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태평양전쟁을 종식시킨 '원자폭탄' 탄생 마을 스토리
[8.15] 태평양전쟁을 종식시킨 '원자폭탄' 탄생 마을 스토리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9.08.05 07:51
  • 수정 2019.08.15 0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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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네시주 오크리지 일대. [사진=ATI]
테네시주 오크리지 일대. [사진=ATI]

1945년 8월 15일. 한민족이 꿈에 그리던 광복이 찾아온 날이다.

우리 민족의 광복은 미군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성공적으로 투하함으로써 이뤄지게 됐다.

한민족의 광복과 미국 테네시주 오크리지라는 작은 마을이 묘한 인연을 갖게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크리지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될 원자폭탄 생산을 돕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1942년 11월. 오크리지 지역에 있는 오크리지 고등학교 학생들은 영문도 모른 채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야 했다.

“방금 맥켈러 상원의원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여러분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서 학부모들에게 이사 갈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래야하는지에 대한 더 이상의 설명은 전혀 없었다. 학생들은 그저 ‘정부가 전쟁 수행을 위해 여러분들의 재산을 취하게 될 것이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이다.

이후 3년간 한적한 마을이었던 오크리지는 원자폭탄 개발을 주도하는 장소가 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핫한 지역 중 한곳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하지만 이 사실은 강제로 퇴거당해야 했던 당사자들에게조차 비밀에 붙여졌다.

밝힐 수 없는 목표를 위해, 미국 정부의 고위층이 주도한 약 3000 가구 농촌 가정의 대량 강제 이주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크리지로 찾아든 맨해튼 프로젝트

오크리지에 살던 작은 공동체 주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인류 역사를 뒤바꿀 실험을 위해 집에서 쫓겨났다. 그들의 보금자리가 맨해튼 프로젝트, 그러니까 원자폭탄 개발의 주무대로 지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오크리지 지역이 사상 최초의 원자폭탄 원료로 사용될 농축 우라늄 생산 지역으로 선정되었다는 말이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ak Ridge National Laboratory)’로 명명될 장소에서는 20세기 과학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산물의 일부가 탄생하게 된다. 약 120,000명의 인명을 앗아가면서 히로시마를 파괴해버린 원자폭탄 제조 과정의 일부를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은 군부 주도로 역사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원자폭탄의 위력에 대한 비밀이 적국의 손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오크리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털끝만큼도 독일이나 소련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되었다.

오크리지는 북미 원주민들을 포함해서 약 3000가구의 농민들만이 거주하는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에 격리를 위해서는 적합한 지역에 속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보금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어떠한 설명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군대는 이주 대상 가족들의 집 문에 고작 2주의 여유만을 남긴 채 ‘건물을 신속히 비워주기 바란다’는 메시지만 붙여놓았다.

그런가 하면 정부가 고용한 수만 명의 사람들이 특수한 일을 하기 위해 새롭게 이주해왔다. 이들 새로운 이주자들의 숫자는 많을 때 7만5,000명에 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도 자신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들은 로버트 오펜하이머나 엔리코 퍼미 같은 유명 과학자들이 주도하는 핵실험에 동원되었지만 자신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오크리지 실험공장의 흑연 원자로. [사진= ATI]
오크리지 핵 연구소의 흑연 원자로. [사진= ATI]

어쨌거나 레슬리 그로브스 장군은 블랙 오크리지 능선을 따라 59,000에이커의 땅을 지정해 약 30,000명의 공장 노동자들이 거주할 새로운 도시와 네 개의 주요 시설을 짓도록 했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Oak Ridge National Laboratory)’의 건설

네 개의 주요 시설 중 첫 번째는 액상 열확산(liquid thermal diffusion) 처리 과정을 통해 부분적으로 우라늄을 농축하는 S-50 플랜트였다. 두 번째는 K-25라고 알려진 시설로 S-50으로부터 우라늄을 받아서 기체 확산법(gaseous diffusion)을 통해 농축을 더 강화하는 일을 하였다.

