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상고 신화 上] 은행권 고졸 채용 9년, 사다리 끊는 국책은행들

2020-11-18     최종원 기자

[편집자주] “나도 야간 상업고등학교 출신이다. 우리 사회가 독일 등 선진국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떤 일도 할 수 있도록 많은 일자리가 생겼으면 좋겠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11년 7월 20일 서울 중구에 위치한 IBK기업은행 본사를 방문해 특성화고 출신 신입 행원들과 만나 이같이 말했다. 은행권은 바로 다음날에 향후 3년간 신입 행원의 12%인 2700여명을 고졸 출신으로 뽑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현재 주경야독으로 대표되는 은행권 '상고(商高) 신화'는 상당 부분 사라지고 있다. 은행들이 고졸 채용 전형을 폐지하거나 채용 인원을 대거 줄이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국책은행들이 이명박 정부의 특성화고 활성화 정책 이후 고졸자를 많이 선발했지만 정권 변화와 채용시장 한파 여파로 전형을 없애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18일 은행별 채용공고에 따르면 한국산업은행, IBK기업은행, 한국수출입은행, 기술보증기금 등 국책은행을 중심으로 한 주요 금융기관들은 지난해 고졸 채용을 아예 하지 않거나 매우 적은 인원을 선발했다.

산업은행은 올해 상반기 신입행원 정규직으로 특성화고 출신 5명을 따로 채용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상반기 정규직 채용인원이 50명으로 감소하긴 했지만, 2013년 산업은행 고졸 채용인원이 55명이었던 것에 비하면 크게 줄어들었다. 

수출입은행은 올해 신입행원 모집에서 고졸 출신을 따로 뽑지 않았다. 2013년에는 정규직 79명 중 6명을 고졸로 채용했지만 2017년 이후 고졸자를 따로 선발하지 않았다.

IBK기업은행은 올해 고졸인재 채용을 3년 만에 재개했다. 하반기 신입행원 170명 가운데 고졸인재로 20명을 선발한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고졸인재가 설 수 있는 자리를 확대하기 위해 고졸인재 채용을 3년 만에 재개했다”고 밝혔다.

기업은행은 매년 주요 금융 공기업 중 가장 많은 인원을 정규직 신입으로 뽑고 있지만, 2017년 이후 고졸 채용을 따로 하지 않았다. 올해 채용을 재개했으나 선발 인원은 20명에 불과하다. 기업은행은 문재인 정부 출범 이전까지만 해도 매년 고졸 채용 규모를 70명선으로 유지해 왔다. 

한국은행은 올해 일반사무직(C3)으로 근무할 특성화고 졸업예정자 4명을 선발했다. 지원자격은 2021년 졸업예정자로서 전학년 평균 내신성적이 3.0등급 이내이며 학교장 추천을 받은자다. 지난 2014년에는 8명, 2017년에는 7명을 선발했지만 뽑는 인원이 줄어들었다,

기술보증기금이 올해 선발한 정규직 신입 인원 가운데 고졸 출신은 없었다. 비정규직 사무지원인력으로 고졸 출신을 3명 뽑았을 뿐이다. 기술보증기금은 2017년 이후 고졸 채용을 따로 진행하지 않았다.

고졸 채용은 이명박 정부 때 본격적으로 시작됐지만 박근혜 정부를 거쳐 지난해 문재인 정부로 정권이 교체된 이후 관심이 줄어들면서 채용 규모가 급감했다. 박근혜 정부 당시 공공기관 중에서는 고졸 채용공고를 내고 대졸자를 채용한 사례도 있었다.

블라인드 채용 모델 또한 영향을 주고 있다. 은행권에선 학력·나이·전공 등 스펙을 보지 않는 ‘블라인드 채용’ 방식에 따라 고졸자와 대졸자를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전형으로 선발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은행권이 공동으로 마련한 ‘은행권 채용 절차 모범규준’은 학력에 대한 차별을 전면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졸자 대상의 별도 전형이 없어지면 자연스럽게 고졸 채용이 줄어들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고졸자가 대졸자와 똑같이 경쟁하면 상대적으로 불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용문이 좁아지고 특성화고 학생이 줄고 있어 더 이상 은행권 상고 신화를 보기 힘들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특성화고의 경우 학령인구의 감소를 고려하더라도 전체 입학생 수 대비 특성화고 입학생 수, 전체 학교 수 대비 특성화고 학교 수 등이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성화고 취업률도 최근에 증가세를 보이다가 2018년 이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정부는 특성화고 졸업자를 대상으로 기업에 취업한 뒤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선취업 후진학을 내세웠지만 이마저도 신통치 않다. 진학 조건이 대부분 야간대학인데다 총 재직기간이 3년 이상이어야 대학 지원이 가능해 대부분의 대학에서 정원 미달 사태가 나고 있다. 주경야독으로 대표되는 상고 신화가 상당 부분 사라질 것이라는 설명이다.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 신일비즈니스고등학교(특성화고) 2학년 이모 군은 “금융권 취업을 희망했지만 문이 매우 좁아 대학 진학을 고민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위키리크스한국=최종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