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신 "대법, 방심위 시청자 제작물 기준 정립...정권 보위엔 철퇴"
박경신 "대법, 방심위 시청자 제작물 기준 정립...정권 보위엔 철퇴"
  • 윤여진 기자
  • 승인 2019.11.22 19:39
  • 수정 2019.11.2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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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전쟁 심의에서 소송지원으로 변신한 박경신 교수
“대법판결로 시청자채널 심의완화, 다큐는 제작의도 담겨”
다수의견 "의혹도 방송 가능" vs 반대의견 "확정 사실만"
2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식당에서 만난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진=윤여진 기자]
22일 서울 서초구 서초동 한 식당에서 만난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진=윤여진 기자]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박정희 신화'에 균열이 나타났다. 역대 대통령 호감도를 묻는 조사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1위가 아닌 2위를 기록했다. 때마침 같은 해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보수에 상처를 입혔다.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공적으로 평가받는 독립운동과 산업화에 의문을 제기한 까닭이다. 

이듬해 집권에 성공한 박근혜 정부 등 보수는 역사 재평가를 시도하는 진보에 경고를 보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백년전쟁을 방송한 재단법인 시민방송에 징계를 내렸다. 불공정, 편파, 사자(死者) 명예훼손, 이 세 가지 딱지가 백년전쟁에 붙었다. 

시민방송은 이 제재가 행정권을 남용한 것이라며 법원 문을 두드렸다. 2014년과 2015년 1심과 2심은 "합리적 의심에 기초한 것으로 볼 여지가 없지는 않다"면서도 "특정 입장에 유리하게 하거나 사실을 오인하도록 적극적으로 조장했다"며 방통위 손을 들어줬다. 역사가 소재인 다큐는 양쪽 입장을 모두 담아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취지다. 

◇ 대법, "방송서 '기계적 중립' 더는 기준 안돼"

2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이같은 원심 판단이 틀렸다고 봤다. 김명수 대법원장과 김재형·박정화·민유숙·김선수·노정희·김상환 대법관의 다수의견은 "제작자의 관점과 다른 관점을 가진 관련 당사자의 의견을 모두 반영한 역사 다큐멘터리만 방송하여야 한다면" 다큐를 통해 더는 역사적 재평가가 어렵다고 봤다. 다수의견은 "주류적 통념에 대한 의문이나 의혹을 제기하는 다큐멘터리는 방송에서 다루기 힘들 뿐만 아니라 자칫 역사적 관점에 대한 단순한 나열에 그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다수의견에 보충의견을 단 김선수·김상환 대법관은 "절대적으로 올바른 하나의 역사 인식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를 부정했다. "과거에 있었던 사건은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는 현대 역사학과 자연과학을 방송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방송에 '기계적 균형'이란 잣대를 더는 들이밀지 말라는 뜻이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12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사진=민족문제연구소)
민족문제연구소가 2012년 제작한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포스터. (사진=민족문제연구소)

◇ 백년전쟁 지켜낸 박경신은 누구

기계적 균형에 과거부터 꾸준하게 반기를 든 '문제적 인물'이 있다. 2011년 5월부터 2014년 5월까지 제2기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심의위원을 지낸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다. '인터넷의 자유'를 표방하는 사단법인 오픈넷 이사로 재직 중인 그에겐 잊지 못할 과거가 있다. 방심위가 2014년 7월 14일 남자 성기 사진을 올린 개인 홈페이지를 차단하자 박 교수는 이 게시물을 갈무리해 자신의 블로그에 올렸다. 심의위원 중 유일하게 음란물이 아니라고 본 박 교수는 그렇게 '표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이 됐다. 

박 교수는 방심위가 백년전쟁을 심의할 때도 "행정제재는 부당하다"는 의견을 냈지만 소수자에 그쳤다. 포기를 몰랐던 박 교수는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소장으로 옮겨 소송전에 나섰다. 대법원에서 이 사건을 대리한 인물은 센터 소장인 박 교수 밑에 있다가 다음 소장이 된 법무법인 이공 소속 양홍석 변호사다. 대법 판결이 있고 하루가 지난 22일 대법원이 있는 서초동의 한 식당에서 박 교수를 만났다. 

다음은 박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 

▲이번 대법 판결을 어떻게 평가하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지상파 보도가 아닌 '퍼블릭 액세스'(시청자 제작 영상물) 다큐를 심의할 때 매체와 프로그램별로 봐야 한다는 심사기준을 정립한 건 큰 의의가 있다. 다큐는 제작 의도를 가지고 만들 수밖에 없는 건데, 보도 프로그램처럼 기계적 중립성을 적용하면 어떤 다큐도 방송할 수 없다. 

두 번째는 역사적인 건데, 방송 심의를 '정권 보위' 도구로 이용하려는 흐름에 철퇴를 가한 것이다. 보수 정권에서 대통령에 비판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제재하는 경우가 많았다. 법무부와 검찰(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보도), 교육부(일제고사 거부 교사 인터뷰), 농림축산식품부(광우병 MBC PD수첩 탐사보도)와 입장이 다르다고 징계했다. 심지어 사법부 판결('박정희 혈서 조작' 손해배상, MBC 기자해직 무효)을 보도한 것도 정부에게 불리하면 징계를 내렸다. 반면 정부 입장을 그대로 받아쓴 프로그램은 '문제없음'으로 판단했다. 

