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양승태 PC와 박원순 휴대폰
[WIKI 인사이드] 양승태 PC와 박원순 휴대폰
  • 윤여진 기자
  • 기사승인 2020-08-04 17:55:57
  • 최종수정 2020.08.04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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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농단 PC 소유자는 판사 아닌 법원행정처
박원순 업무폰 역시 본인 아닌 서울시청 소유
法 "압수 시 참여권는 사용자 아닌 소유자에"
사법농단 판례 검토 못한 경찰수사팀의 패착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2일 오전 서울 중구 한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기깃값 및 이용요금을 9년간 서울시에서 납부했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을 강제추행 혐의 등으로 경찰에 고소한 피해자 비서 측이 지난달 31일 발표한 입장문 중 일부다. 피해자 법률대리인인 김재련(사진) 변호사는 "서울시장 업무폰은 변사사건에서 취득됐으나 현재 고소된 강제추행,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 통신매체 이용음란 혐의 입증과정의 증거물"이라고 주장했다. 전날 서울북부지법이 "휴대전화의 디지털 정보 추출과 관련된 장래의 일체 처분은 준항고에 관한 결정이 있을 때까지 그 집행을 정지한다"며 박 전 시장 유가족이 경찰 수사팀을 상대로 낸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이자 반박에 나선 것이다. 준항고란 법관의 재판, 검사나 사법경찰관의 처분에 불복해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다. 박 전 시장 업무용 휴대전화 압수 처분이 적법한지 본안 판단이 나올 때까지 경찰은 디지털 포렌식(정보추출)을 할 수 없다.  
 
앞서 박 전 시장 고소사건과 관련해 임용환 서울지방경찰청 차장을 팀장으로 수사전담 태스크포스(TF)가 꾸려진 서울청 여성청소년과는 지난달 22일 포렌식에 착수했다. 박 전 시장이 업무용으로 사용한 휴대전화 '아이폰 XS'는 확보 당시 잠금 상태였지만 수사팀은 포렌식 기간을 짧으면 이틀로 예상했다. 피해자 측이 비밀번호를 제공하면서 휴대전화를 따로 복제하는 과정을 생략한 덕이다. 법원이 포렌식 절차를 일단 중지하라고 하면서 수사기간은 오히려 길어지게 됐다. 

법원 결정은 적법한 압수수색영장 없이 '고소사건'을 수사하지 말란 뜻이다. 박 전 시장 실종 당일인 지난달 9일 사건을 접수한 서울 성북경찰서는 법원으로부터 긴급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통신기록을 확보했다. 다음날 오전 0시 1분엔 박 전 시장 시신 발견 장소에서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이때 경찰이 확보한 건 '변사사건'의 증거물인 유류물이었다. 때문에 고소사건을 맡은 서울청은 나흘 뒤 별도의 통신영장을 신청했는데 법원은 지난달 17일과 21일 연거푸 기각했다. 피고소인 사인이 자살로 드러났고 검사가 수사를 종결하는 '공소권 없음' 처분이 예정된 상황에서 압수수색 필요성은 없다는 취지다. 사실상 경찰 수사팀이 법원 결정에 불복, 포렌식 절차에 착수하자 유족은 "고인의 사생활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경찰에 항의했는데 법원도 타당하다 본 것이다.

◇ 경찰의 모순, 법원의 모순 
경찰이 현재 수준에서 확보한 단서만으로는 압수수색 필요성이 소명되지 않았다는 법원 판단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서울청은 4일 강제추행 방조 혐의를 보강해 영장을 재신청한 뒤 발부 여부에 따라 포렌식도 재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사실상 압수수색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고 경찰이 인정한 셈이다. 

변사사건에서 압수한 증거물을 별도 영장 없이 고소사건에서 쓰지 못한다는 판단은 대한민국헌법 제12조 제3항 "체포·구속·압수 또는 수색을 할 때에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검사의 신청에 의하여 법관이 발부한 영장을 제시하여야 한다"는 적법절차 원칙에 부합한다. A 사건에서 확보한 영장을 B 사건에 무턱대고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난 5월 29일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며 마스크를 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5월 29일 사법행정권 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며 마스크를 쓰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다만 법원이 '포렌식 중단'을 결정한 이유에도 모순이 있다. 포렌식 절차에서 박 전 시장 사생활이 침해된다는 유족 주장은 전례에 비춰 납득하기 어려운데 법원은 이점 판단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법원은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에서 법원행정처가 개인용 컴퓨터(PC) 사용자인 판사들 동의 없이 하드디스크를 임의제출한 것은 적법하다고 판단했다. 행정처에 심의관으로 파견 나간 판사들이 사용한 하드디스크에선 일선 재판부에서 심리 중인 사건을 분석하는 다량의 보고서가 나왔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 뜻을 따른 행정처가 사법행정권을 남용해 재판 절차에 부당하게 관여했다고 봤다.  

