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정의 외교 프리즘] 외교기밀과 국민의 알 권리
[조문정의 외교 프리즘] 외교기밀과 국민의 알 권리
  • 조문정 기자
  • 승인 2019.05.28 07:39
  • 수정 2019.05.28 09: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근 기자회견에서 한미 정상회담 조율 과정과 통화 내용을 자세히 공개해 논란을 일으켰던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이 23일 오전 여의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청와대 특감반 진상조사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최근 기자회견에서 한미 정상회담 조율 과정과 통화 내용을 자세히 공개해 논란을 일으켰던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이 23일 오전 여의도 국회 원내대표실에서 열린 청와대 특감반 진상조사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최근 한 취재원을 만났다. 말이 취재원이지 대학 선후배 사이라 수시로 편하게 술잔을 기울일 수 있는 사이다. 그런 그가 술자리가 파하고 귀가하는 길에 기자에게 외교 관련 특종 거리를 던져줬다. "쓰지 마라"는 말과 함께. 그래서 안 썼다. 그랬더니 오히려 "너 요즘 감이 떨어지더라"는 핀잔이 돌아왔다. 쓰지 말래서 안 썼더니 특종도 놓쳤고, 의리를 지킨다고 지켰더니 '감 떨어지는 기자'가 됐다. 역시 취재원의 '노(No)'는 '노(No)'가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약 20년간 기자들을 수없이 상대해온, 무려 '기자 출신'인 그가 '무심결에', 그것도 '실수로' 기자에게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다. 그렇지만 눈치 없는 후배는 선배에게 누가 될까 칼보다도 강하다는 펜을 넣어버렸다. '기자와 취재원'이라는 관계와 '선후배' 관계가 충돌해 빚어진 혼란이다.

이렇게 소심하고 답답한 기자가 된 원인을 생각해봤다. 약 15년 전쯤 공직에 있던 기자의 가족이 '오프더레코드(비보도)'를 전제로 언급한 정보가 보도돼 곤란에 빠졌다. 국내 유력 일간지 기자들과 편하게 만난 자리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기자가 되기도 전에 이미 '취재원의 비보도 요청은 지켜줘야 한다'는 의식이 형성됐다. 그리고 그렇게 형성한 의식을 지금까지 '의리'라고 포장해왔다.

그런데 최근 기자의 이런 직업윤리를 반성하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회의원이라는 사람이 고등학교 후배인 외교관으로부터 입수한 3급 기밀을 홀랑 발표해 버렸기 때문이다. 

강효상 자유한국당 의원은 9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지난 7일 문재인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하면서 다시 (5월 하순 방일 이후) 방한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은 (한미 동맹, 최근 남북 상황, 북한 비핵화 협상, 그리고 대한민국의 외교에서)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에 미국 정부 관계자와 소식통 등에서 청와대나 백악관이 브리핑하지 않은 사실을 파악해서 국민에게 소상히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덧붙였다.

'언론계 대선배'인 강 의원이 깜빡한 것 같다. 지금은 그가 모 유력 일간지 편집국장으로 있던 2013년이 아니란 것을. 2016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시작해 국회에 입성한 지 3년이나 지났는데 여전히 본인이 기자라고 착각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의무는 기밀 폭로가 아닌, 국회 정상화를 통한 민생법안 처리다. 설상가상으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까지 이 사건을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한 정당한 의정 활동"이며 "공익 제보"라고 두둔하고 나섰다. 이러니 국회 정상화가 요원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 출신인 그가 아직도 '알 권리'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니 까마득한 후배로서 안타깝다. 물론 알 권리는 보호해야만 한다. 알 권리는 타인의 명예나 권리(개인적 법익), 공중도덕이나 사회윤리(사회적 법익), 국가의 안전보장이나 질서 유지(국가적 법익)를 침해한다고 판단하는 경우에 한해 제한할 수 있다. 그리고 정상 간 통화나 면담의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기자라면 알고 있어야 할 기본 상식이다. 북한 매체가 즐겨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삼척동자도 알 일"이다.

그에게 묻고 싶다.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을 진정으로 원했는지, 그리고 자신의 발언이 국가의 법익을 침해하지 않았다고 확신하는지.

어쨌든 이건 확실하다. 기자는 기자의 본분을 망각했고, 강 의원은 본인의 본분을 착각하고 있다. 기자는 의리(?)를 지켰지만 국민의 알 권리는 침해했고, 강 의원은 후배의 경력도 망가뜨리고 국익도 침해했다. 

물론 여기서 가장 심각한 것은 3급 기밀을 고교 선배에게 유출한 해당 외교관 K씨의 직업윤리다. 이명박 정부 시절 외교안보수석비서관을 지낸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이 지적했듯이 외교기밀도 제대로 지킬 수 없는 나라는 문명국이 될 수 없다. K씨 덕분에 워싱턴 정가에서 한국 외교관들과의 만남을 기피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조문정 기자]

supermoon@wikileaks-kr.org

기자가 쓴 기사


  • 서울특별시 마포구 마포대로 127, 1001호 (공덕동, 풍림빌딩)
  • 대표전화 : 02-702-2677
  • 팩스 : 02-702-167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소정원
  • 법인명 : 위키리크스한국 주식회사
  • 제호 : 위키리크스한국
  • 등록번호 : 서울 아 04701
  • 등록일 : 2013-07-18
  • 발행일 : 2013-07-18
  • 발행인 : 박정규
  • 편집인 : 박찬흥
  • 위키리크스한국은 자체 기사윤리 심의 전문위원제를 운영합니다.
  • 기사윤리 심의 : 박지훈 변호사
  • 위키리크스한국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위키리크스한국. All rights reserved.
  • [위키리크스한국 보도원칙] 본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립니다.
    고충처리 : 02-702-2677 | 메일 : laputa813@wikileaks-kr.org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