 있다. [연합뉴스]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의 봄'은 언제 올 것인가.

정권 유지를 위해 핵을 절대 놓지 않으려는 북한, '경제지원 할테니 백기 투항하라'고 요구하는 미국, 북한을 앞세워 세계 패권을 노리는 중국, 한반도에 평화체제 구축을 꾀하려는 한국...

1953년 한국 전쟁 휴전협정 이후 한반도는 관련국 간 첨예한 이해가 충돌하면서 중동과 함께 '세계의 양대 화약고'로 평가받아왔다. 북핵문제로 '공습 초읽기'까지 치달았던 한반도 정국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평화의 시대로 방향을 트는 듯 했다. 그러나 달아오르던 평화모드는 지난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후 급속히 냉각되는 상황이다. 

북미정상회담이 결렬된 후 워싱턴 조야는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의문을 갖는 분위기다. 회담 직후 북한이 우라늄농축시설을 은폐하고 있다는 징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북미간 상황이 악화될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한국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 낀 '샌드위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우선 한ㆍ미 문제다. 그동안 청와대와 백악관은 긴밀하게 협의해 온 듯 했으나, 최근 대북정책을 놓고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미국은 대북 압박을 강화하려 하는데, 우리 정부는 3.1절 경축사에서 개성공단 재가동과 금강산관광 재개 등 남북경협 의지를 강조한 바 있다. 미국 재무부가 최근 공개한 북한과의 불법환적 의심 선박 명단에 한국 국적의 ‘루니스(Lunis)’ 호가 오르자 이러한 우려는 더욱 커졌다.

북한은 '북한식' 돌직구 전법으로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22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했다.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미 설득을 압박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다 23일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추가 대북제재를 철회한다’고 밝히자 북한은 이틀 뒤 일부 인원을 복귀시킨 상황이다.

북한은 대외선전매체들을 내세워 ‘당사자 역할을 하라’며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워싱턴에서는 우리 정부의 ‘중재자론’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다.

2005년 6자회담 수석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 전 미국 국무부 아태담당 차관보는 국내 언론에 “미국의 동맹이자 밀접한 관계인 한국이 중재자가 되겠다는 건 미국과 다른 입장을 시사한다. 한국 정부가 미국과 다른 접근을 하는 것처럼 비치지 않도록 긴밀하게 조율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콧 스나이더 미국 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도 “한국이 메신저가 될 순 있겠지만 중재자가 되려고 해선 안 된다”며 “한국 정부가 북ž미 사이에서 해야 할 것은 중재가 아닌 촉진”이라고 조언했다.

▷북핵의 실체 논란... 방어용인가? 공세용인가?

‘하노이 노딜’ 이후 한미 공조 엇박자론에 이어 균열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효율적인 해법을 찾아나가기 위해서는 지난 30여년 간의 북핵 협상역사를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북한은 불량국가(rogue state),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불리며 국제사회의 고강도 제재를 받으면서까지 지난 30년간 핵개발에 매달려왔다.

남한과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한 북한으로서는 내부결속을 강화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핵개발에 따른 제재 상황을 강조하는 것만큼 좋은 것이 없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또한 핵을 통해 대남 군사적 우위를 회복해 남북관계에서 목소리를 내며, 대미 억지력을 확보해 체제안전을 보장받으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진단이다.

북한의 주장대로 냉전체제 해체 후 미국의 적대시정책에 맞서 핵무장을 선택했다는 '방어론'도 있고,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에 나선 1970년대 후반 국제정세상 공격적으로 핵무장에 나섰다는 '공세론'도 있다.

[그래픽=연합뉴스]
[그래픽=연합뉴스]

우선 북한 측이 주장하는 '방어론'이다.