▲문제로 지적한 대부분은 '공정성 심의'를 다룬 사건에서 나타났다. 공정성 심의에 부작용이 있다면.  
=균형을 잡겠다면서 스스로 균형을 잃어버렸다. 방송이 사회현상을 정화하지 못하고, 방송심의가 정치적 싸움이 됐다. 방송심의가 언론을 제어해야 하는데 오히려 언론이 방송심의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소송이 시작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공익법센터에선 백년전쟁 행정제재가 어떤 의미가 있길래 소송을 지원한 건가. 
=공정성 심의를 빌미로 해서 정부 비판적인 방송을 계속 징계하는 사례들이 반복돼왔다. 여론이란 방송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국민의 알 권리 역시 방송을 통해 형성된다. 이런 식으로 방송이 방심위 징계(방통위는 심의기구인 방심위 심의 결과를 대부분 그대로 인용해 행정처분)가 무서워서 자체검열을 하는 것은 국민의 사상의 자유를 침해한다고생각해서 소송을 지원했다. 

▲공정성 심의로 다큐 제작진의 표현의 자유를 넘어 다큐를 접하는 시청자들의 사상의 자유까지 침해된다는 뜻인가.
=맞다.

▲전원합의체 쟁점으로 가보자. 대법관 한 명 차로 원심판결을 파기했다. 핵심 쟁점은 뭐였나. 
=법원에서 시청자 채널에 심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는 판단이 판례로 확정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전까지는 모든 방송에 공정성이 적용된다고만 알고 있었지, 방송 양태에 따라서 나눠서 심의를 해야 된다고 판례로 확정된 적은 없었다. 

▲역사적 인물의 공적을 재평가하면서 의문을 제기한 방식에서 다수의견과 반대의견은 극명하게 달랐다. 반대의견은 고인은 본인에게 제기된 의혹을 토론으로 대응할 수 없다며,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선 표현의 자유가 적극적으로 보장될 수 없다는 취지였다. 다수의견에선 주류가 아닌 의견일수록 의혹 제기가 필요하다고 했다. 
='죽은 사람은 말할 수 없다'(사자명예훼손 법리)를 역사적 인물에 적용할 수 없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그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더 엄격히 (확정된) 사실만 얘기하라는 건 공적인 토론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소수의견이 사자명예훼손죄에 대해서 잘못 판단한 게 아닌가. 

조희대·권순일·박상옥·이기택·안철상·이동원 대법관은 반대의견에서 "사자(死者)는 토론의 장에 나설 수가 없다"며 "진실한 사실로서 오로지 공공의 이익에 관한 것이 아닌 이상 사자의 명예를 존중하여야 한다"고 판시했다. 

▲반대의견은 사자명예훼손을 따질 때 방송심의규정을 근거로 형사 재판에서 통상 적용하는 '고의성'을 배제했는데.
=방송심의규정은 법률이 아니다. 법원은 법률을 따를 의무가 있지 행정부가 정한 규정을 따를 필요가 없다. 반대의견은 방송심의규정 사자명예훼손 부분에서 '방송은 진실하고 오로지 공익을 위해야 한다'는 규정을 드는데, 법원은 그 규정에 어긋나게 해석할 수 있다. 죽은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려워진다는 맥락 속에서 대법원은 얼마든지 달리 판단할 수 있다. 

▲이번 대법원 판결로 방송심의를 행정심의가 자율심의로 바뀌어야 한다는 논의도 가능해졌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선수·김상환 대법관은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에서 방송이 공정성을 충족하는지 따질 때 최대가 아닌 최소로 판단해야 한다고 했다. 
=방심위가 정부에 유리한 내용이 담기도록 감시하는 기구로 전락했다. 백년전쟁은 당시 정부가 밀던 '1948년 건국설'에 반기를 들었다. 두 대법관이 공정성 심의를 희석하려고 시도했다고 본다. 그게 국제기준에도 맞다. 영국 공영방송 BBC는 정부심의가 없다. 자율심의한다. 나머지 방송은 정보통신 규제기관인 '오프콤'(Ofcom)에서 심의하는데 "기계적인 중립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중립성은 논쟁 사안을 같은 비중으로 다루라는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게 두 대법관이 말한 것과 맞닿아 있다. 독일도 '외적 다양성'에 기초해 어떤 프로그램 에피소드가 한쪽으로 편향돼 있다고 하더라도 다른 쪽으로 편향된 에피소드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를 접할 수 있게 한다면 공정성에 위반되지 않는다고 얘기한다.

▲대법원 판결이 꼭 표현의 자유를 확대한 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프로그램 다변화로 인한 현실을 반영한다며 심의대상을 보도프로그램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과거 보도 프로그램만을 생각하고 만든 규정을 보도 성격을 띠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 적용하는 게 맞나. 다수의견에 섰지만 별도 보충의견을 쓴 김재형 대법관은 "새로운 유형의 방송 매체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위헌적 결과가 발생한다"고 했다. 
=기계적 중립성의 의미로 공정성은 폐지돼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폐지 안 된 상황에서 어디까지 적용할까를 따져야 한다. 시사와 보도는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보도는 하고 시사는 하지 말자는 조금 어렵지 않을까. 방송심의규정이 계속 존재하는 한 그렇다는 얘기다. 

▲문제가 된 방송심의 대상은 비지상파 방송이었다. 이번 대법원 판결과 관계없이 지상파 방송은 여전히 심의 기준이 엄격하게 적용될 것이란 예상도 나오는데. 
=대법원이 '공정성 심의'를 폐지한다고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공익법센터로선 원하는 결정이 나왔다. 시청자 채널이니까 기준을 완화해야 하고, 다큐는 제작의도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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