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박근혜 청와대' 이혜진 前법무비서관 "강제동원 청구권 살아있다는 건 순수하게 법리적인 것"
[단독] '박근혜 청와대' 이혜진 前법무비서관 "강제동원 청구권 살아있다는 건 순수하게 법리적인 것"
  • 윤여진 기자
  • 승인 2019.08.01 19:37
  • 수정 2019.08.02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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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관 재임 중 '강제동원 대법원 배상판결' 법리 검토
법무비서관실 문건 "강제동원 청구권은 한일협정 예외"
"당시 청와대는 군대 같은 조직... 난 겨우 나온 사람"
박근혜 정부 청와대 초기 법무비서관을 지낸 이혜진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박근혜 정부 청와대 초대 법무비서관을 지낸 이혜진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인을 강제동원한 전쟁범죄(전범) 기업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은 정부 입장에 배치되는가.

박근혜 정부는 대법원 선고 1년 뒤 대법원 판결이 한국과 일본이 1965년 체결한 '한일청구권협정'에 위반되는지 법리 검토에 들어간다. 주어진 임무를 완수한 곳은 청와대 법무비서관실이다. 

당시 법무비서관은 인수위원회에서 법질서사회안전분과 간사로 일한 이혜진(56·사법연수원 18기) 현 동아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민사소송법 전문가인 이 교수는 행정관이 작성한 문건을 사후 검토하는 역할을 맡았다. 법리 검토에 나서기 전 판결문을 작성한 김능환(67·7기) 당시 대법관 논리를 우선 파악하는 게 중요했다. 

◇ 2012년 대법 판결은 어떤 논리였나

당시 이 사건 주심인 김 대법관은 판결문에서 청구권협정 범위에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들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청구권협정이 채권·채무 관계를 정리한 "정치적 합의"에 불과하다고 본 까닭이다. 전범 국가 일본의 한반도 강제 점령과 군수물자를 공급한 전범 기업의 공동불법행위는 애초 7차에 걸친 한일회담에서 다뤄지지 않은 만큼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살아있다는 논리였다. 

대법원에 빌미를 준 건 일본의 정부와 법원이다. 청구권 협정 체결 당시 일본 정부는 1910년 체결한 '한일병합조약'은 무효라는 한국 정부의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청구권협정 2조는 분명 "청구권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라 했지만, 해결 범위 안에 일본의 불법행위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일본이 공언한 것이다. 

일본의 대법원 격인 최고재판소도 2007년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를 기각하며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이 적법한 근거로 합병조약을 제시했다. 합병조약이 적법하니 당시 일본인의 일부였던 조선인 동원도 적법하다는 얘기였다.

◇ '박근혜 개인'과 '박근혜 정부' 분리하기

이혜진 당시 법무비서관은 대통령을 보좌해 정부 입장을 다듬는 역할과 대통령 개인의 견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혼동하지 않았다.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71·2기)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을 보면 박근혜(67·구속) 당시 대통령은 "대법원 최종 판결이 나오면 일본은 한국이 1965년 체제를 포기하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라는 박준우(66)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양승태 대법원'과 협조해 2012년 대법원 판결의 확정을 지연하라고 김기춘(79·고시 사법과 2회) 당시 비서실장에게 지시한 이유다. 박 대통령의 인식 체계에선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배상받는 일이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구축한 세계의 종말을 뜻했다. 

2013년 11월 7일 자로 법무비서관실에서 생산된 '강제징용 배상 관련 한·일 청구권 협정 법리 검토'라는 문건을 보면 '박근혜' 개인과 박근혜 정부를 분리한 이 교수의 고심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정부가 '대일 배상 요구 조서'를 기초로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을 제시하였으나, 일본 측의 대한·일본인 청구권 주장 및 독도 문제 등에 대한 이견으로 실질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음" <강제징용 배상 관련 한·일 청구권 협정 법리 검토> 中

문건은 한일 정부가 1952년부터 1960년까지 진행한 1~4차 한일회담에서 "우리 정부가 '대일배상 요구 조서'를 기초로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 항'을 제시하였으나, 일본 측의 대한·일본인 청구권 주장 및 독도 문제 등에 대한 이견으로 실질적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음"이라고 밝혔다. 

'한일간 재산 및 청구권 협정 요강 8개항'(8개 항)의 5항은 '한국 법인 또는 한국 자연인의 일본은행권, 피징용한국인의 미수금, 보상금 및 기타 청구권 변제 청구'다. 일본이 8개항 논의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청구권협정 대상에 강제동원 개인청구권이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1960년부터 1961년까지 진행된 5차 한일회담에서도 5항은 "의견 접근 실패"라고 문건은 적었다. 

"양국 간 청구권에 대한 세부적 논의 방식을 포기하고, 정치적 측면의 접근으로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 체결" <강제징용 배상 관련 한·일 청구권 협정 법리 검토> 中

결국 1961년부터 1965년까지 진행된 6차 한일회담에서 "양국 간 청구권에 대한 세부적 논의 방식을 포기"하고 "정치적 측면의 접근"이 이뤄진 결과가 청구권협정 체결이라고 문건은 해석했다. '정치적 합의'라는 대법원 판결문과 흡사한 표현이다. 

