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프리즘] 김선수 '대법관 13명 블랙리스트 판결' 찢다
[WIKI 프리즘] 김선수 '대법관 13명 블랙리스트 판결' 찢다
  • 윤여진 기자
  • 승인 2021.03.15 17:56
  • 수정 2021.03.1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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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 1부, 원세훈 판결서 '직권남용 공범도 피해자' 1년여 전과 다른 결론
상명하복 조직 '하급 공무원 보호' 위해선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
문체부 블랙리스트 판결 주도 2부 "수사 협조 공범→피해자 바꾸면 문제"
당장 '국정원 간부와 공모 朴 찍은 공무원 사찰' 우병우 재판 영향 불가피
'블랙리스트 판결은 영혼 없는 공직사회 면죄부' 비판에 자성적 판결한 듯

0, 12

지난해 8월 31일 서울고법 형사합의13부(구회근 이준영 최성보)가 판단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 유⋅무죄 개수다. 국정원장에게 주어진 '국내보안정보' 수집⋅작성⋅배포 권한을 남용해 이명박 정부 시절 야권 인사를 사찰했다는 혐의는 전부무죄였다. 1심이 일부유죄로 인정했던 권양숙 여사⋅박원순 전 서울시장 미행 혐의도 결론이 바뀌었다. 원 전 원장 등 지휘 간부들과 달리 사찰을 행동으로 옮긴 실무 직원들은 정보 수집권과 권한 집행에 필요한 절차상 의무가 없어 침해당하거나 방해받을 무엇이 없다는 취지였다. 검찰은 사찰을 지시한 국정원 지휘선을 직권남용 가해자로, 사찰을 지시받은 실무자를 피해자로 상정한 터였다. 다만 항소심 재판부는 국정원장 재직 기간 국고를 손실⋅횡령하고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뇌물로 공여했다는 혐의를 인정해 원 전 원장에게 징역 7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했다. 비록 중형이지만 원 전 원장에게 적용한 핵심 죄목은 국정원법상 직권남용이었다는 점에서 검찰로선 완패였다. 

김선수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김선수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 8, 4
지난 11일 대법원 1부(이기택 박정화 김선수 이흥구)는 항소심이 내놓은 숫자는 틀렸다고 결론 냈다. 직권남용 혐의 유죄 개수는 0→8, 무죄 개수는 12→4로 각각 정정하는 게 맞는다는 판단이다. 무죄밖에 없던 원 전 원장 직권남용 혐의는 6개월여 만에 유죄가 더 많아진 것이다. 대법원은 항소심 직권남용 판결 전부를 파기하고 사건을 서울고법에 돌려보냈다. 변화를 끌어낸 건 "직권남용의 공범도 직권남용의 상대방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검사 상고이유다. 검사 항소이유서에도 있던 이 주장이 담긴 상고이유서를 받아본 이 사건 주심 김선수(사진) 대법관은 1년여 전 기억을 소환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좌파 문화예술인 문화예술기금 지원배제(블랙리스트) 사건' 상고심에서 김선수 대법관이 속한 1부는 토론을 주도한 2부가 제시한 의문 '직권남용 공범은 직권남용 피해자가 될 수 있나'에 제대로 답하지 못했다. 당시 2부 대법관들은 '공범은 공범일 뿐 피해자가 못 된다'는 법리로 직권남용죄 요건을 엄격히 하자는 편에 섰다. 직권남용죄 결과인 '의무없는일'과 '권리행사방해' 증명을 어렵게 하자는 얘기다. 반면 직권남용죄 적용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우려한 1부 대법관들은 '직무상 권한을 특정할 때 헌법원리도 참조하자'는 의견을 냈다. 직권남용죄 원인인 '직권남용' 증명을 완화하는 방식이다. 직권남용죄 적용 경우의 수가 주는 만큼 늘리는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 대법 2부, 블랙리스트 판결을 주도하다
직권남용죄는 ①공무원이 ②직무권한을 남용해 ③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④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할 때 처벌하는 형벌 조항이다. 여기서 피해자는 직권남용 상대방인 '사람'이다. 사람은 직권남용죄에서 가장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구성요건이다. 때문에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지난해 1월 30일 직권남용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석 전 청와대 정무수석 사건 상고심 판결에서 법률해석으로 사람을 사인(私人)과 공인(公認)으로 나눴다. 공인은 '법률상 의무⋅권한이 있는 사람'으로 따로 정했다. 법률상 의무⋅권한이 없으면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직권남용죄 적용 지침은 이렇게 마련됐다. 그간 재판실무에서 ②가 입증되면 ③④는 자동 증명되는 것으로 봤는데, ③④를 별도 심리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제껏 검찰은 직권남용 공소사실을 구성할 때 피해자인 사람을 형식적으로 특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블랙리스트 사건이 대표적이다. 문예기금 지원배제 명단에 오른 '좌파 문화예술인'은 법률상 피해자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블랙리스트를 실무자로 관리한 문체부 산하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영화진흥위원회⋅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무직원이 피해자인 직권남용 상대방이 됐다. 이들은 범행을 같이한 공범인데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목표한 유죄 입증이라는 편의 때문에 피해자로 신분을 세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합 판결은 직권남용 상대방이 하급 공무원이라면 이 사람에게 법률상 권한과 의무가 있는지 따지라고 주문한 것인데, 앞으로 검찰로선 애를 써가며 굳이 사인이 아닌 공인을 피해자로 재판에 세울 이유가 없게 됐다. 

