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1950년 흥남 철수는 1만4천명의 목숨을 건진 'X마스의 기적'
[크리스마스] 1950년 흥남 철수는 1만4천명의 목숨을 건진 'X마스의 기적'
  • 최석진 기자
  • 승인 2019.12.25 07:34
  • 수정 2019.12.2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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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는 화물을 싣기로 했던 배 위에 피난민들이 가득하다
SS메러디스 빅토리호. 애초에는 화물을 싣기로 했던 배 위에 피난민들이 가득하다. [연합뉴스]

BBC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1950년 미군 주도 아래 크리스마스 이브에 단행되었던 한반도의 흥남 철수 작전에 대한 특집기사를 내보냈다.

BBC는 당시 피난민들의 상황을 묘사하면서 특히 배에서 태어난 5명에 대해 보도했으며, 이후 피난민들이 겪어야했던 이산의 아픔에 대해서도 자세히 다루었다. 다음은 이 기사의 전문이다.

약 70년 전에 미국의 상선이 북한의 바닷가에서 14,000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구조한 일이 있었다. 다음 이야기는 다행히 그 배에 올라탈 수 있었던 사람들의 여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범상치 않은 탄생의 순간은 1950년 크리스마스에 이루어졌다.

산모는 피난길에 나선 14,000명 북한 주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중국군의 총칼이 무서워 미국 상선에 짐짝처럼 꾸겨 넣어지는 피난길이라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갑판에는 간신히 서있을 공간조차 부족했으니, 의료 장비는 당연히 기대할 수 없었다.

“산파가 자신의 이빨로 제 탯줄을 끊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경필은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람들은 제가 죽지 않고 무사히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한국전쟁의 가장 암울했던 순간 ‘SS 메러디스 빅토리 호’ 선상에서 태어난 5번째 아이였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3일에 걸친 항해 덕분으로 수천 명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며, 그들 중에는 현 대한민국 대통령의 부모도 끼어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기적의 배(the Ship of Miracles)’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50년 12월 흥남 부둣가로 모여든 피난민들
1950년 12월 흥남 부둣가로 모여든 피난민들

철수

1950년 12월 약 100,000명의 UN군이 북한의 항구 도시 흥남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중국이 이른바 ‘조선 전쟁’에 참전해서 파상공세를 밀어붙이면서 UN군은 가까스로 산악 전투에서 철수해 흥남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UN군은 자신들보다 거의 네 배나 많은 중국군과 맞닥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는 길은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로 바다를 통하는 철수였다. 그들은 시간이 촉박했다. 중국군이 목전까지 다다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철수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UN군들만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북한 주민들도 엄동설한의 바닷가에 대기 중이었다. 이들 피난민들 중에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깊은 눈 속을 헤쳐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추위에 떨고, 기진맥진해서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있었다.

SS 메러디스 빅토리 호를 포함해서 약 100척의 미국 함선들이 군인들과 보급 물자, 그리고 탄약을 싣고 부산과 거제로 가기 위해 흥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들의 계획에는 피난민 구조는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미 해병의 에드워드 포니 대령은 다른 사람들과 힘을 합쳐 피난민 구조를 자신들의 임무에 포함시키려 노력했다. 포니 대령의 손자 네드 포니는 현재 대한민국의 서울에 거주 중이다.

“전쟁에서 이기려한다면 민간인 구조에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해병대를 제대한 네드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군대가 먼저이지요.”

그는 이렇게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지 그 일을 해냈습니다. 철수를 지휘하던 사람들은 마음속의 선한 인성에 이끌려 의로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의로운 선택을 한 것이지요.”

모든 사람들을 배에 승선시키는 데에는 며칠이 걸렸다. 그 동안 피난민들은 바닷가에서 짐짝처럼 엉겨 붙어있으면서 자신들의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들 중에는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던 한보배도 어머니와 함께 끼어있었다.

“생사가 달린 순간이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배에 올라타지 못하면 죽는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는 일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바닷가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 저는 슬픔에 젖었습니다. ‘이제 떠나는 구나’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배안의 상황은 녹녹치 않았다. 피난민들은 자동차들과 보급품 상자들, 탄약 상자들 사이에 짐짝처럼 끼어있었다.

음식도 없었고, 식수도 없었다. 가장 규모가 컸던 SS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최대 정원이 승무원 60명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화물뿐만 아니라 14,000명의 피난민을 싣고 있는 것이다.

한보배는 작은 배의 갑판에 그대로 노출되어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담요를 챙겨오기는 했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엄마와 제 여동생 그리고 저는 하나의 짐 꾸러미와 같았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선상에서 꾸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회상했다.

“파도가 얼굴을 때리곤 했으며, 엄마는 우리들이 혹시 바다에 빠져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배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았다. 남한을 향한 절체절명의 여정을 선택했던 사람들 모두 무사히 육지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들 중 절반은 피난민들이었고, 나머지 반은 군인들이었다.

