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59) 김대중 이슈, 폭풍의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다
청와대-백악관 X파일(59) 김대중 이슈, 폭풍의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다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19-09-17 07:38:36
  • 최종수정 2019.08.19 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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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한-미 정치 40년 비사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전두환 정권과 미국 정부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계속되는 가운데 김대중 이슈가 폭풍의 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김대중 이슈는 1980년 7월부터 본격적으로 수면에 떠올랐다.

계엄사령부는 7월 4일 이른바 ‘김대중 일당 내란음모사건’의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계엄사는 김대중을 비롯한 37명을 우선 내란음모, 국가보안법, 반공법, 외환관리법, 계엄포고령 위반 등 혐의로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에 구속 송치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김대중과 추종분자 일당은 국민연합을 주축으로 하고 복학생을 행동대원으로 내세워 학생선동 → 대중규합 → 민중봉기 → 정부전복 → 김대중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권수립 등을 목표로 비합법적 투쟁을 추구, 마침내 내란선동과 음모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설명했다. 

김대중과 ‘그 일당’이 구속된 지 43일 만에 발표된 계엄사의 어마어마한 혐의에 국민은 충격적이었다. 평소에 존경받는 인물들이 내란음모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언론은 검찰의 발표만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구속자 가족들은 처음에 이들이 어디로 끌려가서 어떠한 고초를 당하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는 7월 12일 김대중 등 37명을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로 송치했다.

이들은 육군교도소와 서울구치소에 나누어 수용되었다. 김대중은 남한산성에 있는 육군교도소가 배정되었다.

육군본부 계엄보통군법회의 검찰부는 8월 14일 김대중을 기소했다.

공소장의 죄목은 내란음모ㆍ내란선동ㆍ계엄법위반ㆍ계엄법위반교사ㆍ국가보안법위반ㆍ반공법위반ㆍ외국환 관리법 위반 등 무려 7가지였다. 군검찰부는 검찰부장 정기용 중령, 검찰관 이병옥 소령, 정인봉 대위, 김인규ㆍ홍경식ㆍ김대권 중위 등 6명이다. 여기에 이종남ㆍ이건개ㆍ정경식ㆍ변진우 등이 군사재판의 법률적 자문역할을 맡은 ‘지도검사’들이었다.

김대중과 함께 군법회의에 기소된 사람은 24명이었다. 문익환(목사), 이문영(교수), 예춘호(정치인), 고은(시인), 김상현(정치인), 이신범(학생), 조성우(학생), 이해찬(학생), 이석표(무직), 송기원(학생), 설훈(학생), 심재철(학생), 서남동(교수), 김종완(정치인), 한승헌(변호사), 이해동(목사), 김윤식(정치인), 한완상(교수), 송건호(언론인), 이호철(작가), 이택돈(변호사), 김녹영(정치인) 등이었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공판에 나온 고 문익환 목사(左)와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공판에 나온 고 문익환 목사(左)와 김대중 전 대통령. [연합뉴스]

김대중과 ‘그 일당’은 중정의 조사기간은 물론 군검찰부의 조사가 모두 끝나고 재판에 회부될 때까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없었다. 가족면회도 일체 차단되었다.

김대중은 재판을 앞두고 8월 14일부터 가족 면회와 변호인 선임을 요구하며 단식을 시작했다. 그렇지 않아도 햇볕이 들지 않는 중정 지하실과 남한산성 육군교도소에 두 달 이상 갇혀 상한 몸이 더욱 말이 아니게 되었다. 아무리 군사재판이지만 가족면회와 변호인 선임권은 기본적 인권이었다. 이런 것조차 지키지 않는 당국과 싸우는 길은 자기학대의 단식투쟁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단식이 계속되자 교도소측에서 “제발 식사를 해달라”고 간청했다.

공판이 시작되면 미 국무부 고문변호사가 입국하고 유럽, 일본 등 각국 대사관에서 방청을 신청한 것을 비롯 내외 언론의 취재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 신군부는 서둘러 단식을 만류하고 이희호의 면회를 허용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김대중의 신변 문제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리처드 홀브룩 차관보는 크리스토퍼 국무장관 대리에게 김대중 문제와 관련된 핵심 관리들의 회의소집을 요청했다. 1980년 8월 하순 회의에 참석한 미국 관리들은 미국이 김대중의 구명을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워싱턴에서 8월의 회의가 있기 전 미국 정부는 이미 김대중 구명운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80년 5월 17일 그가 체포된 직후 미 대사관은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와 계엄사령관 및 최대통령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 이래 글라이스틴 미 대사는 전두환을 만날 때마다 주요 의제로 제기했다.

미 대사는 물론 미국 관리들도 한국의 주요 인사를 만날 때마다 김대중 문제를 거의 빼놓지 않고 거론했다.
위컴 장군과 보브 브루스터, 그리고 대사관 간부들의 노력을 바탕으로 미국 관리들은 접촉망을 다수의 한국의 고위 관리들에게까지 펼쳤다.

그 중에는 군부 인사들도 포함돼 있었지만 그들 중 다수는 김대중의 처형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미 행정부는 미국 의회가 제재조치의 위협을 동원하는 것에는 반대했지만, 의원들의 지원을 환영했고, 재계 인사들에 대해서도 한국당국에 그들의 견해를 전달하도록 요청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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