그러고 나서 전자기 방식의 Y-12 플랜트가 이 생산물의 농축 과정을 최종적으로 강화하는 일을 맡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크리지 국립연구소’가 농축이 완료된 플루토늄을 받아서, 상시적으로 운영되는 사상 최초의 핵 원자로인 X-10 흑연 원자로에 활용하였다.

1942년과 1943년 사이 건설된 이들 네 개의 시설들은 보안을 강화하고 사고의 경우를 대비해서 도시에서 떨어진 계곡에 위치했다. 전 지역은 처음에는 ‘사이트-X(Site X)’라고 불리다가 이후 ‘클린턴 엔지니어링 웍스(Clinton Engineering Works)’라고 불렸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는 에너지와 물리학을 연구하는 연구 센터로 지금도 활동 중이다.

시골 마을을 강제 이주시키는 데에 따른 어려움

‘오크리지 국립연구소’ 건립을 위해 실제로 이주된 가정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해당 가정들은 적절한 보상을 포함하는 이주 조건을 요구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매우 혼란스러워했으며, 슬퍼했습니다. 일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서 사람들은 급하게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이주 대상자 중 한 여성은 당시 자신의 가족이 당했던 경험을 이처럼 털어놓았다.

해당자들 중 일부는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예를 들면 60에이커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던 가정은 땅의 대가로 825달러밖에 받지 못했다. 1942년에 발간된 한 자료에 따르면 당시 한 에이커의 땅값은 약 34달러 정도 되었다.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이 가정은 정부로부터 땅값을 반 정도밖에 받지 못한 것이다.

“정부는 땅값을 제대로 쳐주지 않았어요. 우리는 헐값을 받았을 뿐이고, 다시 새로운 땅을 사야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터무니없이 부족했지요.”

강제 이주 대상 가족이었던 레바 홈버그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나아가 빈곤층에 속했던 가정들은 재정착할 수단조차 없었다. 그들은 차도 없었고, 돈도 없었으며, 다른 지역에는 연고도 없었다. 일부 가정은 새로 조성된 ‘오크리지 연구소’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다른 가정들은 재정착하기 위해 적어도 14마일은 떨어진 가장 가까운 지역을 택해야했다.

해당 가정들이 국가의 전쟁 수행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터전을 갑자기 떠나야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들 중 일부는 오크리지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왔지만 이에 대해서 합당한 보상을 받지는 못했다.

비밀 업무를 위해 새로운 노동자들이 무리를 지어 도착하면서 작은 마을이었던 테네시의 오크리지는 전쟁을 거치면서 주에서 5번째로 큰 도시가 되었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극비 임무

오크리지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전쟁이 끝나고 오크리지의 비밀이 대중에 공개되었을 때 ‘라이프’지의 한 기자가 이 지역을 찾았다. 그는 한 노동자를 구석으로 데리고 가서, 녹음기를 들고, 그가 맨해튼 프로젝트를 위해 무슨 일을 했는지 가능한 자세히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노동자는 자신이 보냈던 3년의 시간에 대해 한동안 생각에 잠기더니,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그 노동자뿐이 아니었다. 오크리지의 누구도 자신들이 하는 일의 목적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업무에 대해 간단한 지시를 들었을 뿐이고,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지는 전혀 듣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질문도 허용되지 않았다.

한 노동자는 자신의 역할에 대해 만화영화에서나 벌어질 듯한 묘사를 했다.

“저는 계기판이 설치된 패널에 섰습니다. 지침이 0에서 100으로 움직이면 밸브를 돌리곤 했지요. 지침은 다시 0으로 떨어지곤 했어요. 제가 다른 밸브를 켜면 계기는 100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하루 종일 그랬습니다. 지침이 0에서 100으로 이동하면 밸브를 돌렸습니다. 이런 동작을 너무 반복하다보니 자면서도 그 행동을 했을 정도였지요.”

심지어는, 대부분의 경우, 중요 직책에 있던 노동자조차도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일은 그렇게 힘들지 않았습니다. …… 혼란스러운 것이 더 문제였습니다.”

