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박물기행] 길거리 음식에서 탄생한 국민 메뉴, 짜장면박물관

2018-12-12     장보배 여행 칼럼니스트

인천 박물 기행 짜장면박물관

짭쪼롬, 달달한 마성의 음식, 짜장면의 탄생기

 

 

# 당신에게 짜장면이란?

일단 냄새자체가 시그니처. 구수하면서도 달달하고, 짭쪼롬하면서도 군침 넘어가는 특유의 짙은 짜장면의 향. 이윽고 음식이 도착하면 면이 퍼지기 전에 부랴부랴 뜯어 비비기 신공을 시전 한다. 비비기 신공도 취향마다 다른데, 누군가는 포장된 랩을 벗기지 않고 그릇 통째로 흔들어서 비비고, 누군가는 젓가락을 톡 뜯어 양손으로 비비며, 누군가는 한 손으로 비비면서 고춧가루를 투하하기도 한다. 그렇게 각자의 취향을 반영한 비비기가 끝난 후 한 입 가득 베어물면 그야말로, 천국.

 

게다가 짜장면의 대체 불가능한 매력은, 짜장면이 선사하는 추억에 있다. 졸업식 때마다 아끼고 아꼈던 돈을 모아서 소중한 단체외식을 했던 이들은 짜장면이란 특별한 외식의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겠다. 또한 이사를 가는 날 아직 정돈되지 않은 부엌에서 신문지를 깔고 앉아 짜장면을 먹었던 이들이라면 짜장면은 새집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향수가 될 수 있겠다. 괜히 어머님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라는 노래가 나온 것이 아닌 것이다.

 

어느새 한국인의 입맛을 사로잡은, 한국인의 추억 속 한 자리에 자리 잡게 된, 익숙한 듯 독특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것. 짜장면. 그리고 인천시 중구에 위치한 짜장면 박물관에서는 대한민국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은 짜장면의 시작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 건물 자체가 문화제!

건축문화유산 건물에 자리 잡은, 짜장면 박물관

 

인천역에서 내려서 바로 보이는 휘황찬란한 패루로 들어와 안내판을 따라 조금만 걷다보면 곧 짜장면 박물관을 만날 수 있다. 짜장면 박물관은 1912년 중화민국수립을 기념하기 위해 명명된 등록문화재인 공화춘건물에 자리 잡고 있는 박물관이다. ‘공화춘이라는 말은 짜장면 마니아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브랜드일 텐데, 실제로는 우리나라에서 짜장면을 식당에서 처음 팔기 시작한 곳으로 알려진 역사적인 중화요리점 공화춘의 명칭을 뜻한다. 박물관 건물 자체가 문화재이며, 청관지역의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근대 건축문화유산(등록문화재 제 246)이다.

짜장면박물관은 총 6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었다. 1전시실은 화교와 짜장면의 탄생을 만나볼 수 있는 곳으로, 짜장면이 처음 탄생하게 된 당시의 이야기를 전한다. 2전시실은 1930년대의 공화춘의 모습을 재현해 놨다. 3전시실에서는 짜장면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의 풍경을 그려놓았고, 4전시실에서는 현대로 오면서 짜장면이 더 친숙해진 가장 큰 요인 '철가방'의 역사를 풀어놨다. 5전시실에서는 1970년대부터 현대까지의 짜장 라면의 모든 것을 모아놓았고, 6전시실에서는 1960년대 주방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하게도, 2층을 먼저 관람한 후 1층을 돌아보는 구조다. 친절한 안내자 분들의 설명을 따라 2층에 올라가서 처음 '짜장면'이 우리나라에 정착했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1883년 개항기, 조선의 부둣가에서 일했던

외국인 노동자 쿨리들을 위한 길거리 음식

 

'화교'란 외국 영토에 거주하는 중국인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한국의 화교는 1882, 임오군란 때 광동성 수사제독 오장경의 군대를 따라 온 상인 40여명이,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 체류하면서 교육을 한 것으로부터 출발한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곧 청국은 1883년 말부터 본격적인 영사 업무를 시작했고, 그 때부터는 많은 중국인들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1884년부터는 청국 옛 세관 뒤편에 집을 지었고, 주로 수출업에 종사하며 일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당시 조선에는 생소한 발음의, '쿨리'라는 말이 생기기 시작했다.

