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인사이드] 미국 우파 시민운동의 역사(하)... 민권투쟁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WIKI 인사이드] 미국 우파 시민운동의 역사(하)... 민권투쟁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 최석진 기자
  • 승인 2020.09.12 06:46
  • 수정 2020.09.13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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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통합은 공산주의다’와 ‘적그리스도의 인종 통합 행진을 중단하라’는 팻말을 들고 리틀락 주의회 의사당에 몰려든 시위대. 1959년에 벌어진 이 시위는 리틀락 고등학교들의 인종 통합 교육에 반대하기 위해 열렸다.(출처=John T. Bledsoe/Library of Congress)
-‘인종 통합은 공산주의다’와 ‘적그리스도의 인종 통합 행진을 중단하라’는 팻말을 들고 리틀락 주의회 의사당에 몰려든 시위대. 1959년에 벌어진 이 시위는 리틀락 고등학교들의 인종 통합 교육에 반대하기 위해 열렸다.(출처=John T. Bledsoe/Library of Congress)

백인 시위대들이 6살짜리 흑인 아이를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다

리틀락 사건은 아주 특별난 경우가 아니었다. 남부 전역에 걸쳐 ‘백인 시민위원회’가 결성돼 6만 명 이상이 가입해서 공립학교의 흑백 통합 교육에 대대적으로 저항하고 나섰다. 그들은 흑인 학생들이나 민권운동가들을 위협했을 뿐 아니라 대놓고 인종 폭력을 선동했다.

앨라배마에서 벌어진 한 ‘백인 시민위원회’ 집회에서는 ‘인간사에서 흑인종들을 말살하는 일이 필요한 경우에는 적당한 방법이 동원되어야한다. 총이나 활, 새총, 그리고 칼 등이 사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 인쇄된 전단지가 뿌려지기도 했다.

보통 흑인 고등학생들이 괴롭힘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일부 분리주의자들은 훨씬 어린 학생들에게도 위협을 가했다. 1960년 흑인 학생 루비 부리지스가 온통 백인뿐인 초등학교에 최초로 등교하자 화가 난 백인들이 몰려들었다.

6살짜리 소녀에 대한 위협이 얼마나 드셌던지 그녀가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기 위해서는 연방 보안관들의 에스코트가 필요했을 정도였다. 시위대의 일부는 루비에게 직접적인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들은 “걔를 독살하겠다. 그녀의 목을 매달겠다.”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또, 어떤 백인 여성은 흑인 인형이 든 작은 관을 들고 와서 루비를 놀리기도 했다.

백인 부모들의 요구에 굴복한 교장은 루비를 흑인 아동을 교육하는 데 동의한 유일한 교사의 손에 맡겼다. 루비는 점심을 혼자 먹었으며, 휴식시간에도 홀로 놀았다.

이 아동을 괴롭히는 것으로도 모자라 백인 분리주의자들은 그녀 가족을 위협하기도 했다. 루비의 아버지는 직장에서 해고되었고, 조부모는 농장에서 쫓겨났으며, 식품점들은 루비의 엄마에게는 식품을 팔지 않았다.

반민권운동은 흑백 통합교육이 아예 실시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였지만, 만일 학교들에서 통합교육이 실시되는 경우에는 이 과정을 가능한 방해하고자 했다.

1960년 보안관들이 시위대로부터 루비 부리지스를 보호하기 위해 에스코트하고 있는 모습. 시위대 중 일부는 루비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사진출처=미국 법무부)
1960년 보안관들이 시위대로부터 루비 부리지스를 보호하기 위해 에스코트하고 있는 모습. 시위대 중 일부는 루비를 죽이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사진출처=미국 법무부)

민권운동가들을 공격한 우파 반대자들

구타, 린치, 폭탄 투척은 반민권운동가들이 사용하는 가장 악랄한 도구였다. 이 중 가장 끔찍한 사건은 ‘프리덤 섬머 머더스(Freedom Summer Murders)’일 것이다.