방어론은 1991년 말 구소련이 붕괴하면서 냉전체제가 종식된 사실에 중점을 뒀다. 1990년 9월 30일 한ㆍ소 수교에 이어 1992년 8월 24일 한ㆍ중 수교까지 이뤄졌다. 구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체제안전과 경제지원을 받던 북한은 안보ㆍ경제ㆍ식량ㆍ에너지 등 총체적 위기, 그에 따라 정권ㆍ체제 위기에 직면했다. 국제사회에서 고립되면서 생존의 위협을 느낀 북한이 핵개발에 매진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 공세론이 더 우세한 상황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생존이나 체제유지 등 방어용이라기보다는 공세적인 대남전략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다.

'공세론'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핵개발의 출발선. 북한이 1990년대가 아니라 이보다 40년이나 앞선 1950년대부터 전략적으로 핵무장을 추진했다는 것이다.

일제 해방~한국전쟁 이후 북한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남한보다 높았다. 공업화 초기조건이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비결은 제국주의 일본이 남기고 간 중공업 시설과 광물 및 수력자원 등 공업발달에 유리한 조건과 사회주의 맹주국인 구소련과 중국의 지원이었다.

신흥공업국가로 승승장구하던 북한은 1955년 12월 과학원 내에 최초의 핵연구시설인 '핵물리연구실'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1956년 2월에는 소련과 ‘연합 핵 연구소 조직에 관한 협정’을, 3월에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맺고, 소련 드브나(Dubna) 핵연구소에 최학근이라는 핵물리학자를 파견했다.

그러던 중 1961년 쿠바 미사일 사태가 터졌다. 사회주의권의 맹주인 소련이 미국의 핵위협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고 김일성 주석은 충격을 받아 독자적인 핵무장을 결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1962년 영변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1963년 6월 소련으로부터 2MW 연구용원자로 IRT-2000을 도입했다. 1964년 2월 영변에 원자력 연구단지를 설립하고, 1965년 IRT-2000 연구용 원자로를 완공해 가동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개발기술을 전수받고자 했으나 거절당한 후 1960년대 소련에게서 이전받은 핵기술을 토대로 독자적인 핵무기를 추진했다. 이어 1979년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도 모르게 영변에서 5MW 실험용 원자로를 비밀리에 건설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본격적으로 핵무장을 추진한 1970년대 중후반의 국제정세는 북한에 유리하게 전개된 측면이 강했다. 당시 인도차이나반도와 아프리카 대륙이 공산화되면서 공산진영은 최고의 위세를 떨쳤다.

북한은 1974년 남침 땅굴을 건설하고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으며, 1976년에는 판문점에서 도끼만행사건까지 일으켰다. 반면 한국은 1976년 카터 미 행정부의 주한 미 지상군 전면철수 발표에 따라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1979~1981년 박정희 암살사건ㆍ​​​​​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두환 신군부 집권 등 남한의 정치 상황이 요동치는 동안 북한은 정치적으로는 안정된 반면 경제는 뒤틀리기 시작했다. 1980년대에 들어 심각한 전력난에 빠지게 된 것이다. 

북한은 우라늄을 이용한 전력생산을 추진하기 위해 소련에 원조를 요청했다. 1985년 12월 소련과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관한 경제기술협력협정’을 체결했고, 소련의 요구에 따라 자발적으로 NPT에 가입했다. 함경남도 신포에 총 1950MW급 소련산 경수로 3기를 건설하기로 했다.

한편으로 북한은 영토의 동쪽인 신포에서는 순수 전력용 평화적 핵개발을, 영토의 서쪽인 영변에서는 비밀리에 흑연로 3기(5MW, 50MW, 200MW)를 건설하며 핵개발을 추진했다. 훗날 제네바 핵협상에서 북한은 ‘군사용’인 영변 핵시설을 포기하는 데 따른 ‘전력생산 손실’을 이유로 경수로를 요구했다.

2일 촬영된 북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상업 위성사진 [사진=연합뉴스]
북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 상업 위성사진 [사진=연합뉴스]

'평화용ㆍ공격용 핵 쌍끌이작전' 구사하던 북한의 꼬리가 잡히기 시작했다.

1989년 2월 미국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영변 핵시설의 존재를 소련과 러시아, 한국에 알렸다. 그 해 9월 프랑스 상업위성 SPOT 2호가 촬영한 영변 핵시설 사진이 언론에 공개됐다. 북핵 문제는 이제 국제문제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북한이 1993년 NPT 탈퇴 성명을 발표하면서 제1차 핵위기가 발생한다.