"청구권 협정 문언에 따라 청구권의 주체, 법적 성격 등을 불문하고 모든 청구권에 청구권 협정이 적용된다는 일본의 입장과 달리, 우리 정부와 법원은 청구권 협정의 문언에도 불구하고 체결 경위, 협정 성격, 법리 등을 고려하여 적용 대상의 예외 인정" <강제징용 배상 관련 한·일 청구권 협정 법리 검토> 中

문건 결론인 '대법원 판결이 기존 정부 입장과 배치되는지 여부' 부분에선 "일본 입장과 달리 우리 정부와 법원은 청구권 협정의 문언에도 불구하고 적용 대상의 예외 인정"이라며 2012년 대법원 판결과 정부 입장이 같다고 했다. 여기에서 '청구권 협정의 문언'은 청구권협정 2조를 말한다.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청구권이 청구권협정의 예외라는 법무비서관실 해석의 근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 질서를 규정한 국제법이다. 문건은 "체결 경위, 협정 성격, 법리 등을 고려"해 청구권협정에서 강제동원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논의되지 않았다고 봤다. 

일본의 통치로부터 이탈된 지역의 시정당국 및 주민과 일본 및 일본국민 간의 재산청구권은 이러한 시정당국과 일본 간의 특별협정으로 처리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4조(a)

청구권협정은 전범국인 일본의 2차 대전 전후 처리를 위해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근거를 둔다. 조약 4조에 따르면 한반도는 "일본의 통치로부터 이탈된 지역"이어서 한국은 승전국으로서의 전후 배상은 받지 못했다. 대신 일본과 채무 관계를 정리하는 특별협정만을 맺을 수 있었는데 이게 청구권협정이다. 

"국가권력이 개입한 반인도적 불법행위(군위안부, 생체실험, 강제동원 중범죄행위 등)는 일본정부가 일제하 반인도적 불법행위 사실 자체를 부인하였고, 해방 전 일본 헌법상 개인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할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구권 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음. 따라서, 한국민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국가가 자행한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가능하며, 진상이 규명되는 경우 한국정부도 일본정부에 책임추궁 가능" <국무총리실 한일수교회담문서공개등대책기획단 활동백서> 42쪽

문건은 이어 '정부 입장 요지'에서 박근혜 정부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해석을 계승한다는 결론을 내놨다. 문건은 "정부는 2005년 민간공동위원회 발표에서 개인청구권 소멸 문제에 관해서는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일본 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의 경우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이 남아있으며"라는 부분을 인용했다. 2012년 대법원 판결은 강제동원을 반인도적 불법행위라고 한 민관공동위원회 해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 이혜진 "나는 낭만주의자"... 그가 떠난 청와대는 '재판 지연' 모의

이 교수는 지난달 31일과 지난 1일 이틀 동안 위키리크스한국과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문건 작성에 정치적 배경은 없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그냥 우리(법무비서관실)는 객관적으로 순수하게, 법리적으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스스로를 청와대가 아닌 학교에 어울리는 '비(非) 정치주의자' '낭만주의자'라고 규정했다. 

문건의 작성 배경에 대해선 "위에서 '검토를 해 다오'라고 해서 검토를 한 것"이라 설명했다. 다만 구체적인 업무 지시를 내린 곳과 문건이 어떻게 보고됐는지는 말을 아꼈다. 검찰은 2012년 대법원 판결 이후 법무부가 먼저 법리 검토에 나섰고 그 결과를 법무비서관에 전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법무비서관실에서 이 문건을 작성하고 한 달 뒤 이 교수는 청와대를 나왔다. 그 무렵 청와대에선 법무비서관실에서 생산한 문건과 전혀 다른 논의가 시작되고 있었다. 

이 교수는 사임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대신 자신을 "그런 군대 같은 조직이랑 안 맞는 사람, 계급 있고 위계 있는 분위기를 안 좋아하기 때문에 조직과 안 어울린다는 걸 알고 빨리 나오기 위해서 굉장히 노력하다가 겨우 그때 나온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이 교수가 사직한 달인 2013년 12월 청와대에선 2012년 대법원 판결의 확정 지연을 위한 범행 결의가 있었다. 이달 1일 김 실장은 공관으로 윤병세(65) 당시 외교부 장관, 황교안(62·13기) 당시 법무부 장관을 소집하고 차한성(64·7기) 당시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을 불렀다. 

당시 윤 장관은 이 자리에서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판결은 국가적 위기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라며 "대법원 판결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고 차 처장에게 말했다. 윤 장관 발언은 그대로 양 대법원장에게 전달됐다. 강제징용 판결이 지난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확정되기까지 6년 걸린 전말이다.

이 교수는 자신과 '양승태 대법원'을 분리했다. 그는 "12월에 그런 회의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며 "그때(문건 작성 당시)는 대법원과 아무런 접촉이 없던 상태였다"고 강조했다. 실제 이 교수와 달리 후임 법무비서관을 지낸 김종필(56·18기) 법무법인(유한) 태평양 소속 변호사와 곽병훈(49·22기)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변호사 모두 관련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 3월 울산대굥원 동문에 설치된 강제징용 노동자상. [연합뉴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은 지난 3월 1일 울산 남구 울산대공원 동문에 설치된 강제징용 노동자상.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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