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정의 외교 프리즘] 南北美 정상은 어떻게 ‘톱다운’의 함정에 빠졌는가 
[조문정의 외교 프리즘] 南北美 정상은 어떻게 ‘톱다운’의 함정에 빠졌는가 
  • 조문정 기자
  • 승인 2019.04.13 08:51
  • 수정 2019.04.14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싱가포르회담, 北의 승리
하노이회담, 美의 승리
반면교사도 못하는 한국 외교
남북미 정상[일러스트=연합뉴스]
남북미 정상[일러스트=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빈손 회담’을 마치고 ‘빈손 귀국’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빈손은 아니다. 미국에 대규모 무기 구매를 약속했다니까. 야당은 ‘뜬구름 정상회담’이라고 비난했다. 친정부 인사들의 반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렬한 기시감(déjà vu, 旣視感)이 든다. 무대와 주인공, 그리고 승자와 패자가 달랐을 뿐 싱가포르회담, 하노이회담, 워싱턴에서 열린 이번 한미정상회담 모두 빈손 회담이었다.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는 이유가 뭘까? 기자는 ‘톱-다운’ 방식에 임하는 남ㆍ북ㆍ미 정상의 지나친 자신감 때문이라고 진단해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문재인 대통령은 각각 싱가포르에서, 하노이에서, 워싱턴에서 톱다운 방식에 대한 본인의 능력을 과신하거나 상대방의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공동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사진=싱가포르 AFP=연합뉴스]
지난 6월 12일 공동합의문에 서명한 뒤 악수하는 트럼프-김정은[사진=싱가포르 AFP=연합뉴스]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은 1994년 제네바합의에 이은 ‘북한의 승리’였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비핵화를 약속했다. 싱가포르 공동선언에는 ‘북한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한다’는 문장이 담겼다. 새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 1994년 6월 15일 김일성 주석 역시 방북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은 핵무기를 개발할 의지도, 능력도, 필요도 없다”고 구두약속을 해놓고 핵개발을 하지 않았던가. 이후 약 24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오히려 백 보 후퇴한 듯했다. 그래도 1991년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 1994년 제네바합의, 2005년 9.19 공동성명, 2012년 2.29 합의는 북한으로부터 구체적인 비핵화 약속을 받아내기는 했다. 물론 이행은 안 됐지만.

그런데 새로운 것이 있기는 있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라는 곱디고운 포장지 안에는 ‘남한까지 포함한 한반도 전역의 완전한 비핵화’, 즉 ‘미국의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지 말라’는 본질이 들어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이어 또다른 공허한 약속을 하는 북한의 젊은 지도자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연습(War games)’이란 다소 불확실한 용어로 ‘한미연합훈련 유예’라는 선물을 안겨줬다. 우리 정부와 사전 조율도 거의 없었다고 알려졌다. 우리는 그렇게 날벼락을 맞았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과 함께. 협상에서 져본 적이 없다는 타고난 사업가이자 ‘더 큰 핵버튼’을 가진 그가 되려 ‘꼬마 로켓맨’보다 몇 수 아래인 듯했다. 워싱턴 조야는 물론이고 전 세계 언론까지 ‘트럼프 대통령이 비판하던 이전의 합의보다도 못하다’고 비판했다. 북한 외교관들이 회담을 앞두고 트럼프 대통령의 자사전인 ‘거래의 기술(The Art of the Deal)’을 탐독했다더니 역시 공부해서 나쁠 것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반면 거래의 대가라는 트럼프 대통령이 본인을 과신한 나머지 상대방에 대해 공부하지 않고 ‘톱다운 협상’에 너무 자신만만하게 임했던 것 아닐까?

단독 정상회담 중 심각한 표정의 트럼프-김정은[사진=AFP=연합뉴스]
단독 정상회담 중 심각한 표정의 트럼프-김정은[사진=AFP=연합뉴스]

하노이회담은 ‘미국의 승리’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이 ‘영변 핵시설 폐기’ 카드를 내밀며 ‘대북제재 전면 해제’, 혹은 (북한의 주장대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채택된) ‘민수용 대북제재 해제’를 요구하자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다. 그는 하노이회담 결렬 후 숙소인 하노이 JW메리어트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영변 핵시설보다 플러스알파를 원했다. (협상테이블에) 나오지 않은 것(핵시설) 중 우리가 발견한 게 있었다.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북한이 놀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다급해진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은 심야에 돌발 기자회견을 열고 회담 결렬을 미국 탓으로 돌렸다. ‘최고존엄’이 ‘왕복 130시간, 왕복 8,000km’ 장거리 이동을 했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 돌발 기자회견도 최악의 수였다. 북한의 아킬레스건이 ‘대북제재’임을 미국과 전 세계에 공언한 셈이 됐다.