제1차 핵위기는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합의로 서둘러 봉합된다. 북한은 제네바합의에 따라 경수로 중요 부분 완공 시까지 IAEA의 핵사찰로부터 면제됐고, 핵동결의 대가로 연간 50만 톤의 중유를 받았다. 핵동결을 대가로 핵무기 완성을 위한 시간도 벌고 중유도 얻은 셈이다.

제네바합의는 2002년 말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이 발각되면서 붕괴되고 말았다. 이후 북한은 '언제든지 핵을 놓을 수 있다'고 표방하고 있으나, 내부적으로는 '어떤 경제적 혜택이 있더라도, 어떤 위협이 닥치더라도 핵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방침을 고수하며 미국 및 국제사회와 협상을 벌여왔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하노이회담에서 나타난 북핵협상의 태생적 한계…제네바합의 파기의 악몽?

지난 2월 28일 하노이회담 직후 트럼프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북한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앞으로도 얼마나 험한 길을 가야 할 것인지 방향성을 시사해줬다.

트럼프 대통령은 ‘영변+α(플러스알파)를 원했느냐’는 물음에 “나오지 않은 것 중에 우리가 발견한 게 있었는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부분도 있었다"고, '우라늄농축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냐'는 물음에 "그렇다. 우리가 알고 있던 것에 대해 북측이 놀랐던 것 같다. 첫 단계(영변 핵시설 폐기)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 레벨까지 포기하려고 했다면 서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말 제네바합의 파기의 원흉이었던 우라늄농축시설 문제가 실무협상에서부터 제대로 협상테이블에 올라보지도 못한 것으로 알려진다.

2002년 10월 3일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차관보는 평양을 방문해 김계관 당시 북한 외무성 부상에게 ‘북한이 고농축우라늄(HEU)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추진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다음 날 강석주 당시 외무성 제1부상은 HEU 프로그램 보유를 시인했고, 11월 14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위원회는 대북 중유공급 중단을 발표했다. 북한은 12월 12일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핵동결 전면해제를, 이어 2003년 1월 10일 NPT 탈퇴를 선언했다.

이렇게 제네바합의가 파기된 이후 HEU 문제는 그 어떤 합의문에도 담기지 못했다. 6자회담에서도 거론되지 못했고, 9.19 공동성명, 2.13 합의, 10.3 합의 등도 영변 핵시설만을 대상으로 담았을 뿐이다.

북한 비핵화 [사진=연합뉴스]
교착된 북미 핵협상. [사진=연합뉴스]

문제는 우라늄농축시설의 특성상 북한이 어디에, 어느 규모의 우라늄농축시설을 숨기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플루토늄탄은 폐연료봉을 재처리하는 데 매우 큰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라늄탄은 천연우라늄을 정제해 농축한 HEU를 원료로 하는데다 부지 900㎡에 1,000대의 원심분리기만 설치하면 연간 핵무기 1개를 만들 수 있으니 은닉이 용이하다.

북한은 2000년대 초부터 건설한 우라늄농축시설을 통해 핵물질을 생산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 국방정보국(DIA)은 2018년 6월 북한이 평양 인근 강선(강성)에 영변 농축시설의 2개에 달하는 제2우라늄 농축시설을 비밀리에 가동 중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영변 핵시설을 동결하든 해체하든 북한의 우라늄 생산에는 큰 지장이 없다.

