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스토리] 영화 ‘대부’의 실제 모델인 찰스 럭키 루치아노의 비극적 삶
[WIKI 스토리] 영화 ‘대부’의 실제 모델인 찰스 럭키 루치아노의 비극적 삶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9.07.03 09:52
  • 수정 2019.07.0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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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부의 실제 모델인 찰스 럭키 루치아노 [ATI]
영화 대부의 실제 모델인 찰스 럭키 루치아노 [ATI]

우리는 ‘대부’, ‘좋은 친구들(Goodfellas)’, ‘도니 브래스코(Donnie Brasco)’와 같은 영화를 통해 이탈리아계 미국인 범죄 조직 마피아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가 없었다면 마피아가 지금처럼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없었던 실질적 실력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는 것 같다. 그의 이름은 찰스 ‘럭키’ 루치아노(Charles “Lucky” Luciano)이다.

현대 미국 조직범죄의 아버지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루치아노는 강력한 ‘제노비스(Genovese) 가문’의 첫 번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 범죄 세계에서도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영어로는 ‘커미션(Commission)’이라고 불리는 미국 마피아의 지배 구조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한 사람의 이탈리아 출신 이민자가 어떻게 이 모든 일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럭키 루치아노의 탄생

럭키 루치아노는 1897년 이탈리아 시실리 섬의 레르카라 프리디 자치구에서 태어났으며, 원래의 이름은 살바토레 루카니아였다.

그의 나이 10살 무렵에 살바토레 루카니아와 그의 가족은 시실리에서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왔다. 특히, 그의 가족이 첫발을 내딛은 곳은 뉴욕에서도 범죄로 악명 높은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 지역이었다. 당시 이민자들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루카니아의 가족들도 빈민자들이 우글거리는 아파트에 거주했다.

럭키 루치아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범죄 세계에 발을 담갔다. 보도에 의하면, 그는 14살 때 이미 강도, 절도, 강탈 등의 범죄에 개입했다고 한다.

그가 14살 때 처음으로 집에 권총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는 별로 놀랄 일이 못 된다. 그는 곧이어 능숙한 소매치기가 되었다.

럭키 루치아노의 범죄 역사에 다음으로 주요한 장은 그가 악명 높은 ‘파이브 포인츠 갱단(Five Points Gang)’에 가입하고 헤로인 마약을 취급하면서 시작되었다.

티모시 뉴워크가 기록한 럭키 루치아노의 전기 「보드워크 갱스터 : 진짜 럭키 루치아노(Boardwalk Gangster: The Real Lucky Luciano)」에 의하면,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차이나타운에서 마약(아편)을 했다. 우리 모두는 그랬다. 나는 아편을 무척 좋아했다. 머리가 빙빙 돌면서 신이 났다. 그러나 나는 약에 절어 살지는 않았다.”

루치아노는 어린 나이임에도 사업가 기질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1900년대초 뉴욕의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 [STI]
1900년대초 뉴욕의 로우어 이스트 사이드. [ATI]

생면부지의 범죄 세계에서 스스로 일어서기 위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짓기로 했다. 태어났을 때 원래 그의 이름이었던 ‘살바토레(Salvatore)’는 ‘샐리(Sally)’라는 여성스러운 별칭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여성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살바토레’ 대신 ‘찰스(Charles)’로 새로운 인생을 살기로 했다. 결국, ‘루카니아’는 ‘루치아노’가 되어 찰스 루치아노가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아니, 스스로 탄생시켰다.

갱단을 조직하다

여타의 걸출한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찰스 루치아노도 조직범죄의 역사에서 그처럼 통합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의 성공을 도왔던 대표적 인물이 메이어 랜스키로 알려진 마이에르 슈쇼블잔스키였다. 메이어 랜스키는 유태인 폭력배로 악명이 높았다. 루치아노와 랜스키는 10대 시절 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의 이탈리아 출신 소년 범죄자들은 유태인들과 거래하기를 꺼렸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바로 그 점에 착안했다. 유태인들을 피하는 대신 유태인 소년들을 대상으로 돈을 강탈했던 것이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고, 루치아노와 랜스키가 맞닥뜨렸을 때 랜스키는 굽히지 않았다. 럭키 루치아노와 메이어 랜스키가 서로의 이름을 걸고 평생을 함께 하게 된 출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메이어 랜스키의 딸 산드라는 회고록 「왕의 딸 : 조폭 세계에서 자라다(Daughter of the King: Growing Up in Gangland)」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빠는 당연히 찰리 아저씨(찰스 루치아노)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찰리 아저씨는 사나운 꼬마 유태인에 대해 많은 이야기(진짜 이야기는 뺐겠지만)를 들려주었다. 찰리 아저씨는, 아빠가 거친 거리의 폭력배들에게 당당히 맞섰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좋아했다.”

