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아무것도 하지 않은 당신, 무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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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0.02.11 19:46
  • 수정 2020.02.12 0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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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리스트 사건과 감찰무마 사건의 교차점, 무작위
예술위에 심의자료 주지 않은 사무처직원이 피해자?
금융위에 '유재수 첩보' 넘기지 않은 백원우는 공범
[사진=도서출판사 '살림']
[사진=도서출판사 '살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 저자이자 '알프레도 아들러 전도사' 기시미 이치로가 2016년 국내에서 발간한 아들러 심리학 대중해설서 제목이다. 아들러만큼이나 유명해진 이 문장은 "불안해서 할 수 없는 게 아니라,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불안이라는 감정을 지어낸 것"이라고 훈계한다. 부(不)작위,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결과가 아닌 원인으로 보라는 아들러 심리학을 거꾸로 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음'을 결과로 책임지라는 것이다. 상급자 지시를 명분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게 한' 하급자는 죄를 면할 수 있나. 박근혜 정부와 문재인 정부 청와대에서 격차를 두고 벌어진 '블랙리스트'(문화예술기금 지원배제) 사건과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은 그 질문을 법원으로 가져갔다. 

 

문화예술인 지원배제 목적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법인 직원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 [사진=연합뉴스]
문화예술인 지원배제 목적을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법인 직원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혐의(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정무수석. [사진=연합뉴스]

◇ 직권남용을 좁혔다는 일반론은 진실일까
지난달 29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좌파 문화예술인' 지원배제 목적으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법인 직원들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한 혐의(직권남용)로 기소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파기환송심에서 '유죄인 행위'와 '당장 유무죄를 따지기 어려운 행위'를 나눠 판단했다. 

다만 대법원은 원심이 직권남용죄 법리를 오해한 건 마찬가지라며 두 행위를 묶어 사건을 통째로 파기했다.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무권한을 남용해 다른 사람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거나 그 사람의 권한 행사를 방해했을 때 인정된다. 원심은 독립한 구성요건인 '직권남용'과 '의무 없는 일'을 각기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잘못이 있다는 취지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직권남용죄 구성요건을 까다롭게 판단했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상급자라고 볼 수 밖에 없는 대통령 비서실장 지시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문체부 산하 법인 소속 직원이 자기 일을 하지 않은 행위 역시 '의무 없는 일'로 인정된 까닭이다. 이제껏 직권남용죄는 '작위'를 처벌해왔다. 

◇ '무작위 직권남용'이란
문화예술진흥법 제29조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은 직무상 외부의 어떠한 지시나 간섭도 받지 않아야 한다고 선언한다. 이 법 33조에 따라 위원 보조를 위해 사무처를 둔다. 예술위 직원에게 '위원 직무를 보조할 의무'가 도출되는 이유다.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소속 직원도 같은 경우다. 

그런데도 이들 법인 직원들은 ▲지원배제 방침이 관철될 때까지 사업 진행 절차를 중단하거나 ▲위원회 전체회의 심사 자체를 보류했다. 법에서 부여한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방법으로 해당 위원회의 문예기금 심사를 방해한 것이다. 이른바 '무(無)작위'에 의한 직권남용이다. 

 

지난해 12월 3일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소속 특별감찰반원 수사관 빈소에 조문한 뒤 굳은 표정으로 나오는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사진=연합뉴스]
지난해 12월 3일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소속 특별감찰반원 수사관 빈소에 조문한 뒤 굳은 표정으로 나오는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 [사진=연합뉴스]

◇ 첩보 넘기지 않은 백원우 운명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나타난 무작위에 의한 직권남용 구도는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에서도 재현된다. 세 법인 직원이 각 위원회에 심의에 필요한 서류를 주지 않았다면,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금융위원회에 소속 공무원 비위 첩보를 넘겨주지 않았다. 역시 무작위다.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부장검사 이정섭)가 지난달 29일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을 불구속 기소한 공소장에 따르면 금융위는 청와대로부터 유재수 전 금융정책국장 비위를 건네받지 못해 자체 감찰이 불가능했다. 

국가공무원법 제78조에 따르면 소속 기관의 장은 해당 공무원을 상대로 감찰조사를 실시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감찰조사는 청와대 특별감찰반이 우선 진행한 만큼 금융위로선 비위사실을 넘겨받아야 했다.

하지만 '친문'(親文) 인사인 김경수 경남도지사 청탁을 받은 백 전 비서관이 금융위 담당인 박형철 당시 반부패비서관을 제쳐두고 감찰을 무마한 까닭에 비위사실은 청와대에서 금융위로 이첩되지 못했다. 

공소장에 따르면 역시 친문 인사들의 부탁을 받은 당시 민정수석인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은 '유재수가 사표를 낼 것'이란 명분으로 특감반을 지휘하는 박 비서관에게 감찰 중단을 종용했다. 동시에 백 전 비서관에겐 '금융위에 유재수의 구체적 비위를 알려주지 말 것'을 지시했다. 

김용범 당시 금융위 부위원장은 검찰 조사에서 백 전 비서관으로부터 "청와대 감찰이 있었는데, 대부분 클리어되었고 일부 개인적인 사소한 문제만 있으니 인사에 참고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진술했다. 

◇ 사라진 '진짜 피해자'를 찾아라
두 사건에서 다른 점이 있다면 블랙리스트 사건에선 '진짜 피해자'와 '가짜 피해자'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문예기금을 받지 못한 문화예술인 입장에선 문체부 산하 법인 직원은 공범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런데도 박영수 특검은 유리한 진술을 끌어내려는 목적이었는지 이들 직원을 피해자로 설정했다. 

이와 달리 백 전 비서관은 조 전 장관과 함께 공범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블랙리스트 사건에서 박상옥·안철상·노정희 대법관이 '과정의 행위를 한 사람은 최종행위에 대해서는 직권남용죄 공범이 될 수 있다'고 지적한 점에 비춰 적어도 이 사건은 그런 비판은 피할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 공직사회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그 답은 '유재수 감찰 무마' 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김미리)가 내놓을 판결문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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