당시 전합 판결을 주도한 건 대법원 2부 재판관들이었다. 박상옥 안철상 노정희 대법관은 범죄자를 처벌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보다 자의적 기소를 막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가짜 피해자가 아닌 진짜 피해자로 공소사실을 구성하는 게 실체적 진실규명에도 맞는다는 뜻이다. 범행의 시작과 끝을 묶어 하나로 기소하지 않고 그 과정 일부를 떼어내 기소하면 검사는 수사 과정에서 상부의 부당한 지시를 따른 하급 공무원들에게 '공범으로 기소하지 않을 테니 자백하라'고 회유할 수 있다. 

반면 같은 소부 소속 김상환 대법관은 직권남용죄 입증요건을 어렵게 하면 진짜 범죄자들이 법망을 빠져나가게 된다고 생각했다. 결국 2부 대법관들은 의견일치를 보지 못했고 김명수 대법원장은 전합에 회부했다. 여기서 1부 박정화 김선수 대법관 3부 민유숙 대법관이 2부 김상환 대법관과 의견을 같이하면서 사안이 복잡해졌다. ②를 넓히되 ③④는 좁히는 어정쩡한 타협책이 도출된 배경이다. 다수의견은 공무원의 직무범위를 정할 때 법률이 아닌 헌법 역시 근거로 삼을 수 있다고 봤다. 헌법상 '문화국가의 원리'가 판결문에 등장한 이유다. 대신 원심이 유죄로 인정한 예술위⋅영진위⋅출판진흥원 사무직원들이 좌파 문화예술인 명단을 문체부에 보내거나 심의 상황을 보고한 행위는 "직접적인 법령상의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며 무죄 취지로 파기했다. 특히 명단 송부 행위는 블랙리스트 사건 이전에도 있었다는 점이 대법원 심리 과정에서 처음 드러났다. 관행이라면 처벌할 수 없다는 조건이 붙었다. 다수의견 12명엔 서로 반대 의견이던 안철상 노정희 대법관과 김상환 대법관이 함께 이름을 올렸다. 박상옥 대법관은 모순적인 결론에 동의하지 못하고 '파기' 결론만 같은 별개의견을 냈다. 

◇ 대법 1부, 직권남용 총량을 유지하다
다수의견 중 직권남용죄 성립 요건을 엄격히 해야 한다는 안철상 노정희 대법관은 보충의견을 작성해 쟁점을 분명히 했다. 이 사건 주심인 안철상 대법관은 "(공소사실 법리에 따르면) 과정의 행위를 한 사람은 최종행위에 대해서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공범이 될 수 있고 과정의 행위와 관련해서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상대방이 될 수 있다"며 "수사기관이 수사 협조 여부에 따라 자의적으로 관여자를 공범 또는 상대방으로 정하여 기소할 수 있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길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박상옥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박상옥 대법관. [출처=연합뉴스]