북핵 위기 때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라고 말하듯 유유히 빠져나간 외교의 대가(大家)인  북한이 하노이에서는 왜 패배했을까? 리 외무상과 최 부상, 그리고 김 위원장은 싱가포르회담 이후 ‘트럼프 상대하기’에 자신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북한은 정상회담에서 원하는 것을 한 큐에 얻고자 그동안 북미 간 실무회담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피했던 것 같다. 사실 모든 것이 톱다운 방식으로 결정되는 북한의 체제상 북핵 문제도 톱다운 방식으로 풀어야 하는 것은 맞다.

그렇지만 하노이회담에서 김 위원장은 ‘자신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사랑(?)’을 믿고 너무 앞서나간 듯했다. NBC 뉴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하노이 정상회담에 앞서 ‘오직 트럼프 대통령만이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아첨을 담은 서한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북핵 협상 논의에서 배제하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일대일 담판’을 통해 유리한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 위원장도 트럼프 대통령도 각각 싱가포르회담에서 그리고 하노이회담에서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를 실천했다. 그래서 한 번씩 승리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싱가포르회담 이후 절치부심한 것 같다. 그는 빈손으로 돌아갔지만 여야로부터 초당적인 찬사를 받았다. 트럼프 대통령과 각을 세워온 민주당 소속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 마저도 “김정은의 작은 제안에 트럼프 대통령이 아무 것도 주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며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없이 제재 해제를 원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그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기쁘게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는 커녕 '반면교사(反面敎師)'도 못할까?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트럼프 대통령 부부[사진=청와대]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트럼프 대통령 부부[사진=청와대]

문 대통령은 ‘굿이너프딜’과 ‘연속적 조기수확론’이라는 카드를 들고 무리한 일정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 하노이회담 결렬 후 한 달여 지난 시점에 이뤄지는 한미 정상회담이라 애당초 이른 감이 있었다. 4.27 판문점선언 1주년을 계기로 제4차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기 위한 무리한 일정이었다. 그러나 정부가 이렇게 자신 있게 나설 정도면 한미 간 물밑접촉과 사전 정지작업이 완료된 줄 알았다. 우리야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 등 우리나라 외교ㆍ안보 3인방이 최근 연이어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 3인방은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됐다며 한미정상회담을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때 눈치챘어야 했다. 이 3인방이 연이어 미국으로 향한 것을 긍정적으로만 볼 이유가 없었다는 것을. 트럼프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다양한 스몰딜이 단계적으로 이뤄질 수는 있다. 다만 현시점에서 우리는 빅딜에 관해 논의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빅딜’을 통한 북한의 비핵화라는 기존 입장을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못을 박은 셈이다. 양 정상의 단독회담은 2분도 채 되지 않았으며, 공동 기자회견도 공동 언론 발표문도 없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면 뭔가 다를 거라고 기대했던 것일까?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부부 동반 모임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톱다운 방식’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교훈과 함께.

[위키리크스한국=조문정 기자]

supermoon@wikileaks-kr.org

기자가 쓴 기사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127, 1001호 (공덕동, 풍림빌딩)
  • 대표전화 : 02-702-2677
  • 팩스 : 02-702-16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소정원
  • 법인명 : 위키리크스한국 주식회사
  • 제호 : 위키리크스한국
  • 등록번호 : 서울 아 04701
  • 등록일 : 2013-07-18
  • 발행일 : 2013-07-18
  • 발행인 : 박정규
  • 편집인 : 박찬흥
  • 위키리크스한국은 자체 기사윤리 심의 전문위원제를 운영합니다.
  • 기사윤리 심의 : 박지훈 변호사
  • 위키리크스한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위키리크스한국. All rights reserved.
  • [위키리크스한국 보도원칙] 본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립니다.
    고충처리 : 02-702-2677 | 메일 : laputa813@wikileaks-kr.org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