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안태근 무죄' 주심 노정희의 이유 있는 판결
[WIKI 프리즘] '안태근 무죄' 주심 노정희의 이유 있는 판결
  • 윤여진 기자
  • 기사승인 2020-02-01 12:19:52
  • 최종수정 2020.02.01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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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판결문'으로 '안태근 판결문'을 읽다
'결과가 아닌 과정' 직권남용죄 공소는 타당할까
지난 2018년 7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선서하는 노정희 당시 대법관 후보.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8년 7월 24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선서하는 노정희 당시 대법관 후보. [사진=연합뉴스]

"저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원에 헌법이 부여한 인권보장의 의무와 여성·아동·장애인 등 소수자 보호의 사명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여 왔습니다"

지난 2018년 7월 24일 노정희 대법관 후보자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린 국회 245호. 노 후보자는 청문위원들 질의에 앞선 모두발언에서 28년 법조인 자취를 풀어놨다. 여성 대법관 김소영·박정화·민유숙 대법관이 이미 재직 중인데, 본인이 대법관이 돼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는 물음을 미리 의식한 듯한 발언이었다. 

실제 이날 청문회에선 '여성'이란 단어가 33번 등장했다. 노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대법원 대법정에 있는 대법관 의자 13개 중 4개 주인이 여성이 되는 까닭이다. 

 

지난 9일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에서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낸 후 석방돼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나오는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사진=연합뉴스]
지난 9일 대법원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에서 무죄 취지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법으로 돌려보낸 후 석방돼 서울 송파구 동부구치소에서 나오는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 [사진=연합뉴스]

◇ 여성계로부터 '배신' 소리 들은 노정희

"원심 판결을 파기합니다"

지난 9일 대법원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검사장)에게 유죄를 인정한 원심을 깨고 서울중앙지법으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이날 안 전 검사장 지시를 받아 인사담당 검사가 여주지청에서 경력검사로 근무한 서지현 검사를 재차 통영지청으로 경력검사로 발령낸 인사안을 작성한 행위가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때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직권남용죄는 직무권한을 남용한 공무원을 처벌하는 형법 조항인데, '의무 없는 일'은 직권남용의 결과다. 직권남용이 있어도 의무 없는 일이 없다면 직권남용죄가 없는 것이다.

서검사가 근무한 여주지청과 통영지청 모두 '부치지청'이다. 부치지청이란 지방검찰청 소속 소규모 지청을 말한다. 여기엔 검사장이나 차장검사가 없고 지청장과 부장검사가 배치돼 평검사들이 일하기 꺼리는 곳이다. 그런데 서 검사는 3개 검찰청에서 일한 뒤 한 번 배치되는 부치지청에서 두 번이나 일하게 됐다. 1981년 검찰청법 개정으로 검찰인사위원회 제도를 도입한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1심과 2심에서 인정된 전제사실 따르면 서 검사는 2010년 10월 검찰총장이 동석한 장례식장에서 거나하게 취한 남성 선배 검사들로 둘러싸인채 안 전 검사장에게 강제추행을 당했다. 5년 후 안 전 검사장은 법무부 장관이 대통령에게 제청하는 인사안을 만드는 검찰국 책임자로 부임했다. 

2019년 1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미투 1년 좌담회에서 발언하는 서지현 검사 [사진=연합]
2019년 1월 29일 국회에서 열린 미투 1년 좌담회에서 발언하는 서지현 검사 [사진=연합뉴스]

검찰이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한 범죄사실은 여기서부터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안 전 검사장은 소문으로 떠도는 추행 사실을 뒤늦게 숨기고자 서 검사를 부치지청으로 발령냈다. 2015년 8월 하반기 검사인사가 발표된 직후 서 검사는 안 전 검사장 뜻대로 사표를 냈다. 

1·2심은 부치지청 제도가 '검사인사원칙집'에 반영된 만큼 인사담당 검사가 따라야 할 의무가 있다고 봤다. 그런데 대법원은 의무가 아닌 고려사항으로 봤다. 때문에 안 전 검사장 지시를 받아 서 검사를 부치지청으로 발령내는 인사안을 인사담당 검사가 작성한 행위가 의무 없는 일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직권남용죄 법리오해를 이유로 원심을 파기해 아직 유·무죄가 가려진 건 아니지만, 결론이 무죄가 아니기 어렵다. 2018년 겨울 여성들의 미투를 끌어낸 서 검사 폭로 종착지는 '죄가 아님'이 돼 버렸다. 여성 대법관 중에서도 성 인지 감수성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노 대법관이 이 사건 주심을 배당됐을 때 환호했던 여성계는 배신을 당한 걸까. 아니면 그 환호가 근거 없는 믿음이었을까. 