두 대법관 통찰은 검사장 출신 박상옥(사진) 대법관 수사 철학에서 연유한 것이다. 이들은 "대법관 박상옥의 별개의견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문화예술인 등에 대한 문예기금 등 지원배제라는 중대한 결과를 발생시킨 행위를 소추하지 않고 관련 기관의 직원들에 대한 명단 송부 등 지원배제 과정에서 이뤄진 행위를 소추하였다"고 적었다. 진짜 피해자를 공소사실에서 배제하는 문제점을 세 대법관이 공유한다는 얘기다. 박상옥 대법관은 별개의견에서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처벌 범위가 무한하게 확대될 수 있다"며 검찰의 자의적 기소로 인해 '형벌과 범죄는 법률로 규정돼야 한다'는 형사법 대원칙 죄형법정주의 침해를 우려했다. 박상옥 대법관 법리는 지난달 9일 대전지법 오세용 영장전담부당판사가 백운규 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구속영장을 기각하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했다. 원전 월성 1호기 즉시 가동중단에 필요한 경제성 평가를 조작했다는 직권남용 혐의에서 피해자는 한국수력원자력 이사회로 상정됐는데, 오 부장판사는 이들 역시 공범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로 영장을 기각했다. 박상옥 안청살 노정희 대법관 의견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직권남용 공범은 직권남용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대로 다수의견 중 직권남용죄 성립 요건을 엄격하게만 할 게 아니라는 재판관들도 김상환 재판관을 중심으로 별도 보충의견을 썼다. 박정화 민유숙 김선수 김상환 대법관은 "헌법 제7조를 생각한다"는 부제에서 "헌법 제7조 제1항은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공무원에게 자신의 공적 역할 및 기능을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로 귀결시켜야 할 헌법적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며 "이 사건 지원배제지시는 헌법 제7조가 정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규범을 일탈한 자의적 차별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헌법에서 공무원의 직무를 끌어내 형법상 직권남용을 구체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다만 이들은 '직권남용 공범은 직권남용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반박을 직접 펴지는 못했다. 

◇ '국정원 특수론' 왜 만들어졌나
이번 원 전 원장 상고심 판결에서 대법원 1부는 "직권남용의 공범도 직권남용의 상대방인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상고이유를 부분적으로 받아들였다. 국정원 직원인 정보담당관(IO)은 국정원 지휘간부 명령을 거부하기 어렵다. IO는 '야권 인사를 감시하라'는 원 전 원장 지시에 숨겨진 정치관여 목적을 알았다 해도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불법사찰 단순 공모자에 그쳐 공범보다는 피해자에 가깝다. 1⋅2심은 IO가 정치관여에 가담한 공범이라 봤다. 정치관여 공범은 말 그대로 '직권이 아닌 행위' 공범으로 직권남용 공범이 될 수 없고, 설령 직권남용을 인정한다 해도 IO는 공범이 되는 구조여서 피해자가 될 수 없다는 논리였다. 여기엔 국정원법은 정치관여를 금지하고, 금지하는 행위가 직권이 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렸다. 1⋅2심 접근은 대법원이 보기에 형식 논리다. 직권남용 자체가 외형은 정당해 보여도 실질은 부당한 행위를 말하기 때문이다. 이 법리에 따라 정치관여는 곧 직권남용이다. 그런데 IO는 애초 정치관여 공범이라 볼 수 없다. 결국 그들은 직권남용 공범이 아닌 피해자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피해자가 되기 위해 IO가 가져야 하는 '법적 의무'는 블랙리스트 판결 때 '직무'를 찾은 헌법에서 직접 가져왔다. 헌법 제7조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봉사한다' 조문으로부터 '정치적 중립 의무'가 곧바로 부여된다 본 것이다.

1부 판결은 사실상 블랙리스트 판결을 주도한 2부 대법관들이 틀렸다고 뒤늦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치관여 공범에서 직권남용 피해자로 신분이 바뀐 국정원 IO가 작성한 불법사찰 보고 선례는 없었는지 1부는 심리하지 않았다. 당시 박상옥 안철상 노정희 대법관에 동의하지 못한 김상환 대법관이 별도 보충의견을 냈을 때 동참한 박정화 김선수 대법관이 이번 원 전 원장 상고심 재판부인 1부 소속이다. 다만 1부 대법관들은 블랙리스트 판결과 충돌이 아닌 조화를 택했다. 이번 판결은 어디까지나 예외라는 것이다. 원 전 원장에게 적용된 직권남용은 형법이 아닌 국정원법에 존재하는 조항이다. 1부는 보도자료에서 이번 판결의 의의를 "직권남용으로 인한 국가정보원법 위반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할 때 고려하여야 할 사항에 관하여 최초로 설시하였음"이라고 강조했다. 형법상 직권남용죄는 여전히 엄격한 검사 증명책임이 필요하다는 단서가 붙은 셈이다. 국정원이 다른 공적기관과 다른 이유로는 "국정원의 법적 지위와 사실상의 영향력, 직무 및 직무수행 방식의 특수성"이 나열됐다. 철저한 상명하복 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국정원 조직 특성상 위법하고 부당한 지시를 받은 실무자들은 피해자로 보호해줘야 한다는 취지다. 국정원 실무자들은 간부들이 어떻게 의사진행을 결정했는지 제대로 알 수 없는 '차단의 원칙'을 적용받는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출처=연합뉴스]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 [출처=연합뉴스]