직권남용 혐의로 구속기소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측은 재판에서 해당 문건들은 '검사가 위법하게 수집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검찰 수사팀인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부장검사 신자용)가 확보한 주요 문건엔 ①각 작성자인 판사의 사생활 정보가 다수 있어 ②행정처가 판사들에게 임의제출 동의 여부를 물었으면 결국 제출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형사소송법에서 보장하는 압수수색 당사자 참여 절차가 생략된 거나 마찬가지란 논리다. 

법원은 양 전 대법원장 주장을 쉽게 기각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재판에 넘겨진 사건을 심리했던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5부(재판장 박남천)는 지난해 7월 5일 "영장에 의하지 않는 압수에 해당하는 임의제출에까지 당사자 참여권 규정을 그대로 적용한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임의제출은 말 그대로 영장 없는 제출을 뜻하기에 압수 과정에서 당사자가 참여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실제 형소법은 임의제출에 따른 압수수색에서 당사자 참여권이 보장돼야 한다고 따로 규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일관성이다. 당시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단 주장을 기각하는 추가 이유로 "제출된 문건들은 법원행정처 공용 PC에 저장돼 있던 정보로, 소유나 점유를 판단함에 있어서 전자정보가 기억된 전자매체의 소유를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설령 당사자 참여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어도 당사자는 사용자인 판사들이 아닌 소유자인 행정처라는 뜻이다.

이같은 법리를 박 전 시장 사건에 적용하면 '포렌식 중단'을 명한 법원 판단은 수긍하기 어렵다. 업무용 휴대전화 사용자는 박 전 시장이지만 소유자는 서울시라는 점에서 유족은 당사자 참여권을 주장할 수 없다. 그런데도 법원은 유족이 낸 집행정지 신청을 각하하지 않았다. 기각과 달리 각하는 소송자격요건이 없을 때 법원이 내리는 결정이다. 공교롭게도 유족은 양 전 대법원장처럼 '사생활 보호'를 주장했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받는 강제추행 혐의를 방임 또는 묵인한 서울시 관계자들이 있다며 이들을 강제추행 방조죄 혐의로 고발한 강용석 변호사가 지난달 17일 고발인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받는 강제추행 혐의를 방임 또는 묵인한 서울시 관계자들이 있다며 이들을 강제추행 방조죄 혐의로 고발한 강용석 변호사가 지난달 17일 고발인 조사를 받기 위해 서울지방경찰청에 출석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 '사법농단' 판례 놓친 경찰
서울시 '6층 비서실' 관계자들은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했음에도 박 전 시장 행위를 방조한 혐의로 고발된 상태다. 경찰 수사팀은 피해자 측과 이들 방조 혐의로 고발된 관계자 진술이 다수 엇갈린다는 점에서 대질조사를 검토 중이다. 수사팀이 이 과정에서 의미있는 진술을 받아낸다 해도 '주범이 없는 마당에 방조범을 수사하는 게 법리적으로 맞느냐'라는 지적을 반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방조 혐의를 보강해 압수수색영장을 재차 신청해도 법원 판단이 달라질 가능성이 작은 이유다. 

법원이 같은 판단을 내린다면 경찰은 '부실수사' 비판을 피하기 쉽지 않다. 경찰이 변사사건에서 공소권 없음 처분이 예견된 고소사건을 떼어내 수사를 계획한 것 자체가 패착이다. 변사사건에서 사인과 직결된 '자살 배경'을 함께 조사했다면 검찰이 행정처로부터 받아낸 협조를 경찰 역시 서울시로부터 받아낼 수 있었다. 경찰에 협조할 수밖에 없는 분위기에 몰린 서울시가 과연 '사인과 연관 있는 성범죄 배경을 조사할 테니 휴대전화를 제출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할 수 있었을까. 경찰이 영장 집행과 다르게 임의제출에선 참여권 보장이 필요없다는 법리만 사전에 연구했어도 가능한 일이었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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