1964년 미시시피의 한 보안관 대리는 앤드류 굿맨, 제임스 채니, 마이클 슈버너, 이렇게 3명의 민권운동가들을 체포했다. 이들 3명은 애초에는 흑인 선거인 명부를 등록하기 위해 미시시피를 찾았었다. 하지만 그들은 더 나아가 이 지역에서 발생한 교회 방화 사건도 조사하고자했다.

그러나 그들이 조사활동에 돌입하는 순간이 그들의 체포 순간이 되어버렸다. 보안관 대리는 처음에는 그들을 풀어 줄 것처럼 행동했다가 그들을 다시 체포한 후 KKK단에 넘겨줬다. KKK단 멤버들은 이들 3명의 민권운동가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 살인범들은 재판에 넘겨지기는 했지만 범인들을 동정하던 배심원단이 무죄를 선언해버렸다.

결국 연방 정부가 살인범들을 기소하고, 유죄 판정까지 받았지만, 2~10년까지의 비교적 가벼운 선고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남부에서 민권운동가들이 불안을 느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지만 이 말이 북부는 안전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사실, 일부 민권운동가들은 북부 도시들에서 보다 더 불안을 느꼈다.

1966년 8월 5일,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시카고의 백인 전용 지역에서 시위행진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자 이에 대항해서 반민권운동가들이 시위대에게 병과 벽돌들을 던졌다. 이 중 벽돌 한 개가 킹 목사의 머리 오른쪽 부분에 맞았다.

“저는 남부에서 많은 시위를 목격했지만 오늘 여기처럼 이렇게 증오에 가득 찬 공격을 맞닥뜨린 적이 없었습니다.”

킹 목사는 시카고 행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민권운동가들은 폭력에 굴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상대방의 증오를 자신들의 운동을 증폭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1965년 3월 7일, 민권운동가들은 앨라배마 주의 셀마에 있는 에드먼드 피터스 다리 위에서 주 경찰, 카운티 보안관, 그리고 백인 시위대들과 마주쳤다. 백인 시위대들은 남부연합 깃발들을 들고 있었다.

그리고 잔인한 폭력이 이어졌다.

이때 다행히도 방송사의 카메라가 강경한 진압 장면을 모두 찍을 수 있었다. 셀마의 행진이 있기 몇 일 전 킹 목사는 <라이프>지 카메라 기자에게 시위대를 도와주고 싶다면 당국의 진압이 시작될 때 카메라를 반드시 켜라고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당신들이 사진을 올바로 싣지 않기 때문에 세상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는 이렇게 꾸짖었었다.

셀마 행진이 끝난 후 거의 5000만 명의 미국인들이 텔레비전을 통해 ‘블러디 선데이’라고 명명된 잔혹한 진압 장면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 미국인들의 상당수는 민권운동가들의 행동을 탐탐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1961년 실시된 갤럽 여론조사에는 61%의 미국인들이 ‘자유 민권운동(Freedom Riders)’을 반대하고, 22%만이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 이 여론조사는 57%의 미국인들은 흑인들이 점심시간 식당에 앉아 시위를 벌이는 일이 흑백 통합의 목표에 위배된다고 믿었으며, 28%만이 이 방법에 찬성한 것을 보여주었다.

백인 대중 사이에서도 민권운동가들에 대한 거부감은 폭넓게 퍼져있었다. 1966년의 여론조사는 63%의 미국인들이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968년 킹 목사가 암살되었을 때 남부 백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소년들 중 73%가 킹 목사의 죽음에 ‘기뻐하거나 무관심’한 것으로 나타났다.

시위대가 1966년 시카고 행진 도중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공격하는 모습(사진=Bettmann/Contributor)
시위대가 1966년 시카고 행진 도중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를 공격하는 모습(사진=Bettmann/Contributor)

민권운동 탄압에 공권력을 사용한 당국

1955년의 <몽고메리 어드버타이저> 지의 한 사설은 ‘백인의 경제력은 막강하며, 잘 준비되어있고, 훌륭한 리더가 이끌고 있다. 다음으로, 백인은 모든 정부 기관을 장악하고 있다. 백인들은 힘닿는 데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현실 아닌가?’라고 쓰고 있다.