 

쿨리란, 1890년대를 전후하여 인천의 부둣가에서 활약하던 산동지방 출신의 노동자들을 일컫는 단어였다. 그들은 배에서 내리고 싣는 짐꾼과 인력거꾼으로 활동했다. 때문에 바쁘게 일하는 와중 식사를 해결하고자 별다른 재료 없이 그저 춘장에 수타면을 비벼서 즉석에서 바로 비벼서 먹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국에 첫 상륙한 '짜장면'이 됐다. 점점 쿨리들이 많아지자, 길거리에서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짜장면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때부터 본격적인 짜장면 보급이 시작됐다.

자료를 살펴보면 짜장면이란 처음부터 완전히 필요에 의해 들어온 음식인 것으로 보인다. 노동자들이 최대한 간편하고 빠르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절실했고, 바쁜 부둣가에서 엉덩이만 붙이면, 혹은 잠깐의 시간만 나면 바로 섭취할 수 있는 먹거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 먹거리는 필수적으로 쿨리들의 고향에서 온 맛이어야 했고 자연스럽게 장과 면만 있으면 되는 짜장면이 주 음식이 됐다.

 

지금과는 완전히 색달랐을 그 때의 짜장면. 돌돌돌 끌고 다니는 손수레에서 푹푹 퍼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것을 비벼 후루룩 먹었을 당시 고된 일상. 더욱이 그 짧은 찰나에서 느꼈을 고향의 맛. 아마 그 시절의 짜장면은 지금보다는 맛이 없을지 몰라도, 쿨리들에게는 간편하면서도 필수적인 식사가 아니었을까 싶다.

 

 

#필요는 문화가 되어 정착 되고

노동자의 필요로 인해 시작되었던 짜장면 장사는 곧 조선인들의 입맛마저 사로잡게 된다. 그리고 곧 '공화국 원년의 봄'을 맞는다는 의미의 '공화춘'이 문을 열게 된다. 공화춘은 1912년 문을 열었던 중국집으로, 식당에서 짜장면을 판매한 최초의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원래 건물은 지금 짜장면 박물관이 서 있는 짜장면 박물관건물의 동쪽 부분만 사용했었다. 하지만 곧 엄청난 인기와 함께 번창, 결국 1968년에는 서쪽 건물까지 매입하여 1983, 폐업할 때까지 영업했다고 한다.

 

그리고 제2전시실에는 공화춘에서 수습된 유물을 활용해서 공화춘의 접객실을 그대로 재현해 놨다. 너무 실감나서 금방이라도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의 음식과 익살스러운 얼굴의 사람 모형이 놓여져 있는 것, 더욱이 당시의 식당에서는 어떤 음식들이 올라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단무지가 주로 나오는 오늘날의 상차림과는 달리 의문의 대파가 놓여있는 것이 눈에 뛴다.

 

또한 우리나라와 중국의 같은 듯 하지만 다른 '젓가락'에 대한 이야기도 엿볼 수 있다. 공화춘 재현 식탁에서 올려 있듯, 중국은 주로 '나무젓가락'을 쓴다. 큰 상의 중앙에 놓인 음식조차 집을 수 있을 정도로 긴 형태의 젓가락을 쓰며 기름진 음식을 잡기 편하게 가장자리가 뭉툭, 하게 생긴 것을 사용하는 것. 반면 우리나라는 금속재질이고, 길이도 길지 않아 주로 채소를 잘 집을 수 있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옛 선조들의 지혜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그리고 곧장 벽돌로 된 문을 지나면 1970년대의 중국음식점을 재현해 둔 3전시실이 등장한다. 3전시실의 명칭은 짜장면의 전성기라고 불릴 정도로, 1970, 짜장면이 대국민의 음식으로 번창하게 된 시기를 담았다. 번창하게 된 이유도 만날 수 있었는데, 바로 사자표 춘장의 발명과 밀가루 원조 해결 정책때문이었다.

산동 출신 화교 왕송산은 달콤한 맛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식성을 파악했고, 춘장에 설탕을 가열하여 만든 끈끈한 갈색의 물질 캐러멜을 혼합해 한국인의 입맛을 단박에 사로잡는 사자표 춘장을 만들어내면서 본격적인 짜장면 매니아를 탄생시켰다.

더불어 당시 미국의 원조 곡물이었던 밀가루가 쌓여가자 국가에서는 '분식 장려운동'을 감행했다. 쌀 보다 밀가루를 더 먹으라는 밀가루 소비 촉진 운동이었다. 길거리 곳곳에는 '혼식분식으로 튼튼한 몸과 새 역사를 창조하자' '미곡소비 절약하여 혼분식 실천하자'라는 각종 포스터와 표어가 내붙었고, 그에 따라 밀가루를 사용하는 짜장면에게 날개가 달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을 사용하는 업종이란 업종은 죄다 이 시기의 흐름을 타게 되었는데, 제과업, 제빵업, 제면업이 같은 것들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짜장면은 이러한 발명과 시대적 흐름을 타고 불티나듯 생산되고, 팔리기 시작한다.

