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52) ‘포스트 전두환’ 옵션 모색… 그러나 이란에 발목잡히다
청와대-백악관 X파일(52) ‘포스트 전두환’ 옵션 모색… 그러나 이란에 발목잡히다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19-04-22 11: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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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한미 정치 40년 비사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전두환을 권력의 중심에서 축출한다면 누구를 ‘포스트 전두환’으로 할 것인가.

미국 NSC와 CIA는 전두환을 끌어내릴 경우 어떤 대안을 모색할 것인지 부심했다. 미국은 당연히 ‘민간인들에게 권력을 이양시킨다’는 그림을 그렸다. 전두환 제거 이후 국민의 거부감이 적은 인물을 내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3김’을 포함한 민간 정치인들은 전두환 신군부의 탄압으로 싹이 말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내란음모죄로 투옥됐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부정축재자로 몰려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결국 남은 인물은 최규하 당시 대통령 밖에 없었다.

미국은 12.12 이후 최 대통령이 전두환의 꼭두각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최 대통령 특유의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에 미국은 여러 차례 실망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입장에서는 군부 실력자를 축출한 뒤 현직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가장 안정적인 방법일 수 있었다. 하지만 12.12 이후 보여준 최규하의 행동은 실망스럽기만 했다. 미국이 ‘민간인’이 아닌 ‘민간인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한 것은 최 대통령과 신현확 전 국무총리 등 명망가들로 집단지도체제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제3세계에서 민심을 잃은 지도자가 등장했을 때 그 결말을 베트남과 이란에서 처절히 경험했다. 이들 나라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철저히 파괴됐다. 한국에서 똑같은 실패를 겪지 말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전두환 축출을 검토한 이유였다.

당시 카터 행정부의 대한(對韓) 정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나라는 이란이었다. 중동의 대표적 친미국가였던 이란은 1979년 2월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으로 반미국가가 됐다. 카터 행정부는 반미감정 고조로 한국이 ‘제2의 이란’이 되는 것을 실제로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아무리 세계 최강대국이라도 다른 나라의 실권자를 축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미국은 전두환을 축출할 경우 대안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의 우유부단한 자세가 발목을 잡았다. 사진은 1980년 3월 전두환에게 중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최규하 대통령. [연합뉴스]
미국은 전두환을 축출할 경우 대안으로 최규하 대통령을 검토했다. 그러나 그의 우유부단한 자세가 발목을 잡았다. 사진은 1980년 3월 전두환에게 중장 계급장을 달아주는 최규하 대통령. [연합뉴스]

전두환 축출작전이 본격화 할 경우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 한국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던 전두환이 강력히 저항할 것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이었다.

전 위원장에게는 ‘민족주의’와 ‘반미감정’이라는 두개의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이 무기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미 정권 연장에 활용하면서 그 효과가 검증됐던 것들이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12·12사건 이후 ‘우리가 충분히 나서지 않으면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반면에 우리가 일정한 선을 넘으면 강력한 국수주의적 반발이 초래될 수 있다. 이는 매우 어렵고 애매한 문제다’라고 토로했었다.

전두환은 이미 박정희의 정치적 수법을 익히 보아왔던 터라 자신을 미국의 내정간섭의 희생자로 연출한 뒤 반미감정을 자극할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워싱턴 일부 인사들이 한국 군부 내 반(反)전두환 세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자 ‘우리가 제거하려는 까마귀를 대체할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백로를 찾을 수 없다’면서 반대 의사를 재차 강조했다고 회고록에 쓰기도 했다.

축출 공작이 한반도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수 있다는 우려도 컸다. 미국은 역(逆) 쿠데타로 한국 군부 내 심각한 유혈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고 분석했으며 이런 혼란 상황을 틈타 북한이 도발할 가능성도 있다고 예상했다.

당시 국제적인 냉전 체제에서 미국은 한국의 민주화보다 한반도의 안정이 더 중요했다.

종합적 상황을 검토한 카터 행정부는 결국 한국과 미국의 상황을 고려해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1980년 7월 전두환 축출 계획으로 작성한 ‘가능한 정책 옵션들 남한’ 관련 문서. [출처= 미국 디지털 국가안보 기록보관소]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사건은 전두환 축출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이란 과격파 학생 시위대는 1979년 11월 미국이 신병 치료를 이유로 팔레비의 입국을 허용한 것에 분노, 테헤란에 있는 미 대사관에 난입해 외교관과 가족 등 90여명을 인질로 억류했다.

미국 CIA와 백악관이 전두환 축출 계획을 검토했을 때도 인질들은 이란에 잡혀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이 80년 4월 25일 감행한 인질 구출 작전은 작전에 투입됐던 헬기와 급유기의 충돌로 8명의 사망자만 낸 채 끝났다. 미국은 국제적 망신을 샀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에서 전두환 축출 계획을 실행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이다.

이란은 여성 등 일부를 석방하고 끝까지 인질로 잡고 있던 52명을 억류 444일 뒤인 81년 1월 21일 풀어줬다.

미국의 대선일정도 전두환 축출작전에 악재로 작용했다.

전두환 축출 계획이 담긴 백악관 문서가 만들어진 것은 80년 7월. 넉 달 뒤인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축출 계획을 실행하기엔 시간이 부족했고, 정치적 위험 부담도 컸다. 만약 실패라도 했다가는 대선은 결과는 뻔한 일이었다.

이런 저런 상황으로, 전두환 축출 작전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위키리크스한국=이가영, 최석진, 강혜원 기자]

 

<참조 문서>
https://wikileaks.org/gifiles/docs/15/1556806_korea-assassination-history-.html
https://wikileaks.org/plusd/cables/1979SEOUL19088_e.html
http://timshorrock.com/documents/korea-the-cherokee-files-part-one/
https://www.38north.org/2017/10/tshorrock100317/
http://www.eroseffect.com/powerpoints/NeoliberalismGwangju.pdf
https://kr.usembassy.gov/wp-content/uploads/sites/75/2017/05/The-Kwangju-Incident.pdf

6677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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