법률 시스템도 이 같은 ‘백인에 의한 통치’를 뒷받침하는 데 이바지했다. 흑인에 대한 폭력을 경찰이 눈 감는 경우가 많았으며, 배심원들은 언제나 흑인 대상 범죄의 백인 피고인들에게는 관용적이었다. 그리고 민권운동 시위대는 항상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정치인들도 백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민권운동을 방해하는 집회에 앞장섰다.

“인종 정체성을 수호하는 투쟁은 우리 전체 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있습니다.”

1955년 미시시피 주의 상원의원 제임스 이스트랜드는 이렇게 외쳤다.

앨라배마의 조지 월리스 주지사는 1963년 민권운동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그는 취임연설을 통해 “오늘도 (흑백) 분리, 내일도 분리, 영원히 분리”라고 약속했다.

1968년 월리스가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 그는 패하기는 했지만, 앨라배마, 아칸소, 조지아, 루이지애나, 그리고 미시시피 같은 남부의 일부 주들에서는 승리했다. 그는 또 오하이오, 미시건, 인디애나 같은 일부 북부 주들에서는 10%의 득표율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최종적으로 46개의 선거인단 수를 획득했었다.

1960년대 후반 정치인들은 민권운동 시위가 법보다 우선일 수 없다며 ‘법과 질서’를 강조하는 속 보이는 술수를 부렸다. 분리주의자들은 시민 불복종이나 통합 운동 때문에 범죄가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1968년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암살된 직후 네브래스카의 한 신문은, 킹 목사가 ‘폭력과 파괴’ 그리고 ‘폭동과 혼란’을 야기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영예롭게 기억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한 편지를 실었다.

‘블랙 팬서(Black Panthers)’만을 목표로 제정된 캘리포니아의 총기 규제 조치

1967년 30명의 ‘블랙 팬서(Black Panthers)’ 단원들이 캘리포니아 주의회 의사당 계단에 섰다. 그들의 손에는 357 매그넘 권총과 12구경 샷건, 45구경 피스톨들이 들려있었다.

“흑인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장할 시기가 도래했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흑표범단원들이라는 뜻의 ‘블랙 팬서’들은 미국의 극좌 흑인 과격파들의 단체를 일컬었다.

이 같은 흑인들의 총기 휴대 운동에 대응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당국은, 전미 총기협의의 지지를 업고, 몇 가지 엄격한 총기 규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1960년대 ‘블랙 팬서’ 단원들은 흑인 공동체에 가해지는 폭력에 저항하고, 흑인들의 굴종 상태에 대한 자신들의 천명(闡明)을 강조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총기를 휴대하기 시작했다.

오클랜드의 ‘불랙 팬서’들은 경찰차를 따라다니면서 경찰에 검문을 받는 흑인들에게 무료로 법률 자문을 해주기도 했다.

‘블랙 팬서’의 존재가 이미 논란이 되고 있는 상태에서 길거리에 나타난 무장한 흑인들의 모습은 캘리포니아 정치인들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정치인들 중에는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도 끼어있었다.

1967년 캘리포니아 주의회는 ‘멀포드 법안(Mulford Act)’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주의사당에 장전된 무기를 반입할 수 없다는 내용과 함께 장전된 무기를 공개적으로 들고 다닐 수 없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법은 누가 봐도 ‘블랙 팬서’를 대상으로 하는 법률이었다.

“미국인들이라면 누구나, 특히 흑인들은 더욱 더, 흑인들을 비무장시킴으로써 무력화하려는 캘리포니아 인종주의 의원들의 의도를 똑똑히 파악해야한다.”

‘블랙 팬서’의 공동 설립자 바비 실을 이렇게 선언했다.