오크리지에서 한 팀을 이끌던 조지 터너라는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오크리지에서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오크리지 노동자들이 지니고 있었던 생각

노동자들도 나름대로 생각은 있었다. 일부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4선 당선을 위해 선거용 뱃지(campaign buttons)를 만든다고 농담처럼 말하는가 하면, 다른 노동자들은 합성수지를 만드는 중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술을 만든다고 확신했던 노동자도 있었다.

“저는 정부가 독일 사람들을 술에 취하도록 하는 위스키를 제조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는 이상한 생각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오크리지는 사회주의를 실험하는 장소라고 믿을 정도였다. 사회주의 원리를 도입해서 미국에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오크리지의 보안

오크리지를 드나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시에는 7개의 출입구가 있었으며, 감시탑과 펜스가 설치되었고, 무장한 경계병들이 끊임없이 주변을 순찰했다.

출입하는 모든 인력들은 보안각서에 서명을 해야 했다. 편지는 철저히 검열되었고, 노동자들은 때때로 끌려가서 거짓말탐지기 조사를 받고, 무슨 이야기들을 나눴는지 자세히 심문을 받았다.

도시 여기저기에는 시민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는 경고판이 무겁게 드리워져있었다.

“함부로 흘린 말이 적에게 흘러들어간다.”

“보안이 생명이다.”

모든 사람들은 명령에 복종할 줄 알았으며, 말을 퍼뜨리는 순간 다음날부터 오크리지에 있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잘 알았다.

어쩌면, 오크리지에서 사회주의를 실험하는 중이라는 생각은 공산주의에 대한 불안과 거부감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를 감안해보면 그렇게 과장된 믿음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철저한 보안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일부가 부주의하게 새나가기도 했다. 1943년에 발간된 <비즈니스 위크>는 매리 앤 버파드라는 오크리지 노동자와의 인터뷰를 어렵게 성사시켰다. 버파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업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 유니폼을 세탁하고, 다리고, 단추를 새로 달고 나서 저에게 넘어옵니다. 저는 이 유니폼을 특별한 장치 앞에서 들고 서 있다가 킥킥 거리는 소리가 나면 뒤로 던져서 모든 과정이 새롭게 시작되도록 합니다. 그게 다에요. 제가 하루 종일 하는 일이 그겁니다.”

이 과정은 버파드에게는 영문을 모를 일일지 몰라도 내막을 좀 아는 적국의 사람이라면 미국 사람들이 의복에서 방사능 수치를 측정하는 가이어 계수기(방사능 측정기)를 사용하는 확실한 증거라고 추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오크리지의 보안에도 일부 구멍이 뚫렸었다.

가장 눈에 띄는 증거는 조지 코발이라는 소련의 첩자가 오크리지에서 임무를 맡고, 심지어는 최고 보안 등급을 획득하기까지 한 사실이었다.

그는 미국의 고위직 과학자들이 원자폭탄 제조의 완성에 이르는 핵 연쇄반응을 유도하기 위한 폴로늄 개시기(polonium initiator)의 사용을 실현할 때도 현장에 있었다.

그는 모든 사항을 기억해두었다가 그 정보를 모스크바 당국에 보냈으며, 미국 군부에 신뢰를 심어준 다음 과정을 직접 보기 위해 폴로늄 개시기가 만들어지는 실험실에 파견되기까지 했다.

이와 관련해서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코발의 노력 덕택으로 소련이 자력으로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시간이 대폭 줄어들게 되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정보가 새나가는 경우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아무리 사소한 유출이라도 힘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오크리지에서의 삶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업무에 대한 아무런 이해도 없는 상태에서 사기 진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크리지 국립연구소’의 노동자들은 아무 의미도 없는 단순 작업 때문에 성취동기를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군부는 노동자들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꾸준히 애를 썼다. 그들은 정부 주도하에 ‘해피 밸리(Happy Valley)’라는 공동체를 건설하고 오크리지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수만 명의 노동자들을 위해 주거 공간과 여흥을 주려했다.

그 결과 한때는 작은 농촌마을에 불과했던 지역에 학교가 10개, 슈퍼마켓이 13개, 야구장이 16개가 들어섰으며, 36개의 볼링 앨리들이 만들어져서 성시를 이루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락으로 무언가를 했다. 75,000명에 불과한 도시 인구들이 10개의 야구리그 팀을 지니고 있었고, 어떤 풋볼리그 소속팀은 그보다 더 많아서 26개 팀이나 되었다. 그리고 도합 10개의 풋볼리그에 81개의 팀이 활약했었다.

