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68) 한-미, 김대중 생명과 ‘전두환-레이건 회담’ 맞바꾸다
청와대-백악관 X파일(68) 한-미, 김대중 생명과 ‘전두환-레이건 회담’ 맞바꾸다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20-03-03 08:26:58
  • 최종수정 2020.03.03 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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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글라이스틴 대사, 전두환 대통령, 김대중, 노신영 외무장관 [연합뉴스]
왼쪽부터 글라이스틴 대사, 전두환 대통령, 김대중, 노신영 외무장관 [연합뉴스]

1980년 12월 6일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가 청와대를 방문, 전두환 대통령과 만났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해럴드 브라운 장관이 12월 13일 한국을 잠시 방문하려 한다’고 전한 후 김대중의 사면을 정중히 요청하는 지미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했다.

대사는 또한 미국의 의원들 및 차기 행정부 관련 인사들 중 워싱턴에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대화 내용도 전했다. 그는 카터 대통령의 친서는 ‘김대중 문제에 관심이 많은 미국 인사들의 의사를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공화당과 민주당 인사들의 생각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들 모두 김대중의 처형은 한국의 대외 이미지를 극도록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미국의 대한(對韓) 정책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대사는 “미국 정치인들에게 전두환 대통령이 직면한 딜레마, 대통령으로서 염두에 두어야 할 한국 국내적 요인들을 설명했을 때, 그들은 한국이 국체적으로 입을 손실에 무게의 중심을 두어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고 말했다.

전두환은 브라운 장관의 방한 소식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표정이었다. 이 때문인지, 그는 글라이스틴 대사가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있기도 전에 카터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한 것을 못마땅해 하지 않았고, 김대중의 사악함에 대해 일장 훈시를 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는 ”미국측 의사를 그토록 확실히 전해준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전두환이 그동안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정권의 미국 승인을 눈 앞에 두고 있다는 생각 때문으로 여겨졌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대통령 집무실을 나설 때 회합에 배석했던 김경원 비서실장은 그의  등을 두드리면서 “오늘 회담은 가장 성공적이었다”고 치하했다.

김대중 구명을 위한 카터 행정부의 마지막 노력을 전개한 브라운 장관은 짧은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카터 대통령의 엄중한 메시지를 전하는 능숙함을 과시했다.

12월 13일. 전 대통령과의 장시간에 걸친 회담을 통해 브라운은 김대중의 처형이 장래 한-미의 안보와 경제관계에 미칠 심각한 결과를 설명했다. 전두환은 “법원의 결정은 존중돼야 한다. 대법원이 사형선고를 확정하면 그대로 집행돼야 한다”는 말로 강경하게 맞섰다.

그러나 그는 미국에 대한 한국의 역사적 부채와 경제와 안보관계의 중요성, 그리고 미국의 권고를 신중히 고려하겠다는 점을 강조했다. 회담 분위기는 정중했다.

브라운 장관은 본국으로 타전하는 전 대통령과의 회담에 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일이 어떻게 종결될지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면서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더 이상은 다른 도리가 없다”고 썼다.

대사는 보고서에서 그보다는 조금 낙관적인 견해를 피력했다. “강경자세의 도가 높음을 느낄 수 있었다. ··· 그러나 가장 확실히 부각된 것은 전두환이 우리에 대한 한국의 부채를 강조한 점과 우리 견해를 염두에 두겠다는 그의 태도였다.”

당시 김대중을 위한 카터 행정부의 특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었던 사람은 전두환이나 노신영 외무부장관, 그리고 그의 측근들 뿐이었다. 카터 행정부가 보인 노력은 미국의 대통령선거 전 특히 절대적이라 할 만큼 집요했다.

1980년 8월 사형선고를 받은 후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김대중. [연합뉴스]
사형선고를 받은 후 청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김대중. 1980년대 말 김대중의 거취는 한-미 정권의 '폭풍의 눈'이었다. [연합뉴스]

그러나 대통령 선거 후 결정적인 조치가 나오게 한 공은 레이건 대통령 당선자와 그의 보좌관이던 리처드 앨런이었다.

카터 행정부 관리들을 만나고 11월 말 미국을 방문 중이던 유병현 합참의장으로부터 한국측의 강경자세를 직접 들은 앨런은 레이건을 만났다. 그도 김대중의 처형은 ‘도덕적 파멸’이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레이건의 허가를 받은 앨런은 “김대중에게 위해가 가해질 경우 한국은 새로운 행정부과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라는 말을 전했다. 몇 주 후 또다른 전두환의 측근인 정호용 소장이 전두환의 사절 자격으로 앨런을 만나기 위해 미국에 왔다.

그도 처음에는 김대중은 처형돼야 한다는 강경 주장을 펼쳤다. 험악한 회담 분위기로 대화가 거의 중단될 뻔한 위기가 지난 후 앨런은 “김대중을 죽이면 ‘벼락이 당신들을 치는 듯한’ 미국의 반발에 부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정호용은 타협을 시작했다. 그는 레이건의 취임식에 전 대통령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앨런은 취임 후 방문할 것을 대신 제안했다. 그러나 김대중에 대한 선고가 대폭 감형돼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브라운 장관의 서울 방문 직후 이뤄진 이 담판으로 한-미 양 정부 간의 대결은 끝을 보았다.

레이건 대통령의 전대통령의 초청은 1981년 1월 21일 발표됐다.

81년 1월 23일 한국 대법원은 김대중의 사형판결을 확정했고, 이튿날 전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계엄령을 해제했다.

청와대 백악관 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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