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백악관 X파일(63) 전세계에서 일기 시작한 ‘김대중 사형 선고’ 비판 여론… 분노한 전두환 정권

2019-12-10     특별취재팀
청와대

‘폭풍의 핵으로 떠오른 김대중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해야 한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본인의 노력으로 한-미간 김대중 문제를 어떻게든 매듭지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전두환이 김대중에 대한 사형 판결을 감형할 경우 관계 완화를 모색하라는 공식적인 서면 훈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국대사는 김경원 청와대 비서실장과 비공식 대화를 시작해 김대중 문제가 원만히 해결될 경우 양국 정부의 상호작용 방향을 모색했다. 그리고는 국제전화를 이용해 진행 사항을 홀브룩에게 알렸다.

김대중 문제를 둘러싸고 전두환과 벌였던 대결 과정과 어떻게 대단원의 막을 내렸는지를 논하기 전 김대중의 구명 노력을 복잡하게 만든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박정희의 암살과 전두환의 권력 장악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던 서유럽과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각국의 정부와 의회가 갑자기 김대중의 재판과 사형선고에 대해 과장된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강력하게 비판적인 자세를 보였다.

1980년

그런 태도는 한국 정부를 분노케 했지만 보복적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는 달랐다. 한국 정부는 일본의 비판을 비난했고 일본대사관 앞에서는 ‘자발적인’ 관제 시위가 수차례 있었다. 11월 하순에는 항의 시위가 통제를 벗어나 문제를 크게 복잡하게 만들지도 모른다고 우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글라이스틴 대사가 12월 6일 전두환을 만나 우려를 강력 전달하자 그도 같은 생각인 것 같았다.

일본에 대한 한국측의 차별적인 태도는 불공평한 것이었다. 사실상 일본의 정책은 미국과 대동소이해 양국은 유사한 이해관계를 놓고 잦은 업무협의를 가졌다.

서울에 주재하던 외교사절 중 일본의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대사만큼 사태에 정통한 인물도 없었고 박대통령의 암살에 뒤이은 혼란스런 사태의 매 전기마다 미국과 일본은 제각기 거의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5월 17일 김대중이 체포된 후 일본은 그의 석방을 모색했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이 사형선고를 받자 일본 정부 또한 전두환과 다각도로 신중한 접촉을 벌여 그의 감형을 요청했다. 더군다나 일본 정부는 그 기간 내내 한국 정부와 공개적으로 대결국면을 벌이라는 국내의 압력을 저지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과 한국인들이 ‘외국의 간섭’에 대한 분노를 유독 일본에 대해 분출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나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실시하고 제2차세계대전의 엄청난 부담을 지운 나라로부터 국내문제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을 듣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다른 하나는 김대중이 일본인들 사이에서 누리는 비교적 호의적인 인상 때문이었다.

그것은 그의 친근한 태도 뿐 아니라 그가 도쿄 체류 중 납치돼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일로 인해 일본이 갖게 된 심각한 당혹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일본의 신문과 논객들은 일본 사회당과 보조를 맞춰 김대중의 사형선고를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집권 자민당 내 일부 세력조차 자위 수단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 강경자세 채택을 요구하는 전열에 합류했다.

1980년 미국의 선거를 전후해 일본 정부는 몇 번이나 한국 정부에 대해 공개적인 비난의 포문을 열려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지만 스노베 대사의 건의와 한국 문제를 놓고 미국과의 공동 보조를 깨뜨리리 않으려는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총리의 생각 때문에 결국은 냉정을 유지했다.

양국 정부 간의 고위급 협의 과정은 시간이 걸리고 서울의 미대사관에게 또 다른 긴장 요인이었지만 일본의 민간 및 정부 조치가 가져온 효과는 미국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김대중의 구명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훗날 글라이스틴 대사는 술회했다.

[위키리크스한국= 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