19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KKK단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기 위해 몰려든 모습(사진Warren K. Leffler/Library of Congress)
19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KKK단이 배리 골드워터를 지지하기 위해 몰려든 모습(사진Warren K. Leffler/Library of Congress)

보스턴의 스쿨버스 버싱(busing) 정책과 백인 중산층의 교외 탈출(White Flight)

1960년대가 저물어가는대도 반민권운동은 식을 줄을 모르고, 미국 전역에서 꿈틀거렸으며, 보스턴 같은 북부의 도시들에서는 일부 놀라운 사건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4년 9월 9일,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보스턴 당국의 흑백 통합 교육안에 반발해서 시위를 벌였다. 그 해는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의 판결’ 이후 20년이 지나 비로서 법원의 명령에 따라 학교에서 흑백을 통합해 교육하려는 의도로 추진되는 ‘스쿨 버싱(busing)’이 실시되기로 되어있었다. ‘브라운 대 교육위원회의 판결’은 1954년 연방 대법원이 공립학교에서의 흑백 분리 교육이 부당하다고 내린 결정을 말한다. 또 ‘스쿨 버싱’이란 학교 내의 인종 구성 비율에 균형을 맞추기 위해 아동을 거주지 밖의 학교로 보내는 정책을 말한다.

백인 시의회 의원들은 ‘빼앗긴 권리 복원(ROAR)’이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버싱 정책에 대항했다. 보스턴의 노란 색 스쿨버스들에서 학생들이 내릴 때 일부 백인들은 아동들을 향해 돌과 병들을 던졌다. 학교 인근의 성난 백인 시위대를 통제하기 위해서 중무장한 경찰이 동원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의 통합 교육에 반대하던 시위대와 달리 보스턴 백인 시위대의 구호에는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버싱 정책을 반대하고 ‘동네 학교(neighborhood schools)’를 지지한다고 주장했다. 백인 전용 학교와 ‘동네 학교’를 지지하는 한편으로 명백한 인종주의자 냄새를 피하기 위해 보스턴의 백인들은 자신들이 좌파 판사들의 희생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민권운동가 줄리안 본드가 지적한대로 “버싱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노란색 스쿨버스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탄 어린 흑인 학생들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버싱 정책을 반대하는 시위에서 발생한 명백한 고의적 공격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장면은 카메라에 생생하게 찍혔다.

1976년 4월 5일, 테드 랜즈마크라는 흑인 변호사가 개인적인 볼 일이 있어 보스턴 시청으로 향하던 길에 군중들에게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는 일이 발생했다. 랜즈마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백인들로 가득 찬 버싱 반대 시위대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자신의 실수를 깨닫기도 전에 그는 백인 시위대에 포위되었다.

첫 번째 공격은 뒤에서 날아와 랜즈마크의 안경을 깨뜨리고 코를 부러뜨렸다. 그리고 곧바로 다른 사람이 미국 국기가 달린 깃대의 날카로운 끝으로 그를 찔렀다.

랜즈마크는 나중에 모든 일은 단 7초 만에 벌어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장면은 한 신문사 카메라 기자에게 잡혔다. 그 이후 이 순간은 ‘옛 영광의 오염(The Soiling Of Old Glory)’이라는 불명예를 달고 전해지게 되었다.

많은 백인 가정들은 통합 교육에 반발해서 학군을 아예 떠나버렸다. 1974년 보스턴 공립학교의 백인 학생 숫자는 전체 학생 86,000명의 반이 넘었지만, 2014년에는 공립학교에서 백인 학생들은 14%가 되지 않았다.