흥남 철수는 미국 역사상 전투 상황에서 이루어진 최대의 해상 수송 작전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SS 메러디스 빅토리 호가 거제항에 입항할 때쯤에는 배 위에는 5명의 새로운 생명이 탄생해있었다.

미국의 승무원들은 한국 이름을 몰랐으므로 이들 아기들에 ‘김치’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들 중 이경필은 ‘김치 넘버 5’였다.

“처음에는 이 이름이 정말 싫었습니다. 제 이름이 따로 있는데 김치 5라니요.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이름을 지어준 사람에게 감사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흥남 철수 이야기를 되살리는 일을 돕고 있으며, 그 와중에서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전 승무원들 몇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중에는 그의 어머니의 출산 과정을 도왔던 사람도 포함되어있다.

그는 언젠가는 거제항에 흥남 철수에 나섰던 배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건립되기를 바란다.

작고한,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 여사가 지난 2004년 7월 금강산 온정각에서 열린 제10차 남북이산가족 단체 상봉에서 북측의 동생인 강병옥 씨를 만나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 철수의 피난민 대열에 끼어있었다.
작고한, 문재인 대통령의 어머니 강한옥 여사가 지난 2004년 7월 금강산 온정각에서 열린 제10차 남북이산가족 단체 상봉에서 북측의 동생인 강병옥 씨를 만나는 모습.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도 흥남 철수의 피난민 대열에 끼어있었다.

이산

김치 넘버 2,3,4의 그 뒤 흔적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나 선상에서 제일 먼저 태어난 ‘김치 넘버 1’은 그 뒤 손양영이라는 이름으로 성인이 되었다. 그의 부모는 흥남에서 그의 가족의 가슴을 두고두고 무너져 내리게 할 뼈아픈 결정을 해야만 했다.

당시 대부분의 피난민들은 피난길이 그렇게 길지 않을 것으로 믿고 있었다. 며칠, 또는 길어야 몇 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귀향을 꿈꾸며 살았다. 하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손양영의 부모에게는 그 말고도 2명의 자녀가 더 있었다. 9살이었던 태영, 5살이었던 영옥이 그들이었다. 그날 날씨는 몹시도 추웠고 항구는 아비귀환이었다.

손양영의 아버지는 만삭의 아내를 바라보면서 그녀가 배에 타야 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곧 돌아오겠다고 안심을 시키고 두 명의 자식들을 자신의 동생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는 서로 볼 수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성립되었어도 한반도가 반 토막으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두 개의 한국은 아직도 공식적으로는 전쟁 중이다.

이후 손양영의 어머니는 수 년 동안은 아이들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졸랐었다. 그러나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손양영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이면 쌀과 정한수를 떠놓고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곤 했다.

“저는 이산가족의 슬픔과 고통을 나타내는 살아있는 상징입니다.”

손양영은 이렇게 말했다.

“제 가족은 이산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저도 지금 제 자식들이 있고 손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매일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가서는 자식들의 안위를 돌아봅니다.”

그는 이렇게 이어나갔다.

“같은 엄마의 몸에서 태어나 누구는 부모와 함께 사는 행운을 누리고 누구는 부모와 떨어져서 온갖 풍상을 다 겪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의 형과 누나들은 엄마아빠가 곧 돌아올 거라고 분명히 믿었을 테니까요.”

손양영은 북한의 허용으로 아주 드물게 이루어지는 국제 적십자사를 통한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그들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메모를 적어놓은 자신의 아기 때 사진 한 장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 사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태영이 형을 만날 때까지 이 사진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라.’

현재 약 백만 명 정도의 흥남 철수 피난민들의 후손들이 남한과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을 것으로 추산된다. 이것은 생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깊은 슬픔이 도사리고 있다.

그날 크리스마스이브에 미국인들의 배가 흥남에서 빠져나오자 제임스 도일 해군제독은 망원경으로 흥남 부두를 바라보았다.

“그는 적어도 배에 탄 피난민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부두에 남아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네드 포니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현재 흥남 철수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책을 쓰는 중이다.

이와 관련해서 미국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중국군들이 남아있는 자원들을 활용하지 못하도록 부두를 폭파시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보배는 그녀가 탄 배 위에서 이 폭파 순간을 회상하면서 ‘불바다’였다고 말했다. 부두가 폭파되고 얼마 있지 않아 중국군들이 밀어닥쳤다.

“부두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분명히 모두들 죽었을 겁니다. 폭탄과 대포 사격을 떠올리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전쟁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절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손양영은 북한의 가족들이 살아있기를 희망한다. 어쨌든 그는 ‘기적의 배(the Ship of Miracles)’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 기적이 또 한 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북한의 형제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생전에 부모님은 형과 누나를 생각하지 않은 적이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이제 부모님들은 하늘나라에 계시지만 틀림없이 그곳에서도 놓친 자식들을 생각하실 겁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들의 희망이 꼭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정말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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