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진보주의자 이흥구의 숨겨진 보수성
[WIKI 프리즘] 진보주의자 이흥구의 숨겨진 보수성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0.09.02 18:58
  • 수정 2020.09.02 18: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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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풍경 속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
모두발언에서 "노동의 고단함, 몸으로 느꼈다"
과거논문에선 '노동권후퇴' 판결에 "중요판단"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가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 본격적인 질의를 받기 전에 선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가 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출석, 본격적인 질의를 받기 전에 선서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3살 때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어머님이 평생 근로자로 일하면서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 대학 시절 방학을 이용하여 어머니가 일하는 공장에서 일하고 (경기) 부평의 공장에서 잠시 일하기도 하면서, 노동의 고단함과 가치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를 상대로 인사청문회가 열린 2일 오전 10시 국회 제3회의장. 이 후보자는 미리 준비한 모두발언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수칙 '실내 50인 미만'이 적용된 텅 빈 회의장은 이제껏 대법관 후보자 청문회에서 듣기 어려웠던 '근로자'라는 단어가 마스크를 통과해 대신 자리를 채웠다. 한국 사법부에서 노동 사건은 공안 사건 만큼이나 법관의 이념 성향을 가르는 변수다. 

지난달 10일 김명수 대법원장은 권순일 대법관 후임으로 이 후보자를 문재인 대통령에 임명제청했다.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 군사독재에 저항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력 탓에 언론은 이때를 전후로 그를 '국보법 위반 1호 판사'로 이름 지었다. 이날 청문회에서 이 후보자는 본인을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고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어 집행유예 판결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간 법관 출신 대법관 후보자가 민주화운동 시기 고시 공부로 도서관에 머문 것과 달리 최루탄이 터지는 교정을 지킨 진정한 진보주의자의 등장이었다. 

◇ 당신은 진보주의자가 맞습니까
누구도 이날 대법관 후보자석에 앉은 50대 남성 사상이 진보가 아니라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상황에서 비교섭단체 몫 청문위원 배진교 의원이 이 후보자를 의심했다. 배 의원은 원내 정당 중 가장 진보로 분류되는 정의당 소속이다. 

2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에게 지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통상임금 판결을 평석한 연구논문과 관련 질의하는 배정교 정의당 의원. [사진=국회TV 갈무리]
2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에게 지난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통상임금 판결을 이듬해 평석한 연구논문을 묻는 배진교(왼쪽) 정의당 의원. [사진=국회방송 생중계 화면 갈무리]

"후보자님, 노동 분야 입장을 확인하는 질의를 드리려고 합니다. 모두발언에서 청년 시절 노동의 고단함과 가치를 몸으로 느끼셨다고 했는데 그 가치가 대법관으로서 잘 반영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질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후보자님 근로기준법은 강행규정이지요"(배진교)

"네! 그렇습니다"(이흥구)

이 후보자 답은 머뭇거림이 없었다. 근로기준법 강행규정에 따라 근로조건을 위반한 노사협약은 무효다. 강행규정을 둔 이유를 묻는 배 의원 말에 이 후보자는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답변했다. 이 후보자는 지난달 20일 선고가 내려진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정하지 않은 기아자동차 노사협약은 무효'라는 대법원 판결을 인용하며 "그런데 이 판결과 다르게,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통상임금 사건에 처음으로 신의성실원칙(신의칙)을 적용하여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판결은 2018년 법원행정처 자체 조사 결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국정운영 협력사례'로 자평한 사례로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대법관 다수의견은 강행규정상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노사협약은 무효지만 '계약은 신뢰 속에 지켜져야 한다'는 민법이론 신의칙을 노동 사건에 적용하는 예외를 만들었다. 반대의견 대법관들이 "다수의견의 논리는 너무 낯선 것이어서 당혹감마저 든다"고 지적했던 그 판결이다. 배 의원이 이 판례를 문제 삼은 배경엔 이 후보자가 판결 이듬해인 2014년 4월 발표한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해당 여부와 신의칙'이란 제목의 연구논문(판례평석)이 있다(2020년 8월 24일 본지 보도 '[단독] 이흥구 대법관 후보자, 사법농단 판결에 "중요한 판단기준 제시"' 참조).