◇ "어쩔 수..." 블랙리스트 판결문에서 읽히는 '노정희의 고민'

2018년 11월 김소영 대법관이 퇴임하면서 대법원 전원합의체 선고가 이뤄지는 대법정에 있는 13개 의자 중 여성 대법관 몫은 3개로 줄었다. 전합에 오른 여성이 피해자인 사건에서 다수의견을 내는데 필요한 7명을 확보하기엔 더욱 어렵게 된 것이다. 

하지만 소수자 몫으로 임명된 노 대법관에겐 보충의견이라는 선택지가 있었다. 29일 심리미진을 이유로 파기한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다수의견에 선 노 대법관은 안철상 대법관과 별도 보충의견에서 안태근 사건 판결문에서 밝히지 못한 '어쩔 수 없음'을 털어놨다. 안태근 사건이 대법관 4명이 의견일치로 판단하는 소부에 머물러 개인의견을 판결문에 담지 못한 노 대법관으로선 사건구도가 비슷한 블랙리스트 사건이 기회였던 셈이다. 

실제 안태근 사건과 블랙리스트 사건은 범죄구도가 닮았다. 안태근 사건에서 가해자-중간 가해자-피해자 구도는 '검찰국장-검사인사담당 검사-서지현 검사'로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대통령 비서실장-문화체육관광부 피감독기관-좌파 예술인'과 유사하다. 노 대법관은 좌파예술인이 실제 피해자인데도 특별검사가 그렇게 설정하지 않은 점을 문제 삼았다. 어찌보면 안태근 사건에서 서 검사가 직권남용죄 피해자가 되지 못한 점을 돌려 말한 것이다.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별개의견을 달아 박영수 특별검사 기소 문제점을 지적한 박상옥 대법관. [사진=연합뉴스]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별개의견을 달아 박영수 특별검사 기소 문제점을 지적한 박상옥 대법관. [사진=연합뉴스]

◇ "검찰 기소가 잘못됐다"

블랙리스트 판결문에서 눈에 띄는 건 '안철상·노정희 대법관의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과 '박상옥 대법관의 별개의견'이 겹친다는 사실이다. 공교롭게도 모두 안태근 사건 결론을 얼마 전 낸 대법원2부 소속이다. 블랙리스트 사건 토론을 2부 대법관들이 주도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박 대법관 판단은 직권남용죄 유죄 부분을 파기한 다수의견과 결론을 같이하면서도 그 이유를 달리했다. 박 대법관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직권남용 자체가 인정되지 않으며, 인정된다고 해도 '직권남용 결론이 아닌 그 과정을 기소'한 특검의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 사건 본질은 박근혜 전 대통령 지침을 받은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조윤선 전 정무수석과 김상률 전 교육문화수석을 통해 문체부를 움직였고, 문체부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직원을 통해 '좌파 문화예술인'을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에서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특검은 김기춘·조윤선·김상률을 가해자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직원을 피해자로 직권남용죄를 구성했다. 이들 공범이 직권을 남용한 공무원, 이들 법인 직원이 의무 없는 일을 한 사람으로 죄를 구성했다. 실제 피해자인 좌파예술인은 이 구도에 없다. 

박 대법관은 별개의견에서 직권남용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직권남용이 인정된다고 가정해도 "권한의 행사로 말미암아 각 법인의 심의 과정이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거나 국가재정법에 반하는 지출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구체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고 했다. 

'블랙리스트'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 [사진=연합뉴스]
'블랙리스트' 혐의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 [사진=연합뉴스]

박 대법관 논리는 김 전 실장 등이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직원에게 "블랙리스트를 보내라"고 한 지시가 직권남용이라 해도 그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 지시로 인해 실제 좌파예술인들이 문예기금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이 있어야만 처벌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특검은 좌파 예술인이 지원에서 배제됐다는 사실을 입증하지 않았다. 좌파 예술인이 피해자란 사실은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직원이 부당한 지시를 따랐다는 '범죄사실의 전제사실'로만 활용됐다. 박 대법관으로선 '과정이 그러니 결과도 그렇다'란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던 셈이다. 

