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74) 야권, 총선 참여 논쟁… 제도권 진입 투쟁이냐, 정권 들러리냐
청와대-백악관 X파일(74) 야권, 총선 참여 논쟁… 제도권 진입 투쟁이냐, 정권 들러리냐
  • 특별취재팀
  • 승인 2020.07.16 08:19
  • 수정 2020.07.1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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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총칼로 무장한 전두환 정권이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1980년 11월 ‘정치풍토 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한 바 있다. 이 법률로 인해 ‘3김(YS·DJ·JP)’은 물론 동교동계와 상도동계 및 재야 지식인 567명의 참정권이 제한됐다.

전 정권은 여론의 압박에 못 이겨 ‘국민화합조치’ 명목으로 1984년 11월 30일까지 ‘3차 해금조치’를 단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3김’은 해금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고 결국 12대 총선에 참여할 수 없게 됐다.

그러나 3차에 걸친 재야인사 해금 조치는 양김(김영삼·김대중)에게 정치조직 정비의 기회가 됐다. 직접 나서지 못해 아쉽지만, 해금된 인사들을 모아 원격으로 정당을 꾸리면 나름대로 독재 정권과 제대로 맞설 힘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민추협 내에서는 “총선 참여는 전두환을 위한 들러리 밖에 되지 않을 것”이라는 총선 불참파와 “정치인은 선거로 인정받는 것”이라는 ‘총선 참여파’의 대립이 팽팽했다. 정치 감각 9단인 김영삼은 참여파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그는 비록 본인은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전두환 정권을 공개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회가 될수 있다고 생각했다.

‘신민당의 뿌리’인 민추협에 속해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 일선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신당 창당을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신민당의 뿌리’인 민추협에 속해 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은 정치 일선으로의 복귀를 꿈꾸며 신당 창당을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연합뉴스]

총선에 임박해 발표된 해금조치는 자연스럽게 신당창당 가능성을 가늠해 보게 만들었다. 야권의 해금 당사자들은 민한당이나 국민당 입당을 매우 꺼려했다. 사실 민한당, 국민당은 구색을 갖추기 위한 ‘명목야당’에 불과했다. 대세는 역시 신당창당이었다.

민추협의 신당참여 문제는 선거참여와도 밀접하게 결합돼 있었다.

선거 불참파는 총선참여 자체가 전두환 정권을 인정해 주는 것이며, 당시의 선거제도나 촉박한 일정으로 볼 때 선거에 참여해도 참패가 분명하다고 우려했다.

김영삼은 훗날 “민주화의 불씨를 겨우 살려 민추협을 만들었는데, 총선참여를 놓고 의견이 갈리면서 갈등양상까지 빚어졌다”며 “한 참을 고심한 끝에 나 자신은 정치규제로 출마하지 못하더라도, 명실상부한 야당을 창당해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국민에게 전두환 정권을 공개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술회했다.

그는 “비록 시일이 촉박했지만 전두환 정권에 억눌려 온 우리 국민들은 전두환에 대한 분노를 표출시킬 기회만 마련된다면 엄청난 힘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했다. 나는 마음을 굳히고 신당창당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총선 참여’로 가닥을 잡은 김영삼은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민추협 운영위 전체회의를 열고 참여 반대파를 적극 설득헸다.

12월 7일, 서울 종로 한일관에서 민추협 운영위 전체회의가 열렸다. 대세는 총선참여 쪽이었다. 하지만 최종결정은 의장단에 일임하기로 했다. 다음날인 8일, 비민추협을 대표해 정치규제에서 해금된 이철승이 상도동으로 김영삼을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과 이철승은 ‘국민이 원하는 참신한 야당’을 창당한다는 데 원칙적인 합의를 보았다.

또한 두 사람은 전두환 정권이 해금 70일 만인 1985년 2월 초에 선거를 치르겠다는 발상 자체가 원칙적으로 부정선거라는데도 의견을 같이했다.

1984년 12월. 민추협의 김영삼은 신당 창당 및 총선참여를 전격 발표했다. [연합뉴스]
1984년 12월. 민추협의 김영삼은 신당 창당 및 총선참여를 전격 발표했다. [연합뉴스]

사흘 뒤인 12월 11일, 김영삼과 김대중 고문, 김상현 공동의장대행의 이름으로 민추협의 신당 및 총선참여가 공식적으로 발표됐다.

12월 20일, 신한민주당의 이름으로 서울 동숭동 흥사단 대강당에서 전·현직 의원 등 120여명의 발기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발기인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에서 창당준비위원장엔 이민우, 부위원장엔 민추협계 김녹영·조연하, 비민추협계 이기택·김수한·박용만 등 5명이 각각 선출됐다. 이들은 위원장단 산하기구로 총무·조직·정책·재정·선전 등 5개분과위원회와 지구당조직책 심사위 및 대변인을 두고, 필요한 경우에 특위를 구성하며 각 분과 위원회에는 위원장단이 임명하는 위원장 1인과 부위원장 2인 등을 두도록 하는 규정을 채택했다.

신민당은 이날 창당발기 취지문을 통해 “우리는 이제 국가의 생존을 위해 정치부재의 한계 상황을 극복해야할 시점에 이르렀다”며 “이것은 우리들 서민 대중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이며, 이러한 소명은 민주회복과 인간다운 삶을 절규하는 서민대중을 위한 지상명령이요, 반민주세력들에 대한 국민의 항쟁임을 결연히 선언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우리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폭력에 의한 정치적 악순환은 어떤 명분, 어떠한 형태로든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자유민주주의적 참된 사회를 건설하는 것만이 국가 위기를 극복하고 국민의 창의력과 활력을 소생시키는 길이며 이 길은 국민대중의 여망에 부응하여 재야의 모든 민주인사들이 철통같이 단결하여 힘을 모으는 일”이라고 선언해 군부 독재 철폐와 총선 참여 의지를 분명히 했다.

“우리는 민주화운동의 기구로서 민추협의 조직을 계속 유지 확대 강화하면서 범국민적 민주화추진의 일환으로 선거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우리의 선거투쟁은 민정당에 대한 반대투쟁을 그 핵심으로 한다.” (12.20. 신민당 창당발기인대회)

당초 이들은 1967년 당시 제1야당이었던 신민당을 계승하겠다는 의미로 당명을 신민당으로 정하려고 했지만, 전두환 정권하의 선관위가 이를 거부하면서 불발됐다. 결국 약칭만 신민당인 ‘신한민주당’으로 당명을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새 야당의 당명을 ‘신한민주당’으로 정한 것은 유신독재에 맞서 싸워 온 정통야당 ‘신민당’을 계승한다는 뜻이었다. 전두환정권은 과거 정당의 이름을 다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신한민주당은 약칭으로 신민당이 되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선명야당의 이름으로는 적격이었다. 하늘의 축복인 양 하얀 눈이 쏟아졌다. 온 세상이 환호성을 지르는 듯했다.”

김영삼은 훗날 이 창당발기인대회를 ‘전두환 군사정권 출범 이후 가장 감격적인 사건이었다’고 술회했다.

"서울에 정치적 대격변의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주한미대사관은 민추협의 움직임을 시시각각 국무부로 타전했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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