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81) 군사정권 아래 DJ- YS- JP의 엇갈린 행로와 주한미대사
청와대-백악관 X파일(81) 군사정권 아래 DJ- YS- JP의 엇갈린 행로와 주한미대사
  • 특별취재팀
  • 기사승인 2020-10-19 07:29:24
  • 최종수정 2020.10.19 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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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 백악관 x파일
청와대 백악관 x파일

군사정권 하에서 민주화세력을 직접 지원하기 곤란한 미 국무부는 주한 미대사관을 통해 간접적으로 민주인사들을 지원했다.

대사관의 정치․경제 담당 부서에 포진한 직원들은 야당과 정부 인사들을 수시로 만나 정보를 교환했다.

리처드 워커 주한미대사는 미국에서 교수로 재직할 때는 김영삼(YS)의 존재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러나 1981년 7월 대사로 취임해 한국에 온 후, YS가 경직된 군부 통치를 완화하고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는 위협적이면서도 존경받는 야당지도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청와대 측은 YS의 정치적 비중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려는 정책을 썼다. 물론 김대중(DJ)도 날조된 혐의를 뒤집어 쓰고 감옥에 있었다.

워커의 눈에 YS는 관록의 정치가 답게 정치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모습이었고, 청중을 감동시킬만큼 웅변술이 뛰어났지만 그렇다고 선동가는 아니었다. 그는 폭력 시위를 지지하지 않았고, 의회를 통한 반대 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두환 정권이 YS를 ‘블랙 리스트’에 올렸을 때도 그는 이 같은 원칙에 따라 항거했다. 어떠한 정부 전복행위에도 가담한 적이 없었지만, 그는 조작된 혐의를 썼던 것이다.

미대사관 측은 단식투쟁이라는 비폭력적인 방법을 통해 승리한다는 접근 방식을 택한 YS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실제 YS의 단식투쟁과 DJ의 귀국으로 야권은 제도적으로 당당히 제1야당에 올랐던 것이다.

한 행사에서 만난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연합뉴스]
한 행사에서 만난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연합뉴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 가운데 김종필(JP)은 다른 행로를 택했다.

1985년 2.12 총선에서 야권이 정치적으로 대선전하는 등 서울의 분위기는 크게 반전됐지만 김종필은 정계 복귀에 대한 판단을 뒤로 미룬 채 미국에서 계속 체류했다.

3월 6일 서울에서 딸 예리가 김종필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정국 흐름이 급변하는 서울의 상황을 전해줬다. 예리는 김종필에게 정치활동 규제가 풀렸다는 통보가 왔다고 전했다. 4년 4개월 만에 정치활동의 자유를 얻게 된 것이다.

김종필과 함께 마지막까지 묶여 있던 YS‧DJ를 포함한 13명도 모두 해금됐다. 그가 언제 귀국하는지가 큰 관심사로 떠올랐다. 기자가 찾아가 앞으로의 거취를 물었다.

김종필은 “때가 오면 하고 싶은 말과 해야 할 말을 하겠지만 지금은 그 때가 아니다”고 답했다. 서울에서 그의 친형들이 찾아와 귀국 시기를 물었지만 그는 “현재로서는 결정한 바가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 보겠습니다”고만 말했다.

김종필은 그러나 더 늦출 수 없다고 보고 이듬해인 1986년 2월 25일 옛 공화당 인사 300여 명의 환호 속에 귀국한다. 환영 인파의 박수에 화답하기 위해 김종필은 대합실 의자 위에 올라가 두 손을 번쩍 들고 답례 제스처를 했다.

그는 공항에서 곧장 국립묘지로 직행해 고 박정희 대통령 묘소부터 참배했다. 김종필은 훗날 “박 대통령이 타계한 후 7년 동안 전두환 정권의 방해로 제대로 된 추도식 한 번 열지 못했다. 송구하고 죄스러운 심정 뿐이었다. 나는 박 대통령의 무덤 앞에서 눈을 감고 서서 속으로 말씀드렸다”고 술회했다.

“이제 제 갈 길을 가겠습니다. 지난날에 못다 한 일을 이룩하려 합니다. 한 번 지켜봐 주시지요.”

‘군사정권’도 아닌 ‘선명 야당’도 아닌 ‘합리적 보수세력’

김종필은 김영삼, 김대중과 사뭇 다른 길로 ‘정치 2막’을 열어가기 시작했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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