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울려 퍼진 미투운동

2018-07-08     최석진 기자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해마다 열리는 ‘프린지 페스티벌(Edinburgh Fringe Festival)’은 오페라, 클래식 음악, 연극, 춤, 비주얼 아트 분야에서 활약하는 세계 각국의 예술가들이 모여 공연을 펼치는 세계 최대의 공연축제이다.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지만, 최근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미투운동이라는 주제도 드디어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뜨거운 이슈가 되고 있다.

시사주간 타임은 최신호에서 '미투운동이라는 다소 무겁고 어두울 수 있는 주제가 에든버러에서 코미디극을 통해 긍정적으로 되살아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의 어두운 극장에 관객들이 한 시간짜리 코미디 공연을 보기 위해 자세를 잡고 앉아있다. 연기자 한 사람이 마이크를 들고 수다스럽게 개그를 시작한다. 정치, 사랑, 어색한 순간 등의 여러 소재를 가지고 웃음을 유발하다가 마침내 성추행과 성폭력을 소재로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순간 관객들로 들어찬 객석에는 긴장감이 감돌며 손바닥에 땀이 배어든다. 해당자들의 친구와 가족들은 눈길을 돌린다. 하지만 연기자가 당대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소재를 가지고도 이리저리 상황을 재미있게 이끌어가자 이내 웃음이 찾아든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축제인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무대에서 ‘관계와 동의(relationships and consent)’가 폭력적으로 왜곡되는 현상을 소재로 십여 건의 공연들이 이루어지면서 위에 거론한 장면은 이번 8월만 수백 번이 이루어졌다.

성적 학대라는 주제가 거의 매일같이 신문, 방송을 장식하고 기업과 정부의 회의실에 중요 의제로 오르는 해에 미투운동의 마지막 개척자는 어쩌면 코미디가 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소셜미디어와 같은 온라인 상에서 토론하기를 좋아하지요.”

L.A.에서 활동 중인 코미디언 나탈리 팔라미즈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이 문제를 얼굴을 맞대고 솔직하게 이야기 할 기회를 갖지 못했지요. 바로 그 부족한 부분을 이런 라이브 쇼가 메꿔주는 거지요.”

‘네이트’라는 코미디극에서 팔라미즈는 폭음을 즐기는 공격적인 남성의 또 다른 자아(alter ego)인 네이트를 연기한다. 그녀는 매직펜으로 가슴 털을 칠하고 콧수염을 붙이고 체크무늬의 서양 나무꾼 의복을 입고 남자처럼 완벽하게 분장을 했다. 네이트가 관객을 향해 여자들과의 문제를 털어놓고 자신의 음주 무용담을 늘어놓으면서 극은 ‘동의’의 문제로 비화하며 긴장감을 북돋는다. 극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면서 네이트는 관객들을 향해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의 한계를 분명히 할 것을 주문한다. 관객들이 그들의 선택을 소리 높여 외치도록 팔라미즈가 부추기는 것이다.

에든버러에서는, 헐리우드의 뒤풀이 파티를 다룬 ‘빈 의자(the Empty Chair)’와 작가가 권총 위협 하에서 성폭행 당하는 내용을 다룬 ‘드레스트(Dressed)’와 같은 미투운동을 정식으로 다룬 진지한 정극도 상연된다. 그러나 코미디는 일반적으로 금기시되는 주제를 둘러싼 긴장을 완화시켜주는 이점이 있다고 팔라미즈는 말한다.

“웃음은 그 안에 들어있는 혼란스러운 요소를 인정할 때 유발됩니다.” 팔라미즈는 말한다. 초반에는 지독한 마초이즘(남성성)의 표상처럼 인식되던 네이트가 사실은 페미니즘과 ‘동의’의 문제를 진심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만 자기 뜻대로 풀리지 않는 미워할 수 없는 바보임이 드러난다고 팔라미즈는 알려주었다.

“우리가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주제로 대화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욱 더 서로를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게 됩니다.”

‘희생자(Victim)’나 ‘컴플렉스(Complex)’같은 코미디를 상연해서 매진을 기록하는 영국의 코미디언 키리 프리차드-맥린에게 코미디라는 세계는 까다로운 대화를 하기 에 유일하게 적합한 장르이다.

“코미디의 황홀한 매력이 거기에 있어요. 보다 빠르고 보다 손쉬운 방법으로 해결점에 도달하게 되지요.”

프리차드-맥린의 경우, 이것은 그녀의 전남친에게 ‘가스등이 점화되듯’ 불이 당겨지는(gas-lit) 이야기를 의미한다.