루치아노는 랜스키의 배짱과 도박에 뛰어난 수학적 머리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루치아노는 랜스키와 가까웠던 벤자민 벅시 시겔과도 친분을 유지했다. 벅시 시겔 또한 악명을 떨치던 폭력배로 이들은 함께 ‘벅스와 메이어 갱단’을 꾸렸다.

이 이탈리아-유태인 연합 갱단은 초기에는 보호비 명목으로 갈취행위를 일삼다가, 1920년대 금주법이 시행되자 주류 밀매업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았다.

메이어 랜스키와 루치아노 [ATI]
메이어 랜스키와 루치아노 [ATI]

럭키 루치아노의 부상(浮上)

루치아노가 다른 폭력단들과 비교적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는 했지만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1929년 10월 17일 경쟁 폭력단이 루치아노를 납치해 칼로 목에 상처를 내고, 얼음 깨는 송곳으로 여러 번 찌르는 등 폭력을 행사했다. 마피아들 사이에 떠도는 전설에 의하면 경쟁 폭력단은 루치아노가 죽게끔 뉴욕의 스태튼 섬에 버려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얼굴과 눈에 상처를 입고도 기적처럼 살아났다.

그의 별칭 ‘럭키’도 이런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도 살아남은 데서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 쯤 럭키 루치아노는 뉴욕 폭력단의 우두머리 격인 ‘조 마세리아 갱단’의 부두목이 되어 있었다. 1930년대 초 마세리아 갱단은 뉴욕의 범죄 사업을 두고 신생 조직인 살바토레 마란자노 갱단과 사활을 건 싸움을 진행 중이었는데, 이때 루치아노는 본격적으로 범죄에 뛰어들게 된다.

하지만 조직 폭력단들끼리의 전쟁을 벌이는 동안 루치아노와 젊은 동료들은 기존 이탈리아 폭력단에 대해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마세리아 같은 기존 조폭들은 영어도 할 줄 모르고, 과거의 관습에 절어있고, 범죄 사업에도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루치아노는 마세리아를 완전히 제거하고 갱단을 장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브루클린의 코니아일랜드에 있는 유명 해산물 식당 ‘누바 밀라 타마로’에서 만찬을 준비해놓고, 마세리아를 초대했다. 그가 식사 도중에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뜬 사이 벅시 시겔, 비토 제노비스, 그리고 무자비하기로 그 유명한 알버트 아나스타시아 등 네 명의 동료들이 들이닥쳐 마세리아를 벌집을 내서 보내버렸다.

커미션(Commission)의 설립

루치아노가 다음으로 제거할 대상은 마세리아의 최대 라이벌 살바토레 마란자노 갱단이었다. 이때는 이미 마란자노는 뉴욕의 모든 조직범죄단의 우두머리 격인 최초의 ‘두목 중의 총두목(capo di tutti capi)’ 자리에 올라있었다.

루치아노는 메이어 랜스키가 보내준 네 명의 유태인 폭력배들을 마란자노가 있던 본부로 보내 총두목의 짧은 임기를 영원히 끝내도록 했다. 1931년이 되자 류치아노는, 비록 마란자노의 자리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뉴욕 시 조직 폭력단의 명실상부한 보스가 되었다.

그러나 루치아노는 점점 피 흘리는 싸움에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에 지친 데다가 절친인 메이어 랜스키의 조언에 힘입어 마피아가 잔인한 갱단 대신에 유능하고 조직력을 갖춘 사업체로 성장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루치아노는 서둘러 시카고에서 미국 내 이태리 출신 폭력단 보스들의 모임을 결성했다. 이 모임은 루치아노 자신과 남아있는 뉴욕의 네 군데 조폭 두목들이 주축을 이루었으며, 이후 ‘파이브 패밀리즈(Five Families)’라는 조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단체를 통해 루치아노는 마피아의 조직 구조를 혁명적으로 변화시키고, 능률적으로 현대의 마피아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했다. 한편, 이미 악명을 떨치고 있던 시카고의 거대 조직 보스 알 카포네도 역시 이 단체에 가입하였다.

미래에 있을지도 모르는 유혈극을 피하기 위해, 루치아노는 지역 조직들을 ‘패밀리즈(families)’로 분할했다. 각각의 패밀리는 자신들만의 구역을 지켜야하며, 일반 사업체와 같은 조직을 꾸려야하고, 모두 비슷한 규칙을 지켜야했다. 나아가 모든 마피아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활동에 침묵을 유지해야만했다. 이러한 조직 내의 규율은 ‘말하지 않는다’의 뜻을 지닌 ‘오메르타(omertà)’라고 불렸다.

한편, ‘위원회(Commission)’라고 불리는 중앙 지배 기구가 전체적으로 힘을 발휘해, 분쟁이 생길 경우 모든 패밀리들과 규칙들을 놓고 중재 역할을 했다. 이런 식의 조직 편제는 마피아 조직을 비밀리에 운영하는 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경쟁 패밀리들 사이의 폭력이나 개별 폭력원들끼리의 싸움을 막는 데도 뛰어난 역학을 했다.