물론 북한은 2010년 11월 해커 박사 등 미국 과학자 대표단에게 원심분리기 1,000개 규모의 영변 우라늄농축시설을 공개했다. 그러나 이용준 전 북핵담당대사는 작년 말 발간한 저서 ‘북핵 30년의 허상과 진실’에서 이 시설이 유사시 동결이나 폐기 등 외교적 흥정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대외전시용이라고 지적했다. 북한은 상당한 반대급부를 전제로 이 시설을 신고하고 폐기하더라도 나머지 농축시설들을 은닉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영변 핵시설에는 플루토늄을 생산하는 5MW 원자로와 재처리 시설, 핵연료봉 생산 시설, 그리고 고농축 우라늄(HEU) 생산을 위한 수 천 개의 원심분리기 등 15개의 핵 시설과 건물 390개가 포함된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영변에서는 플루토늄 외에도 농축우라늄 방식의 핵개발을 해왔다. 영변 핵시설이 북한 내 우라늄 농축시설의 전부가 아닐 것이라고 추정된다”며 영변이 북한 핵능력의 50% 정도를 차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픽=연합뉴스]
[그래픽=연합뉴스]

▷북한의 핵개발 - 유엔 대북제재의 숨바꼭질… 숨통 조여온 북한경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는 북한의 제1차 핵실험이 있었던 2006년부터 2015년까지의 대북제재와 2016년부터 2017년까지의 제재로 나뉜다. 북한에 가장 큰 타격을 준 제재는 2016년 이후 채택된 2270호를 비롯한 다섯 개의 제재다. 2016년을 기점으로 유엔 안보리가 대북 제재의 범위를 WMD 이전에서 경제 일반으로 확대해 북한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은 하노이 정상회담 결렬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우리가 요구하는 것은 전면적인 제재 해제가 아니라 일부 해제, 구체적으로는 유엔 제재 결의 총 11건 가운데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채택된 5건 그중에서 민수경제와 인민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리 외무상이 언급한 다섯 가지 제재는 2270호, 2321호, 2371호, 2375호, 2397호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 제재들로 민생목적 이외의 광물수입, 북한산 석탄ㆍ철ㆍ철광석ㆍ수산물ㆍ섬유제품 등의 수출이 전면 금지됐고 북한 노동자의 신규 고용과 외국 금융기관의 대북 거래가 제한돼 북한의 외화수입 대부분이 차단됐다. 북한에 대한 연간 원유공급상한선은 400만 배럴로, 정유제품의 연간 공급 상한선은 두 차례에 걸쳐 50만 배럴로 낮춰 북한을 옥죄어왔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의 실효성이 2017년 3월부터 상대적으로 급격히 증가해 2017년 북한의 대중국 수출이 37.3% 감소했고 수입은 4.3% 늘었다. 경제제재의 효과는 북한 광물 수출제재, 수산물, 의류ž섬유 관련 제재, 해외파견근로자 관련 제재, 해외 파견 근로자 관련 제재, 원유ž정제유 수입 제재, 합작투자 제재 순으로 높았다.

또한 중국의 관세청 격인 ‘해관총서’에 따르면 북한의 대중국 무역수지 적자가 2017년도 16억7,000만 달러에서 2018년도 19억7,000만 달러로 늘어났다. 북중 양국의 무역규모가 공개되기 시작한 1998년 이래 최대 규모의 적자다. 여기에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해 2월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북한산 석탄을, 8~9월에는 광물과 해산물, 섬유제품 수입을 금지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는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과 결합해 시너지를 냈다.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 9월 21일 북한과 무역 또는 금융 거래를 하는 개인, 기업, 금융기관에 대해 세컨더리 보이콧을 규정한 광범위한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미국 뿐 아니라 제3국의 개인, 기업, 금융기관에까지 적용돼 중국 은행과 기업들은 물론 북한과 경제관계를 맺은 모든 국가와 회사에 영향을 미쳤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사진=연합뉴스]

▷제1차·제3차 북핵위기 ‘평행이론설'…북한의 협상전략은?

북핵 위기는 1차(1993~1994년) 2차(2002~2003년) 3차(2017년~ )로 나뉜다. 2017년 시작된 제3차 북핵위기는 1994년 제1차 북핵위기와 공통점이 있다.