 

#철가방의 역사, 그리고 짜장면

짜장면이 '신속배달음식'이 된 것은 광복 후부터였다. 노동자들의 음식이 일상 속에 정착되었고 사람들의 선호도가 높아진 것이다. 때문에 배달을 위한 특수한 조치가 필요했고, 그것은 '철가방의 변화'를 탄생시켰다. 초기에는 나무로 된 가방을 사용했는데, 일단 나무 자체가 너무 무거울 뿐더러, 넘친 음식물들이 나무에 스며들어 심각한 위생문제가 대두되었다고 한다(상상된다!). 때문에 그 뒤 플라스틱 철가방의 비용문제를 거쳐 알루미늄 판과 함석판 같은 싼 재료로 만든 철가방이 등장하면서 오늘날의 '은빛 철가방'이 탄생됐다.

 

특히, 더욱 신기했던 것은 우리가 아는 '층층히 나뉘어진 철가방이 무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의 생활디자인에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한국디자인문화재단은 지난 반세기 한국인의 일상을 대표할 수 있는 생활 속 디자인을 선정했고, 그 중 철가방도 선정됐다. 무려 '포니자동차' '시발택시' 등과 철가방이 나란히 서게 된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것이, 가볍고 여닫기 쉬우면서도 쏟아지지 않으며, 음식물을 쉽게 닦아낼 수 있는 이만한 것이 없다. 아쉽게도 최초의 철가방 디자이너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문득, 최초의 천재적인 창시자에게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짜장면, 이제는 라면으로 승부한다!

일상속에 더욱 깊게 파고든 짜장 라면의 변천사

 

그리고 현대에 와서 이 짜장 열풍짜장 라면의 열풍으로 이어진다. 짜파게티부터 간짜장 등 다양한 짜장 라면들이 우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들게 된 것이다. 단기간에 쉽게 조리할 수 있으면서도 짜장면의 풍미를 그대로 살린 각종 짜장 라면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짜장면의 지표는 다시 한 번 바뀌기 시작한다.

천천히 전시된 짜장 라면들을 살펴보면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짜장면도 있지만, 사라진 브랜드들도 많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본다. 이렇게 많은 짜장 라면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수요가 있었다는 것을 뜻하나, 그만큼 사라진 브랜드들이 많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짜장의 맛이 따로 자리 잡혀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수요로 인해 들어왔던 하나의 바람이 현대까지 이어져 와 자리 잡고, 심지어 추억마자 탄생시켰다는 것이 참으로 신비로울 따름이다.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을 엿보며

칼질과 불질이 오가는 스웩의 세계!

 

그렇게 쭉 2층 전체를 관람을 하고 1층으로 들어오면, 1960년대 공화춘 주방의 모습을 재현한 공간을 만날 수 있다. 각종 야채들을 썰었던 칼판주방, 부뚜막 신을 섬기는 풍습, 장을 불맛 나게 볶아내는 화덕주방이 있다. 더욱이 중국 프라이팬은 밑이 둥글고 두꺼워서 불이 골고루 닿아 열을 고르게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둔 원리까지도, 자세히 설명되어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서빙하는 모형까지 다 보고 나니 어느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온다. 처음에는 짜장면의 별 것 있겠냐며 쉽게 들어오지만, 배가 심히 고파져서 나가게 되는 곳이 바로 이 짜장면박물관이 아닐지. 대한민국의 역사의 작은 부분에서 시작된 것이 전국적인 열풍으로 퍼져나갔고, 그 결과 대한민국의 정서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다시 한 번 짜장면이 얼마나 맛있는 음식인지 짐작하게 된다.

 

그리고 저절로,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짜장면 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짜장면 박물관 여행 꿀팁


- 들어가자마자 표를 뽑는 기계가 있다. 그 기계로 표를 끊고, 2층부터 관람하면 된다.
- 재현되어있는 모습들이 상당히 디테일하다. 그들이 사용하는 수저, 먹는 모양까지 잘 관람하다보면 당시의 짜장면이 어떻게 소비되어있는지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 1층에는 다양한 기획전이 개최되고 있다. 짜장면과 함께 전시도 관람하면 좋을 것!

[위키리크스 한국=장보배 여행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