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99) ‘북방정책’ 지지한 부시, 노태우-고르비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주선하다

2021-08-04     특별취재팀
청와대

1988년 2월 취임한 노태우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북방정책’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1969~1974년 재임기간 중 동독에 대한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펼친 빌리 브란트 독일 수상의 ‘동방정책’을 벤치마킹해 북한 및 공산권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전략에 몰두했다.

노 대통령이 취임했을 당시 서울에 동유럽 국가 대사관은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부시 대통령은 북방정책의 강력한 지지자였다. 부시는 노 대통령과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1990년 샌프란시스코 회담을 주선했고, 이는 1991년 러시아 정부가 한국을 인정하는 발판이 됐다.

1992년 부시는 그의 강력한 영향력으로 중국에 압력을 넣어 한국을 인정하게 했다.

북방정책에서는 한-미가 찰떡 호흡으로 공조했지만, 광주민주화운동(1980년 5월, 광주항쟁)의 책임 문제는 노태우 정권 내내 양국 정부- 한국민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과 갈등을 지속시켰다.  

한국민들 중 상당수는 광주항쟁의 참혹한 비극에 미국이 개입됐다고 생각했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은 내란음모 혐의로 김대중을 체호한 후 광주의 항의 시위를 참혹하게 짓밟았다. 그는 잔인하기로 이름난 특수부대들을 광주에 투입, 최소한 200여명을 살해했다. 전두환은 이 작전이 미국의 지원 하에 이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지

많은 한국인들은 그의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고 미국을 향한 적대감은 광주시민을 중심으로 한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었다.

미국대사관은 광주에 미국문화원을 두고 있었는데, 광주에서 이 문화원을 몰아내려는 시위대의 화염병 공격을 자주 받았다.

1990년 1월 제임스 릴리 대사는 광주를 방문했다. 그는 시민들로부터 ‘미국이 광주에서 저지른 일로 사과하러 온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고 ‘그동안 미국이 너무 오래 침묵을 지켰다는 것에 사과한다’고 대답했다.

현지 언론의 취재진들과 광주항쟁 피해자들과 가진 미팅에서 “광주 시내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도록 군대에게 명령을 한 사람이 누군가”라는 질문이 나왔다.

릴리 대사는 “나는 모른다. 그건 한국인들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다”고 응수했다.

시민측 대변인은 말했다.

“우리는 당신들이 하늘 위에서 지상의 신문까지도 읽을 수 있는 인공위성을 갖고 당시 군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당신들이 그 때 다 보고 있던 상황이니, 누가 발표 명령을 내렸는지 틀림없이 알고 있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릴리 대사는 “미국이 강력한 인공위성을 갖고 있는 것은 맞지만, 사람들의 마음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사람들이 해놓은 짓의 일부만을 파악할 뿐이다”고 말했다.

대사의 설명이 광주시민들의 분노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을 지지한 것에 대해서도 한국민들의 불신은 깊게 자리했다. 레이건 취임 후 백악관의 첫 손님은 전두환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민들은 레이건이 김대중의 목숨을 살려주는 조건으로 전두환의 방미 정상회담에 응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했다. 레이건 행정부는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한국 관리들과 상당히 긴 흥정 끝에 조건부로 박악관 방문을 허럭했다. 전두환이 김대중에 대한 사형선고를 철회한다는 조건이었다.

1980년 당시 존 위컴 장군의 ‘들쥐’ 발언도 미국을 괴롭혔다. 그는 당시 인터뷰에서 “한국인들은 가끔 레밍(들쥐) 같은 특성을 보여준다”고 발언했다. 레밍은 집단으로 이동해다니다가 많은 수가 한꺼번에 벼랑에서 뛰어내려 죽기도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 모욕적인 말은 발언한 지 10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 사회에서 깊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