1994년 제1차 북핵위기 당시 북한은 영변 5MW 원자로에서 플루토늄을 추출한 것이 들통나자 NPT에서 탈퇴했다. 그해 북한은 연료봉 재처리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약 한 달에 걸쳐 5MW 원자로의 연료봉 8,000개를 마구 섞어 인출했다. 연료봉을 원자로에서 제거해 훗날 IAEA가 핵사찰을 하더라도 북한의 ‘과거핵’ 활동을 정확히 규명하기 어렵게 됐다. 인출된 연료봉을 재처리해 플루토늄을 언제든 추출할 수 있게 됐으니 북한으로서는 '일석이조'였다.

이에 미국이 유엔 안보리 제재를 추진하자 김일성 주석은 1994년 6월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평양에 초청해 카터에게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도 능력도 필요도 없다’고 강조하며 북미 고위급회담 개시를 주장했다. 당시 백악관에서 국가안보회의를 열고 대북 제재조치 추진을 최종 승인하려던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의 계획은 백지상태로 돌아갔다.

북한은 카터 전 대통령을 통해 김영삼 대통령에게 ‘언제 어디서든 조건 없이 가급적 이른 시기에 남북정상회담에 응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한국 정부가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수락하는 마당에 미국 정부가 대북제재를 추진할 명분은 사라졌다. 정상회담은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 사망으로 물거품이 됐고, 북한이 무단인출한 핵연료봉 8,000개는 북한의 전리품으로 남았다.

버락 오바마 정부를 거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2017년초 취임하면서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북한에 대해 직접 공습까지 시사하면서 강도 높게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1차 북핵위기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을 초청했던 북한은 2017년 12월 초 제프리 펠트만 유엔 정무담당 사무차장을 평양에 초청했다.

2018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 의사를 밝히며 문재인 대통령의 ‘베를린 구상’에 화답했다. 2018년 4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이어 6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을 발판으로 북한은 미국의 무력 압박에서 벗어나 수소탄과 ICBM을 손에 쥐고 위기에서 벗어났다.

북한이 포기하겠다고 한 것들도 있다. 북한은 지난해 5월 풍계리 핵실험장을 폭파했으며, 지난해 9월 ‘남북평양공동선언’에서는 동창리 엔진시험장과 미사일 발사대 폐기, 그리고 미국의 상응조치에 따른 영변 핵시설 영구 폐기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북한이 이미 핵실험을 여섯 차례나 실시했고 수소탄 실험까지 끝낸 마당에 풍계리 핵실험장이 더는 필요하지 않으며, 영변 핵시설은 이미 공개돼 숨길 필요가 없는 ‘(흥정을 위한) 대외 전시용’이라고 지적한다.  

이용준 전 북핵담당대사는 "북한의 전략은 먼저 남한과의 화해를 통해 대북한 연합전선을 분열시키고 중국을 방문해 제재완화 문제를 우호적으로 해결해 숨을 좀 돌린 후, 마지막으로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핵군축 협상을 갖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2017년 5월 취임 이후 '한반도 운전자론'을 주창하며 북한과 미국을 대화의 테이블로 이끌어낸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의 핵시설 공습→북한의 보복 공격→한반도 대격랑'의 위기를 해소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북한과 미국 양쪽으로부터 '문재인 정부는 어느 편인지 확실한 입장을 취하라'는 메시지를 받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향후 과제와 관련, 홍 민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은 "북한과 미국이 자존심을 걸고 기 싸움을 하는 상황에서 한국이 북미 양자가 회담을 재개할 명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북한의 체제상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결정구조상 실무회담에서 비핵화 문제를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므로 북미 간 3차 정상회담이 이뤄지도록 조율자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는 설명이다.

그는 "최근 한국이 지나치게 북한과 공조하면 제재가 무력화된다고 여기는 트럼프 행정부의 시각도 확산되고 있어, 이같은 새로운 흐름까지 감안해 면밀한 대응책을 짜나가야 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새로운 도전적 상황을 맞은 문재인 정부는 어떤 전략으로 북핵 난국을 타개할 것인가. 전세계가 비상한 시선으로 주목하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조문정 기자]

북한 핵 시설 [사진=연합뉴스]
북한 핵 시설 [사진=연합뉴스]

 

supermoon@wikileaks-kr.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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