오크리지 시민들은 또 생화학자 왈도 콘의 주도하에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구성해서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연습을 하기도 했다. 도시가 생성되면서 도로가 만들어지기도 전에 오케스트라가 생긴 곳은 오크리지뿐이었다.

이러한 모든 오락거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또 다른 분위기 전환에 매달렸다. 맨해튼 프로젝트 기간 동안 오크리지의 인구는 비정상적으로 증가했다. 어떤 노동자는 이런 현상을 두고, ‘오크리지에서 아이를 갖는 일은 식은 죽 먹기나 마찬가지였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오크리지에서의 인종 차별

오크리지의 백인 노동자들이 고된 삶을 보냈을지 몰라도 흑인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당시 미국 어디에서나 마찬가지로 오크리지도 흑인들을 차별했다.

백인들이 ‘해피 밸리’에 주거지를 할당받은 반면에 흑인들은 ‘갬블 밸리(Gamble Valley)’의 트레일러에서 살아야했다.

흑인들의 주거지에는 수도도 없었고, 하수는 양동이에 받아서 버려야했다. 그런가 하면 난방은 원유 스토브에 의존해야했는데, 가끔씩 불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흑인 노동자들은 백인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져있어서, 자신들의 조건이 그렇게 열악한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이러한 차별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오크리지의 흑인 사회는 ‘미국 역사상 가장 교묘하게 격리된 흑인 공동체’였다는 묘사가 나올 정도이다.

종전(終戰)

1945년 8월 5일, 오크리지의 노동자들은 외부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날에서야 자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날은 히로시마에 사상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었다.

일본 한 도시의 5평방마일이 잿더미가 되고, 120,000명이 죽거나 다쳤고, 이후 방사능 피해로100,000명이 더 죽었다.

오크리지의 75,000명의 사람들은 신문을 받아들고 나서야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오크리지가 일본을 무찔렀다.”

지방 신문의 머리기사와 전쟁장관이었던 로버트 패터슨이 보낸 편지의 서두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오늘 전 세계는 여러분들이 여러 달 동안 우리를 도와 이룩한 비밀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이어졌다.

“저는 일본 군부가 이 결과에 대해 정확히 깨달은 사실을 알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일본에 원자폭탄이 성공적으로 투하됐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ATI]
일본에 원자폭탄이 성공적으로 투하됐다는 소식에 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ATI]

오크리지의 노동자들에게는 참으로 이상한 순간이었다. 겉으로는 무의미한 업무에 수년 동안 종사한 다음에 자신들이 대량파괴 무기를 만드는 일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뉴스를 들었을 때 뭔가 내 속에서 뒤집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 노동자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한 여성 노동자는 감독관이 흥분한 채로 그녀에게 달려와, “여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어?”라고 물었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이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최소한 책임자급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책임자도 그녀처럼 아무것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원자폭탄은 평화의 도구인가 대량 파괴 무기인가?

오크리지에서 맨해튼 프로젝트에 종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과에 만족했다. 그들은 ‘이 폭탄 때문에 수많은 인명이 죽지 않게 될 것’이라고 들었다. 폭탄이 투하된 다음 며칠 지나 찾아온 일본의 항복이 이를 사실로 입증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드디어 집에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들떴다.

그 이후로도 오크리지 도시는 완전히 폐쇄되지 않았다. 원자로의 일부는 지금도 가동 중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해 말 쯤에는 도시의 인구는 거의 반으로 줄어들었다.

전쟁은 끝났고, 노동자들은 애국적인 업무에 종사했다는 느낌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러나 일부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성취 뒤에는 끔찍한 무엇이 도사리고 사실도 직감했다. 그중 한 여성 노동자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한 일이 적어도 한 가지는 좋은 일에 사용되었기를 기도하고, 다시는 같은 일에 사용되지 않기를 기도합시다.”

[위키리크스한국=최석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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