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즘] 기업지배구조 투명성 논란과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

2019-05-22     전제형 기자
지난

최근 문재인 정부가 국민연금과 검찰을 동원해 대기업들의 지배구조 개선을 압박하고 있다.

또한 대기업 오너들의 구심점이 되고 있는 공익법인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개선하기 위한 관리 감독 체계를 강화하고 있다. 공익위원회를 설치해 공익법인과 관련된 업무를 통합하는 컨트롤 타워를 설치하고, 기업 공익법인을 대상으로 한 개별부처 관리감독 시스템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

특히 회계기준을 개편, 국내 주요 대기업 공익법인에서 자주 불거지는 사익 편취에 대한 우려를 해소하는데 초점을 맞춘다는 계획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한국은 재벌기업 중심으로 성장해왔으나, 경영 철학, 경영시스템이나 승계의 투명성, 사회적 도덕적 수준은 아직도 후진국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분석이 많다.

한국의 기업들과 기업인들이 지향해야 할 가치와 자세를 제시한 ‘북극성’ 같은 인물로 고 유일한 박사(1895-1971)를 꼽는 경영학자들이 많다.

그의 삶은 사리사욕을 버리고 오로지 국가와 사회를 위해 헌신한 애국적 기업인의 표상이었다.

경영인으로서 공익, 신용, 정직을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이 아닌 전문경영인을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것만 해도 한국 재계에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그 충격은 50여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눈 앞의 이익 보다 사회적 이익이 우선이다”

그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아이템이 있더라도 사회적 이익이 부합되지 않으면 과감히 뿌리치곤 했다.

유한양행 사장이던 일제강점기 당시 영업 담당을 맡고 있던 전항섭이 만주에서 헤로인, 모르핀, 아편이나 암페타민 계열의 마약류의 거래가 많은 것을 보고 유일한 박사에게 유한양행도 마약류를 판매할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국민들에게 해가 될 것이라며 단번에 거절했고, 전항섭은 그 즉시 해고당할 뻔 했다가 자기 발언에 대해 사죄한 뒤 간신히 영업 담당에 머물렀다.

또, 그는 세금을 철저히 납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유한양행에서 국세청에 세금 신고를 하는 직원이 날짜를 착각했다가 뒤늦게 신고를 하여 벌금을 피할 수가 없었던 일이 있었다. 그런데 매번 기한을 지키던 유한양행이 늦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국세청 직원이 기다려 줘서 세금 납부를 잘 마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유일한은 매번 제 날짜에 법인세를 신고해 왔다는 것을 기특하게 여겨 해당 직원에게 상여금까지 준 것으로 알려진다.

생전의

▶ "조국민들의 건강을 위해..." 전재산 처분 귀국

유일한 박사는 1895년 평양에서 자수성가한 상인 유기연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개신교 신자였던 유기연은 미국 감리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5년 당시 9살에 불과한 장남 유일한(어릴적 이름 유일형)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그가 장남을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민족을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일한은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 준 미국 돈(달러)을 잃어버렸다. 다행히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경을 읽고 기도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검소한 청교도적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했지만 태프트 자매의 헌신적인 지원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

1909년 그는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스팅스 소년병학교에 입학한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는 등 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자신의 힘으로 미시간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 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에 취직한다.

유일한은 1922년 사표를 낸 후 미국 내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숙주나물 사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자 유일한은 시내 대로변의 유명한 가게의 쇼윈도에 트럭을 들이받아 일부러 교통사고를 냈다. 트럭에 실린 숙주나물이 담긴 병들이 도로변에 죄다 쏟아져 깨졌는데, 이 사건이 숙주나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아 사업이 번창하게 된다.

이후 그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모았던 돈으로 숙주나물 병조림의 단점을 개선한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헸다.

이후 1925년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고 귀국을 결심했다.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해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진심으로 존중했다.

미국에서 쌓은 전 재산을 처분해 귀국한 그는 1926년 경성부 종로에서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일한은 당시 한국인들의 건강 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인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다.

일제

▶유일한의 경영철학 ‘정직과 신뢰’ ‘기업인은 애국자여야 한다’

그는 ‘정직’을 경영 철학으로 삼았다. 1928년 7월 9일에 유한양행 최초의 신문광고는 그의 철학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대부분의 제약회사들은 서로 비방하거나 효과를 명확히 밝히지 않고 '만병통치약' 등으로 얼버무렸다. 그러나 유일한은 제품의 이름과 용도를 밝히는 것은 물론, 의학 박사와 약제사의 이름을 실어 제품을 증명했다.

그는 기업인이자 독립운동가였다. 1930년대 후반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1942년 재미한인으로 이루어진 한인국방경비대(맹호군) 창설을 주도했다. 1945년에는 OSS의 냅코작전에 참가했다. 냅코작전에 참여한 공작원들은 OSS의 지휘 아래 강도높은 군사, 첩보훈련을 받았다. 이 당시 유일한의 나이 50세였다.

그는 자신의 회사 전체를 독립운동에 쏟아부으려 했다. 냅코작전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실제 작전이 실행되지는 않았다. 냅코작전의 전모와 유일한 등 공작원 명단은 유일한 사후 2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해방 직후인 1946년 7월 유일한은 미국에서 돌아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회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나라가 발전하려면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같은 소신에 따라 1952년 전쟁 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한 데에 이어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세웠다.

그는 ‘국가에 대한 납세’와 ‘정치적 상납’을 엄격히 분리했다.

1960년대 박정희 군부정권은 각 기업들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내놓으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유일한은 정치자금을 주는 것을 거절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박정희 대통령은 유한양행에 세무조사를 지시했고, 국세청으로부터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받았다. 하지만 당시 세무조사원이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안난다"라고 말할 정도로, 탈세 내역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나아가 굳이 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세금까지 자진해서 낸 것으로 밝혀졌다.

이 같은 내용을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 1968년 모범납세 법인으로 동탑산업훈장까지 수여하기에 이르렀다.

▶가족들은 경영에서 모두 손을 떼라!

1969년 노환으로 경영에서 은퇴한 유일한은 아들 유일선이 아닌 조권순 전무에게 경영권을 승계했다. 전문경영인 제도를 실시한 것은 한국에서 유한양행이 최초였다.

그는 일가 친척들을 모조리 유한양행에서 해고하고 주식도 처분해 유한양행 경영에 전혀 간섭하지 못하게 했다. 아들 유일선 부사장은 유한양행에서 일하다가 '경영 대물림' 방지 차원에서 해고됐다.

유일한이 회사를 전문경영인에게 넘겨준 이후 유한양행의 전문경영인 제도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문경영인 임명도 관례에 따라 모두 내부승진으로 행하고 있다. 역대 유한양행의 CEO들은 모두 경력이 유한양행 평사원부터 시작한 인물들이다. 현 이정희 대표이사도 1978년에 평사원으로 입사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유일선과 동생 유특한(유유제약 창업자)이 회사에서 퇴직한 후 유일한 박사를 상대로 한 소송을 건 적이 있었다.

소송의 내용은 '퇴직금 반환 소송'이었다. 본인들이 받은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판단해 회사에 전액을 반환하려고 소송을 건 것이었다. 이 때문에 이 소송을 맡은 판사가 "세상에 이런 집안이 있나?"라고 아연 실색했다는 후문이다.

그는 1971년 3월 11일, 1만6000㎡ 학교 부지와 손녀 학자금 1만달러를 남긴 채, 나머지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유 회장에게 마지막 남은 것은 낡은 구두 두 켤레와 양복 세 벌 뿐이었다.

[위키리크스한국=전제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