◇ '국정원 직권남용 공범' 우병우 유죄 가능성
이번 판결로 당장 영향을 받게 될 사건은 국정원법상 직권남용 공범으로 재판에 넘겨진 우병우(사진) 전 민정수석 사건이다. 지난달 4일 서울고법 형사합의2부(함상훈 김민기 하태한)는 우 전 수석 혐의 중 직권남용 혐의 대부분을 무죄로 봐 징역 2년 6월과 1년 6월을 선고한 원심을 각각 깨고 합쳐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우 전 수석 핵심 혐의는 국정원 2차장 산하에서 국내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국익정보국을 통해 자신을 감찰한 특별감찰관을 역으로 사찰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부분을 추명호 전 국익정보국장 직권남용에 공모했다며 유죄로 인정했다. 반면 추 전 국장을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찍은 문체부 공무원이나 정부에 비판적인 진보교육감을 뒷조사했다는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이 부분 추 전 국장 직권을 인정하면 "국정원의 국내 정보에 관한 직무범위를 더욱 엄격히 제한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어 온 국정원법의 개정 취지에 반하는 것"이라 판시했다. 원 전 원장 상고심 판결 이유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대법원은 우 전 수석 항소심이 이유로 든 부분을 국정원법에 직권남용죄가 신설된 배경이라 설명했다. 국정원법에서 하지 말라고 정한 행위를 했다면 오히려 직권남용으로 처벌할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원 전 원장 상고심 판결 '국정원 예외론'에 따르면 우 전 수석이 추 전 국장과 공모한 혐의는 '직권남용' '의무없는일' 인정이 쉬워져 유죄로 뒤집힐 수 있는 것들이다. 

◇ '울산시장 선거 개입' 靑 민정도 국정원처럼...
대법원이 상명하복 관계를 국정원에서 다른 공적기관으로 확대할 가능성도 있다. 국정원장은 대통령 직속기관이라는 점에서 대통령 보좌기관인 대통령비서실을 뜻하는 청와대가 유력한 후보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지시 내지 협조 요청을 받은 행정부처 또는 공공기관은 '대통령의 뜻'으로 알고 일을 진행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 민정수석은 청와대 수석 중에서도 선임 역할을 하며 반부패비서관실 특감반을 통해 대통령이 임명하는 공직자를 감찰하는 권한을 갖는다. 민정수석실에서 결정하면 법에서 정한 절차 역시 건너뛸 수 있다는 게 공직사회의 잘못된 관행이었다. 실제 1심 진행 중인 '울산시장 청와대 개입 사건'이나 1심에서 대거 유죄가 인정된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모두 민정수석실이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관여한 사건이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 [출처=연합뉴스]
조국 전 청와대 민정수석. [출처=연합뉴스]