‘가스등에 불이 당겨진다(gaslighting)’는 용어는 1938년 상연된 영국 연극 ‘가스등(Gas Light)’과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연한 1944년의 동명 영화 에서 유래되었다. 극 ‘가스등’에서 남편은 아내가 스스로 미쳤다고 믿도록 조종한다.

‘학대적 관계(abusive relationship)’는 코미디극을 대표하는 소재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프리차드-맥린은 민감한 주제에 과감하게 도전한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연기한 주제는 ‘아동 그루밍(아동을 대상으로 정신적으로 길들인 뒤 자행하는 성범죄)’이었고, 그녀는 또 연쇄살인마들을 다룬 ‘올킬라 노킬라(All Killa No Filla)’라는 팟케스트를 운영하고 있다. “당신은 희생자를 보고는 절대 웃지 않지요. 웃음은 무능한 경찰이나 무지막지한 살인자로부터 나옵니다.” 그녀는 말했다. “공격해야 할 힘 있는 자들은 무궁무진해요. 절대로 약자를 괴롭힐 필요 없어요.”

프리차드-맥린은 코미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를 ‘똑똑하고 시끄럽고 골치 아픈 여자’로 그림으로써 ‘완벽하게 순종적인 희생자’의 비유를 곱씹어보게 만든다고 덧붙인다.

“나라는 사람의 지금 모습 때문에, 그리고 제가 무대에 서는 코미디언이기 때문에 저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공연이 끝나면, 그녀가 분명한 목소리를 내줘서 고맙다는 감사를 전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로부터의 메시지가 그녀에게 쇄도한다.

그러나 프리차드-맥린은 미투운동이 지속적인 사회 변화를 꾀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지금까지 변화를 통틀어 말하자면 그래도 사람들이 일 년 정도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는 점이에요.” 그녀는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짜 나쁜 인간들이라고 알고 있는 자들이 여전히 권력을 쥐고 있지요. 크게 변화된 건 없어요.”

일리사 쿠퍼의 첫 출연작인 ‘사랑의 노래들(Love Songs)’은 그녀 자신의 성폭행 경험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녀도 다른 여자들처럼 미투운동에 참여하기를 망설였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 망가져버렸어요. 미투운동이 처음에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그저 고통스러운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2017년 후반에 그녀는 코미디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함으로써 세상에 소리칠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았다.

“내 친구들 대부분이 코미디극을 통해서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이 극본을 직접 씀으로 해서 나는 모든 상황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어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저 자신이고, 그래서 스스로에게 권능을 부여하도록 내용을 구성하기로 결심했지요.”

‘사랑의 노래들’은 쿠퍼 자신의 성 경험과 성폭행 경험을 코미디와 시낭송 스타일이 합쳐진 장르를 통해 그려낸다. 그녀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오래된 편지들을 낭송한다. 어떤 것들은 재미있지만 어떤 것들은 서글프다. 그리고 학창시절 아시아 여성들이 성적으로 순종적이며 성교육이 부족하다는 편견이나 고정관념이 그녀의 첫 성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관객들과 공유한다.

가볍게 전개되는 흐름과 일부 주제가 가져다주는 진지함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때문에 관객들은 불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쿠퍼는 “가장 훌륭한 극은 슬프면서도 재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한다. “웃음과 슬픔의 조화를 적절히 요리하면서 진행되는 코미디극, 관객을 뒤로 비틀거리게도 하면서 최고조의 기쁨과 슬픈 감정을 무엇보다 강하게 유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코미디극의 매력이지요.”

자신들의 코미디가 어두운 구석에서 웃음을 끌어내는 반면에 팔라미즈와 쿠퍼, 그리고 프리차드-맥린은 성폭력과 관련된 코미디는 단순한 재미 이상의 무엇이 있어야한다는 데에 모두 동의한다.

한나 갯츠비가, 넷플릭스를 통해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과 성폭력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다뤄 큰 성공을 거둔 ‘나네트(Nanette)’처럼 이들의 코미디극도 사람들을 다시 찾게 만들고 있다.

팔라미즈는 관객들을 향해 나쁜 행동에 저항할 것을 주문하는 한편 쿠퍼는 영국에 본부를 둔 성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법률 지원 자선모금 활동을 펼치고 있다. 프리차드-맥린은 자신의 코미디극으로 인해 관객들이 ‘아동 그루밍’이나 성폭력에 경각심을 갖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원봉사의 길에 자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저는 의도적으로라도 여러분들에게 해피엔딩을 선물하고 싶지 않아요.” 프리차드-맥린은 말한다.

“감동을 받았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뭔가 행동에 나서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