알 카포네 [ATI]
알 카포네 [ATI]

럭키 루치아노와 실정법

루치아노가 거둔 사업적 성공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부의 매서운 눈초리를 쉽게 피해갈 수는 없었다. 알 카포네나 다른 유명한 마피아 두목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법 집행 당국의 그를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루치아노는 초호화 생활을 유지했다. 그는 여자들에게 최고급 의류를 사주었으며, 가수 프랭크 시나트라와 친교를 맺었다. 또, 그는 뉴욕의 최고급 호텔 월도프아스토리아의 스위트룸에서 살았다.

1935년 마침내 특별 검사 토머스 듀이가 강제 매춘업을 운영한 혐의로 루치아노를 기소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들을 확보했다. 루치아노에게 할당된 보석금은 당시 금액으로 35만 달러였는데, 이는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당시 루치아노의 보석금은 그 때까지 최고 액수였다.

수십 명이 루치아노의 범죄를 증언하기 위해 나섰으며, 법정은 그에게 62가지의 죄목에 유죄 판결을 내렸다. 결국, 조폭 잡는 검사 토머스 듀이가 승리함으로써 루치아노는 30년 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들어갔다.

하지만 보안이 최고조로 유지되는 감옥에서 징역을 살면서도 루치아노는 사업체를 운영하며 키워나갈 수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의 허드렛 일을 다른 죄수들에게 시켰고, 죄수 하나를 선정해 개인 요리사 역할까지 맡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감옥에서 빠져나가기로 마음먹었는데, 마침 발발한 2차세계대전이 그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당시, 외국 세력이 미국 동부 해안 항구들을 파괴할까 전전긍긍하고 이탈리아계 미국 부두 노동자들이 은밀히 베니토 무솔리니를 지원할까봐 노심초사하던 미국 정부는 감옥에 있던 조폭 두목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미국 해군은 루치아노에게 자신들의 작전을 지원하고 정보를 주면 감형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 작전의 이름은 ‘암흑가 작전(Operation Underworld)’이라 명명되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영어(囹圄)의 몸이었던 암흑가의 보스 럭키 루치아노가 해군의 눈과 귀가 되어 작전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럭키 루치아노의 이탈리아 망명

미국 정부를 도운 루치아노의 행위는 ‘암흑가 작전’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은 것 같다. 그는 미군이 자신의 고향 시실리를 침공하는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y)’에서도 미국을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6년 드디어 미국 정부가 ‘전쟁 시 협조’를 이유로 조폭들에게 사면을 내렸다.  (루치아노를 기소했던 바로 그 검사 토머스 듀이가 이 일을 추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범죄 집단들에 미칠 루치아노의 영향력을 고려해 그가 미국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데까지는 마음이 너그럽지 못했다.

대신에 루치아노는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쿠바의 아바나에 정착하고자 꾀했으나 쿠바 정부도 그를 이탈리아로 돌려보냈다. 루치아노가 사라지자 그의 부하였던 비토 제노비스와 카를로 감비노가 권력의 공백을 메우고 그의 자리를 차지한 후, 그의 측근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루치아노는 그를 거쳐갔던 많은 여성들 중 그보다 20살이나 어렸던 발레리나 이기아 리소니와 1948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1952년 이기아 리소니가 유방함으로 사망할 때까지 나폴리에 있는 루치아노의 집에서 함께 살았으며,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루치아노와 리소니. [ATI]
루치아노와 리소니. [ATI]

“나는 갱단의 두목 루치아노의 아들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살아갈 자식을 원하지 않았어요. 내가 토머스 듀이 검사를 아직도 미워하는 한 가지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나를 폭력배로 비치게 한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루치아노는 이런 이야기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망명 생활에도 불구하고 루치아노는 1962년 1월 26일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시실리에서 15년간이나 더 범죄 행위를 지속했다. 그는 이탈리아 당국이 마약 밀매 혐의로 체포에 나서기 바로 직전에 사망했다.

사망 후 루치아노의 시신은 미국으로 옮겨져 매장되었다. 그의 장례식은, 우리가 아는 바대로 미국 조직범죄를 최초로 결성했던 것이 거의 확실시 되는 사람의 마지막 가는 길에 관심을 가진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오는 날에도 마피아에 열광하는 사람들은 뉴욕 퀸즈의 세인트 존 묘역(St. John Cemetery)에 있는 그의 묘지를 찾고 있다.

[위키리크스한국=최석진 기자]

 

뉴욕 퀸즈의 세인트 존 묘역(St. John Cemetery)의 루치아노 묘역. [ATI]
뉴욕 퀸즈의 세인트 존 묘역(St. John Cemetery)에 안치된 루치아노. [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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