울산시장 사건 핵심 피해자는 민정수석 지시에 따라 금융위원회 금융정책국장 출신 유재수 전 부산시 경제부시장 비위 감찰을 더 진행하지 못한 특별감찰반 파견 검찰수사관들이다. 이들은 '유재수가 사표를 낸다고 하니 감찰을 더 할 필요가 없다'는 조국(사진) 전 민정수석 지시를 박형철 전 반부패비서관과 이인걸 전 특감반장으로부터 순차 전달받고 '고위공직자를 감찰해 사실관계를 확인해 후속 조치할 수 있는 권한'을 포기했다. 또 유 전 시장 감찰 권한이 있던 금융위 최종구 전 위원장과 김용범 전 부위원장은 백원우 전 민정비서관으로부터 '유재수 비위에 대해 청와대의 감찰이 있었는데, 대부분 클리어됐고 일부 개인적인 사소한 문제만 있으니 인사에 참고하라'는 말을 들어 추가 감찰에 나서지 못했다. 이들 역시 '금융위 직원 비위 사실을 확정하고 징계 및 인사권을 행사할 권한'을 침해당한 직권남용 피해자다. 특감반과 금융위 관계자 모두 조 전 수석과 백 전 비서관의 말을 대통령 결심으로 이해하고 본인의 권한과 의무를 포기했다는 점에서 직권남용 피해자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은 향후 재판에서 청와대 개입 정도가 인정되는 수준에 따라 직권남용 피해자 인정 여부가 달라질 수 있는 묘한 사건이다. 검찰 공소사실에서 피해자는 '청와대 인사간담회'가 결정한 내정자들이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에 취업하는데 "현장 지원을 하라"는 신미숙 전 균형인사비서관 지시를 환경부 장⋅차관을 통해 재차 지시받은 환경부 운영지원과 공무원들과 각 공공기관 임원추천위원회 위원들이다. 1심 재판부인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1부(김선희 임정엽 권성수)는 '공공기관 임원 내정자를 사전지원할 수 있는 권한'은 운영지원과 공무원들에겐 없고 임추위 위원들에겐 있다는 점에서 관련 혐의를 각각 무죄와 유죄로 달리 판단했다. 그런데 신 비서관은 일부 직권남용 혐의에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을 '기능적 행위지배' 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받았다. 우병우 전 수석이 1심에서 추명호 전 국장을 기능적 행위지배했다며 이석수 전 감찰관 불법사찰 직권남용 공범으로 인정된 것과 대조적이다. 환경부 사건 1심 재판부는 "공공기관 임원들로부터 사표를 징구받기로 공모하였다는 의심은 듦"이라면서도 "청와대 균형인사비서관실에서 그 실행을 독촉하였다는 사정이 보이지 아니하는 점"을 이유로 공범관계 일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수사 단계에서 청와대 비협조로 압수수색을 진행하지 못해 인사간담회 참석자인 인사수석과 민정수석 등 신 전 비서관 윗선까지 재판에 넘기지 못해 생긴 일이다. 그럼에도 원 전 원장 사건에 적용된 상명하복 이론에 따르면 운영지원과장은 여러 차례 신 전 비서관 호출을 당했다는 점에서 직권남용 피해자로 인정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반대로 향후 재판에서 직권남용 범죄사실을 '신 비서관 개인과 환경부 지휘부에서 벌인 일'로 한정한다면 '청와대 지시에 따른 상명하복 여부'는 판단 대상에 오르지 못한다. 유죄로 인정된 혐의마저 무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환경부 사건과 우 전 수석 사건 교차점은 '공무원 필수 보직 기간을 채우지 않고 부당 전보했다'는 혐의다. 환경부 사건에선 일부 유죄, 우 전 수석 사건에선 전부무죄로 다른 결론이 났다. 대법원으로선 선택지로 ㉠우병우 유죄, 김은경⋅신미숙 유죄 ㉡우병우 유죄, 김은경⋅신미숙 무죄 ㉢우병우 무죄, 김은경⋅신미숙 무죄 경우 중 하나를 고르면서 일관된 법리를 마련해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국정원 상명하복 관계론(論)은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행정부처 사이에서 발생한 직권남용과 ㉡민정수석실이 공범 수준이 아닌 주범인 직권남용에 또한 적용된다거나, ㉢민정수석실에 적용하기 어렵다는 결론을 매끄럽게 내놔야 한다.  

◇ 대법 '영혼 없는 공무원' 양산을 자성하다
대법원은 문체부 블랙리스트 판결에서 영혼 없이 부당한 지시에 따르는 하급 공무원들이 존재해도 상급 공무원들은 처벌받지 않는 길을 열었다. 비슷한 사건에서 하급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행위는 법률상 근거한 것이 아닌 까닭에 '상급 공무원들의 직무집행을 보조한 사실행위'라고 주장할 수 있다. 비록 이들은 직권남용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로 재판에 넘겨지는 것이지만 공직사회에서 계속 근무할 필요를 감안해 상급자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공모는 존재하지만 피해는 사라진다. 진짜 피해자는 법정에 세우기 어려운데 가짜 피해자마저 법망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부작용에 대법원이 자성적 차원에서 내놓은 게 국정원 IO를 피해자로 두텁게 보호하는 방법으로 원 전 원장 직권남용 혐의를 대거 유죄 취지로 본 판결이다. 사실상 대법원 소부(小部)가 전합 판결에 반기를 든 것이어서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블랙리스트 판결로 하급심마다 유⋅무죄가 갈린 직권남용죄를 대법원이 깔끔하게 정리했다는 평가도 더는 유효하지 않게 됐다. 

[위키리크스한국=윤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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