1976년 보스턴 매사추세츠에서 촬영된, ‘옛 영광의 오염(The Soiling Of Old Glory)’이라고 알려진 이 사진은 퓰리처상의 긴급뉴스 사진 부분을 수상하게 된다.(출처=Stanley Forman/Boston Herald American)
1976년 보스턴 매사추세츠에서 촬영된, ‘옛 영광의 오염(The Soiling Of Old Glory)’이라고 알려진 이 사진은 퓰리처상의 긴급뉴스 사진 부분을 수상하게 된다.(출처=Stanley Forman/Boston Herald American)

반민권운동의 유산

오늘날 반발이나 반동의 의미로 사용되는 ‘백래쉬(backlash)’라는 용어는 1963년 수백만의 미국 백인들이 민권운동에 대항해 벌인 폭력적인 반발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흑인들이 평등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백인들은 전국에 걸쳐 진보를 향한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이를 방해하고 되돌리기 위한 잔혹한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민권운동은 이 기간 동안 많은 획기적 성과를 거두었다. 1964년 공민권법(Civil Rights Act)이 통과되었고, 1965년에는 투표권리법(Voting Rights Act)이 제정되었다. 하지만 어떤 법률도 인종 불평등에 대한 완벽한 해법은 되지 못했다.

1960년대 텍사스 주는 ‘연방의 적들’에 대항에 전투를 벌인 군인들을 기리는 남부연합 기념비를 27개나 세움으로써 새로운 법률들에 거부의사를 표현했다. 또, 테네시 주도 1976년 이후 적어도 30개의 남부연합 기념비를 건립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후에도 반민권운동가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 시위를 적지 않게 벌였다. 그러나 이때의 운동들은 대체로 새로우면서도 명백하게 눈에 띄지 않는 전술을 채택하였다.

더 많은 흑인들이 유권자 대열에 참여하게 되자 투표자를 겁박하는 방안이 새로운 전술 중 하나로 떠올랐다. 1981년에 드러난 공화당 전국위원회에서 작성된 한 메모는 루이지애나의 유권자 명부에서 80,000명까지 제거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메모에는 ‘분명히 그럴 것 같은데, 만일 박빙 승부인 경우 이 전술을 실시하면 흑인표를 엄청나게 떨어뜨릴 수 있다’고 씌어있었다.

또 다른 전술은 운동에 사용되는 언어를 조정하는 방법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81년 레이건 대통령의 자문역을 역임했던 리 아트워터는 반민권운동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를 솔직히 시인한 적이 있다.

“1954년에는 ‘니거(nigger)’라고 대놓고 말했다면 1968년이 되어서는 그랬다가는 역풍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대놓고 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강제 버싱’이나 ‘주(州)들의 권리’ 등의 추상적 용어를 사용했다.”

반민권운동이 시대에 맞게 변모함에 따라 주민 분리 및 ‘동네 학교’ 운동이 공교육에서 흑백 학생들을 분리해내는 데 성과를 나타냈다. 북부와 서부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조차 흑인 5명 중 4명 이상이 분리된 지역에 살았다. 1998-1999년까지 전국에 걸쳐 학교들은 1972-1973 학기에 비해 흑백이 분리돼서 교육되는 비율이 더 높아졌다.

1968년 제정된 ‘공평주거권리법(Fair Housing Act)’이 실시된 지 50년도 더 지난 오늘날 미국의 상당수 지역들은 흑백이 분리된 채 존재한다. 가장 흑백 분리가 심한 지역에는 멤피스나 잭슨 같은 남부 도시들이 들어있지만 시카고나 디트로이트 같은 북부 도시들도 만만치 않은 순위를 보여주고 있다.

흑백 분리 외에도 수십 년 동안 지속되어온 문제는 다인종 간의 결혼에 대한 거부감에 있다. 대부분의 미국 백인들이 인종 간 결혼은 반대하지 않는다고 답한 것은 2000년대 초반부터였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퓨 리서치 센터가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1990년대까지만 해도 비흑인 인구 63%가 가족 중 누군가가 흑인과 결혼한다면 반대하겠다고 대답했다. 2017년이 되면 그 수치는 14%로 떨어지게 된다.

오늘날 미국인중 일부는 민권운동 투쟁의 역사는 끝났다고 생각한다. 2016년 실시한 조사에서는 38%의 백인들이 미국이 인종 평등을 성취하기 위해 할 만큼 했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미국 흑인들 중 8%만이 이에 동의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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