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76) ‘김대중 폭풍’의 귀국… 총선 판도를 뒤흔들다
청와대-백악관 X파일(76) ‘김대중 폭풍’의 귀국… 총선 판도를 뒤흔들다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20-08-17 06:37:56
  • 최종수정 2020.08.1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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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신한민주당이 발기인대회에 이어 공식 창당한 것은 1985년 1월 18일이었다.

전두환 정권이 예고한 2월 12일 총선을 한달도 못되는 기간동안 선거운동을 해야 하는, 그야말로 정상적인 사고로는 불가능한 일정이었다.

김대중은 국회의원 선거일 전에 돌아가려고 했다. 그의 귀국이 총선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많은 정치적 동지들이 그의 신변의 위험을 걱정하면서도 귀국 자체가 선거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전해 왔다. 그렇다면 선거 전에 조국의 땅을 밟아야 했다.

김대중은 2월 8일 귀국하기로 했다.

그의 귀국이 임박하자 세계 언론이 하루하루 날짜를 헤아렸다. 귀국 길에는 ‘인간 방패’를 자청하는 인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전 세계가 ‘김대중이 제2의 아키노’가 될지 모른다며 주시했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내정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책에 따라 김대중과 공식접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키노 사태를 우려한 미 국무부의 차관보급 인사는 그를 직접 만나 귀국 시기를 총선 이후로 연기하는 것이 한국 민주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한국 정부가 김대중 귀국 후 그를 다시 투옥해 17년의 잔여 형량을 복역시킨다면 미국 정부도, 한국 정부도 부담스런 일이 될 것으로 국무부는 판단했다.

마침, 한국 정부는 레이건 대통령에게 백악관 초청을 요청해놓고 있던 상황이었다.

미 국무부는 전두환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과 김대중 안전 귀국을 맞교환 하는 카드를 활용하기로 묘안을 짜냈다.

1985년 1월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왼쪽)은 대통령 전두환에게 등기우편을 보낸 데 이어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유병현 대사에게 귀국 의사를 밝혔다. 정동채(가운데) 비서실장 등이 수행하고 있다.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1985년 1월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왼쪽)은 대통령 전두환에게 등기우편을 보낸 데 이어 워싱턴의 주미 한국대사관을 방문해 유병현 대사에게 귀국 의사를 밝혔다. 정동채(가운데) 비서실장 등이 수행하고 있다. [김대중평화센터]

국무부는 전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 날짜를 확정하기 전에 김대중씨의 무사 귀국과 투옥시키지 않겠다는 보장을 얻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국무부의 훈령을 받은 리처드 워커 미 대사는 이원경 외무장관에게 전 대통령의 방미에 관한 합의에 도달하기 전에 김씨의 무사 귀국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갑작스런 미국의 요구에 청와대 참모들은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전두환은 “우리 외무부 관리들이 미국의 요구에 너무 쉽게 굴복한다”고 일갈했다. 하지만 판을 깰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녁 8시까지 퇴근도 하지 않고 기다리던 워커 대사와 폴 클리브랜드 부대사에게 이원경 장관이 전화를 걸어와 ‘한국 정부가 동의했다’고 전했다.

1098년 2월 2일 한미 양국 정부는 전두환 대통령가 4월에 미국을 방문한다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사흘 뒤인 2월 3일. 각국의 통신과 신문들은 김대중 씨가 신병 치료차 곧 귀국할 것이며, 투옥되지 않을 것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미 대사관과 한국 외교부는 “두 사안이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언론은 추측기사를 쏟아냈다.

미 대사관은 김대중 귀국에 대비한 준비작업에 나섰다. 워싱턴~캘리포니아~도쿄~나리타공항을 잇는 긴밀한 접촉을 통해 다음과 같은 합의 사항이 도출됐다.

첫째, 김대중씨와 그의 일행은 미 노스웨스트항공 191편으로 김포공항에 도착한다.

둘째, 갬씨와 부인 이희호 여사, 두명의 보좌관, 대표단 중 세명, 화이트 전 대사, 두명의 하원의원 등은 김씨의 자택으로 직행한다.

셋째, 20명이 넘는 나머지 대표단은 공항에서 간단한 입국 절차를 거친다.

1985년 2월 미국 정치인과 언론인들에 둘러싸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DJ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e영상역사관]
1985년 2월 미국 정치인과 언론인들에 둘러싸여 김포국제공항으로 귀국하는 DJ의 모습. [문화체육관광부 e영상역사관]

김대중 귀국작전은 007작전처럼 전개됐다.

뉴스위크는 커버스토리로 김대중의 귀국을 다루며 ‘폭풍의 귀국’이라고 명명했다.

김대중은 미 국무부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국에서의 민주화 계획을 마지막 강연으로 하고, 동행을 자처한 국무부 인권 담당 차관보와 전직 대사, 퇴역 해군 대장,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사장, 패리스 하비브 목사, 브루스 커밍스 교수 등 37명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 나리타를 경유해 이와나미 문고의 야스에 료스케, 와다 하루키 교수와 대담을 한 후 2월 8일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삼엄한 경비였다. 혹시나 모를 저격에 대응해 동행자들이 김대중 선생을 에워쌌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최악의 카드를 꺼내들지는 않았다.

첩첩이 쌓인 경계망 속에 동교동에 도착한 김대중은 다시 자택을 봉쇄당했다. 일체의 정치활동을 할 수 없었다.

우려는 했지만, 전두환 정권은 김대중의 외부 활동만 차단하면 정치적 영향이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귀국이 대한민국 정치사에 상상을 뛰어넘는 파장을 몰고 올 것이라는 것을 정권 내부에서 정확히 예측한 인사는 없었다. 

거대한 태풍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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