당시 창원지법 마산지원장이던 이 후보자는 평석에서 "현재 계속 중인 160여 건의 소송과 이후 제기될 통상임금 관련 소송의 중요한 판단기준을 제시하였고 이로써 기존에 논란이 된 쟁점들을 상당 부분 해소하였다"며 2013년 통상임금 대법원 판결 의의를 평가했다. 헌법 제32조에 따라 근로조건을 정하는 법률상 강행규정이 무력화됐는데, 진보주의자로 알려진 그가 노동권을 좁게 해석한 판결을 하나의 지침으로 본 것이다. 

이같은 평석이 2013년 통상임금 대법원 판결과 결론을 같이한 것이냐는 배 의원 질문에 이 후보자는 "(해당 판결을) 세세하게까지 기억하지 못하지만"이라면서도 "(평석은) 의의가 뭐냐는 걸 적어놓았던 것 같다"고 했다. 이어 "그동안 하급심에서 통상임금의 인정 여부나 강행규정성에 여러 가지 하급심에서 엇갈린 결론이 있었는데, 그런 사건에 (해당 판결이) 어느 정도 결과를 낸 게 아니냐, 이런 뜻으로 적어놓은 것"이라 해명했다. 

이 후보자 말은 평석에서 "중요한 기준을 제시했다"고 표현한 대상은 사법농단 의혹에서 문제가 된 쟁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3년 대법원 판결은 ①정기상여금은 통상임금인지 ②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은 노사협약은 근로기준법상 강행규정에 위반돼 무효인지 먼저 판단하고 ③정기상여금이 포함된 통상임금을 근로자가 청구할 수 있는지 결론 냈다. 대법원 다수의견 결론은 '①②인정 ③부정'이다. 이중 2015년 7월 법원행정처 산하 기획조정실이 박근혜 정부에 협력했다고 표현한 건 '③부정'이다. 신의칙을 적용해 뒷말을 낳은 결과는 '③부정'인데, 이 후보자 본인이 논문에서 다룬 건 '①②인정'에 한정되니 문제 소지가 없다는 기술적 답변인 것이다. 

당시 대법원 다수의견은 ①②를 인정하면서도 그 결과인 ③을 부정하는 모순적 판결이었다. 근로기준법의 강행규정 성격을 인정하면서도 강행규정 효과는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후보자가 평석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 게 '③부정'이라면 적어도 노동권을 보장해왔다는 평가는 틀린 말이 된다. 김 대법원장은 단지 이 후보자가 노동 사건인 2013년 대법원 판결을 평석했다는 이유만으로 "근로자 등 소수자의 권리 보호에 앞장서 왔음"이라는 제청이유를 밝힌 터였다. 

이날 청문회에서 자신이 평석에서 평가한 대상이 '①② 인정'에 불과하다는 이 후보자 해명은 사실이 아니다. 그는 평석에서 2013년 대법원 판결을 두고 "추가법정수당 청구가 신의칙에 위반될 수 있는 요건을 처음으로 밝힘"이라고 적었다. 이 표현은 2013년 대법원 판결을 요약하는 본론에서 나온 게 아닌 이 후보자 주관적 평가가 담긴 결론에 있는 문장이다. 애초 2013년 대법원 판결 이전에 하급심에서 쟁점이 됐던 건 ①② 뿐이다. 대법원이 난데없이 ③을 추가 쟁점으로 제시한 모양새여서 '엇갈린 하급심 판결에 대법원이 지침을 줬다'는 평석은 존재할 수 없다.

이 후보자는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한 본지가 '통상임금 사건 진짜 입장은 무엇인가' 묻자 지난달 24일 "대법원에서 대법관으로 일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후보자가, 대법원에서 심리 중인 사건에 관하여 입장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음"이라는 입장을 보내왔다. 대법관이 된다면 판결로 말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 후보자가 대법관으로서 통상임금 사건을 맡게 된다면 그 결론은 무엇일까. 지금도 대법원에는 많은 통상임금 사건이 계류 중이다. 김 대법원장이 임기를 시작한 이후 대법원은 통상임금 사건에서 판례 변경 없이 강행규정 효력을 최대한 인정해왔다. 신의칙을 적용해 강행규정 효력을 부정하는 예외 사유 '기업에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 발생'을 깐깐하게 보는 식이다. 이 후보자가 향후 강행규정 효력을 인정한다 해도 소신이 아닌 신(新) 대법원 지침을 기계적으로 따른 것이란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는 이유다. 대법관 지명을 계기로 반쯤 모습을 드러낸 진보주의자 이흥구의 숨겨진 보수성은 이날 청문회가 6시간가량 진행 끝에 끝나면서 다시 논문 속으로 자취를 감추게 돼버렸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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