박 대법관은 '직권남용죄 검찰 소추의 문제점'이란 소제를 달아 박영수 특별검사 기소를 작심 비판했다. "굳이 피고인들을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로 의율하려면,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의 직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각 법인의 기금 배분을 위한 공모사업 신청자들에 대한 권리행사를 방해한 것으로 보는 것이 실체적 진실에는 보다 더 부합"하다고 했다. 검사장 출신 대법관이 공소장을 다시 쓰는 게 낫다고 훈수를 둔 것인데 역시 검사장 출신 박영수 특검에겐 치욕이다. 

파기이유가 달랐던 안철상·노정희 대법관도 거들었다. 이들은 다수의견에 별도 보충의견을 달아 '문예기금 등 지원배제 관련 공소사실의 구조'라는 교과서 속 판례분석에 등장할만한 소제를 붙였다. 

이들은 "이 사건 공소사실은 그 전제사실에서 문예기금 등 지원배제가 이루어졌다고 적시하면서도, 그 지원을 신청한 문화예술인 등에 대하여 지원배제를 하거나 하게 한 최종행위를 구성요건 사실로 한 것이 아니"라며 "지원배제의 처분이나 의결을 하게 한 행위를 소추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했다. 특검이 구성한 공소사실이 기본에도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다.  

박상옥·안철상·노정희 세 대법관 모두 직권남용 행위의 결과가 아닌 과정을 기소한 건 잘못이라고 비판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안철상·노정희 대법관은 보충의견에서 "과정의 행위를 한 사람은 최종행위에 대해서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공범이 될 수 있고 과정의 행위와 관련해서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상대방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특검 기소에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직원은 피해자지만, 실제적 진실을 따지면 좌파 문화예술인에겐 가해자란 뜻이다. 그런데 특검이 실체적 진실을 따지지 않고 김 전 실장 등에게 불리한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이들 법인 직원을 피해자로 구성했다는 것이다.  

 

지난 9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이 무죄취지로 석방한 대법원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를 규탄하는 한국여성민우회. [사진=연합뉴스]
지난 9일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을 무죄 취지로 직권 석방한 대법원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를 규탄하는 한국여성민우회. [사진=연합뉴스]

◇ '서지현=피해자' 공소장이었다면... 결론은 달랐다?

안철상·노정희 대법관은 "최종행위가 기소되었다면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가 성립할 수 있었음에도 과정의 행위만을 기소하여 그 행위가 구성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처벌할 수 없게 된 경우"에 따르는 부작용을 열거했다. 블랙리스트 사건은 어찌 되었든 직권남용죄가 부분적으로 인정됐다. 두 대법관이 말하고 싶었던 사례는 본인들이 20일 전 판단한 '안태근 사건'인 것이다. 

이들은 결과를 기소했을 때 처벌받을 수 있는데 검사가 과정을 기소해 그러지 못하는 결과로 "일반인의 입장에서 볼 때 그 직권남용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함에 따른 사법불신"을 예상했다. 안태근 사건을 마주한 노 대법관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결과를 기소했으면 유죄인데 과정만 기소했을 경우 법관의 역할은 "법원으로서는 기소된 행위에 대한 판단을 하면 되고"라면서 "과정의 행위만으로 최종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묻게 된다면 행위를 초과하는 책임을 묻게 되어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고 했다. 

안태근 사건을 보면 서 검사가 인사 불이익을 본 피해자인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으면서도 별도 재판 없이 진실로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사건에서 '성추행 사건 진상규명 및 피해회복 조사단'(단장 조희진 당시 서울동부지검장)은 피해자를 서 검사가 아닌 검사인사담당 검사로 봐 안 전 검사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노 대법관 입장에선 검사인사담당 검사는 분명 가해자로서 공범인데 거꾸로 피해자가 된 걸 납득할 수 없다. 동시에 가해자인 안 전 검사장에게 검사인사담당 검사에게 부당한 인사안을 작성하라고 지시한 점을 들어 서 검사가 인사상 불이익을 당한 사실까지 법적 책임을 지라고 한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안태근 사건 판결문을 내놓은 후 내적 갈등에 시달린 노 대법관이 20일 뒤 블랙리스트 판결문을 빌려 속내를 드러낸 게 아닐까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나는 배신을 하지 않았다고. 검찰이 기소만 잘했어도 안 전 검사장은 유죄라고'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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